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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417413번째 소울라이크 용사-93화 (69/280)

93화

“언제부터 마력이… 돌아온 거냐?”

무엇보다도 큰 변화는, 그녀의 주위를 맴도는 압도적인 시커먼 마력의 폭풍.

그녀는 내가 알던 루시가 아니다. 불사의 마왕, 루스티카 아스모데우스였다.

온몸이 찌릿거리는 압박감에 다리가 풀려버릴 정도였다.

“몇 번이나 말하게 하지 마라. 네가 죽으면 흉마가 내 몸에도 쌓인다니까.”

얼빠진 내 탄성에 루시가 히죽 웃었다. 분위기가 변해서인지 유난히 섬뜩하게 느껴지는 미소였다.

터벅. 루시가 내게 한발짝 다가온다. 나도 모르게 한걸음 물러섰다. 뒤늦게 그 사실을 자각하고 자존심 때문에라도 원상복구했지만.

“용사. 하던대로 고집을 부려라. 네놈은 내 시종이다! 불사의 마왕 루스티카 아스모데우스를 수호하는 자란 말이다! 고집과 독선은 힘있는 자들의 특권이니라!!”

어쨌든 루시는 내 행동 따윈 아랑곳 않고 당당하게 서서 말했다.

루시가 성큼성큼 걸어서 내게 가까이 다가왔고. 그런 만큼 그녀의 목소리도 점점 가까워졌다.

“그리고 고집을 부렸으면 이룰 때까지 밀어붙여라! 이제 와서 징징거리는 꼴은 내가 용서하지 않는다. 흉마에 뜯어먹히든 정신이 산산조각나든 네 선택에 책임을 져라!”

저게 한 달 전에 나한테 혼나고 벌 받으며 질질 짜던 루시와 동일인물이 맞단 말인가.

그런 그녀를 저렇게 화나게 만들 정도로, 지금 내 모습이 한심해 보였나.

그런 생각에 자괴감이 들고 있던 찰나.

“으읍…!”

순간 시체처럼 차가운 입술이 내 입을 덮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눈을 어디에 돌려도 루시의 창백한 얼굴이 한가득 들어왔다.

그리고 꿀렁. 나는 그녀의 입을 통해 쏟아지는 농밀한 검은 마나의 격류를 온몸으로 느껴야 했다.

[불사의 마왕, 루스티카 아스모데우스에 의해 회귀 고정축 강제 개변이 시행되었다.]

[불사의 회귀점이 갱신되었다.]

[일시 - 대륙력 1108년, 1월 13일, 02시 44분]

[장소 - 마르크트레스. 약속의 평원 상부지역, 소도시 케른 서부 관문]

얼떨떨하게 패널을 내려보는 내 앞에서, 루시가 짓궂은 웃음을 배시시 흘렸다.

기분 탓인가. 핏기 없는 루시의 하얀 얼굴이 조금 붉게 물들어 있는 듯했다.

“자. 도망칠 구석은 이몸이 틀어막았다. 이젠 망설일 이유가 없겠지.”

“…….”

“고심해봐야 소용 없으면, 대가리 비우고 쌈박질이나 해라. 그게 네놈에게 어울린다. 내 무식한 수호자….”

그 순간 루시의 눈동자가 핑 돌더니, 이내 변신이 풀렸다.

뿔과 날개가 작아지고, 뿜어져 나오던 칠흑의 마기는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다. 파사삭. 검은 불티들이 허공으로 흩어지며 나비처럼 팔랑거렸다.

그리고….

“으갹.”

동시에 루시가 휘청이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녀를 안아들었다.

내 품에 안착한 루시는 앓는 소리를 잠깐 내는가 싶더니. 이내 중얼거렸다.

“여, 역시 회귀점 갱신하는 게 고작인가… 내 아까운 마력…. 에고 죽겠다….”

뭐냐 이거.

가오는 오지게 잡더니… 애초에 회귀점 한 번 갱신해줄 마력 밖에 못 모은 듯하다.

나는 골골거리는 루시의 모습에 어이가 없어진 나머지 헛웃음을 흘렸다.

“이래가지고 세계정복은 언제 하게. 내 손자 태권도장 다닐 때쯤 시작하냐?”

“시끄럽다. 지금은 더 재밌는 장난감이 있으니까… 마력은 천천히 모으면 되는 게야.”

“…… 그러냐.”

“그렇다.”

그녀에게 있어서 재미없는 인간이 되지 않게 조심해야겠다.

내가 쓴웃음을 짓는 것과 동시에 쿠구구구… 하고 낮은 땅울림이 일어났다. 지평선 너머가 하얗게 빛나며 눈부신 백광을 토해낸다.

방향은 약속의 평원.

새하얀 폭발. 아스타르트 파편 소환 의식의 시작을 알리는 전조였다.

나는 주먹을 한 번 불끈 쥐고. 루시를 그 자리에 내려놓았다.

“내가 흉마에 먹혀서 미친놈이 되면. 네가 배때지에 칼침 쑤셔서 깨워라.”

나는 농담 반 진담 반 섞어 루시에게 말했다. 목소리는 스스로 놀랄 정도로 잠겨 있었다.

바닥에 널브러졌던 루시도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라고.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서 정신이 번쩍 들게 해주마.”

“… 지금까지 했던 말중에 제일 믿음직하다. X발.”

나는 곧장 쌍검을 뽑아들었고. 케른의 서쪽 관문을 향해 질주했다.

투학! 한 번의 도약으로 주변 풍경이 쏜살같이 멀어진다.

“나 일하러 간다!!”

루시는 여기 놔두면 곧 제논이 찾아와, 설백이 있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그러나 제논은 나와 함께 싸우지 않는다. 제논은 습격을 대비해 설백과 루시, 제나를 지키는 것으로 이미 말을 맞췄다.

즉 케른에서 불사교도들의 무차별 테러를 막는 것은, 온전히 나의 몫이다.

‘도망칠 곳도 없다.’

이상하다. 내가 앞뒤 컴컴하던 막장인생이라 그런가.

미친 사상을 가진 주인님께서 도망칠 구석을 없애주고 나니, 오히려 정신이 맑아졌다.

내가 지금 뭘 해야할지 확실히 보이기 시작했다.

‘싸움에만 집중한다!’

사전준비 단계로는 돌아갈 수 없다.

이젠 정말 전투뿐이다. 남의 손 빌릴 생각은 버린다.

어떻게든 불사교와의 전투에서 승리해 아스타르트 소환을 막는다.

어떻게든, 내 손으로 내일의 아침 해를 맞이해 보겠다.

“가즈아아아!!”

* * *

미친 듯이 달려온 나는 곧 케른의 시가지 한복판에 들어섰다.

“꺄아아악!”

“왜, 왜 이러세요!”

“누가 좀 도와줘! 살려주시오!”

“아아아악!”

이미 도처에서 시민들의 학살이 자행되고 있었다.

아무 특색 없는 인물들이, 주변인들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하는 아비규환의 현장이 시선 한가득 들어온다.

“꺄아아악! 안 돼요! 우리 애만은! 차, 차라리 나를!!”

“엄마! 엄마아아!”

비명이 도처에서 울린다.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고함소리가, 분주한 발소리에 뒤섞여 여기저기서 끊임없이 들려왔다.

“미, 미친놈들이 사람을 죽인다!”

“경비! 경비를 불러!!”

나는 케른의 현상황을 보며, 제논이 해줬던 말을 절절히 실감하고 있었다.

방금 도착한 내가 보기엔… 그냥 케른의 평범한 주민들이 편 가르고 패싸움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그렇게 보이는 이유는 간단하다.

'정말 놀라울 정도로… 아무런 특징이 없다.'

불사교도들이 아무 특징이 없기 때문인가.

겉보기엔 평범한 사람들끼리 시가지 한복판에서, 피튀는 살육전을 벌이는 현실이 유난히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한 편.

구역질 날정도로 심각함게 와닿았다.

“이놈들이! 이몸을 얕보지 마라!”

“넋놓고 당할 수는 없지!”

챙, 카앙!

금속음이 울리는 곳에서는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나름 한가락 하는 용사들이나 주민들이 저항을 시도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내지른 고함소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비명으로 통일되었다.

“크아아악!”

“뭐, 뭐냐! 대체 이놈들은 뭐야!!”

싸움은 길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싸움이라 부르기도 민망하다.

남녀노소와 힘의 강약을 가리지 않고, 결국에는 불사교도의 날붙이가 저항하는 모든 이들의 육체를 꿰뚫고 들어갔다.

푸직, 으직, 우드득! 창과 검이 부러지고, 누군가의 사지가 절단된다. 불사교도의 것도 있고 시민들의 것도 있다.

진짜 차이는 거기서부터 발생했다.

“다, 다리가 잘려도 달려든단 말인가!”

“괴물… 괴물들이다! 아아아악!”

불사교도는 신체가 잘려도, 무기가 부러져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사람들을 죽이러 달려들었다.

무기가 부러졌으면 맨손으로. 다리가 잘렸으면 기어서. 양팔이 잘렸으면 물어뜯는다.

그 턱마저 날아갔으면… 박치기를 하러 달려든다.

우지직! 빠가각!

핏방울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섬짓한 소음이 점점 많이 들려온다.

그러면 거기서는 어김없이 부러진 병장기나 누군가의 신체 일부가 날아다니며 존재감을 발산했다.

“사, 살려줘….”

“죄, 죄송합니다… 제, 제발 살려만… 살려만 주세요…!”

“히이이익!!”

호기로운 고함은 순식간에 구차한 구걸로 변해 있었다.

그러나 우지직. 그들의 몰골을 조롱하듯이, 불사교도는 시민들의 목으로 날붙이를 쑤셔넣었다.

목숨을 구걸하던 이들의 의아한 얼굴들이 허공으로 차례차례 치솟는다.

“아, 악귀… 야차들이다…!”

불사교도… 로 추정되는 그들은 절대 손속에 자비를 두지 않았다.

그것이 일반인과 불사교의 가장 큰 차이점이자. 불사교가 이길 수 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살인을 향한 불사교도의 집착은… 잠깐 목격한 내가 닭살이 돋을 정도였으니까.

'그래. 알았다.'

현상황에서 불사교도를 걸러낼 첫번째 방법이 번득였다.

살인을 한 치도 망설이지 않는 놈들. 그들이 바로 불사교도다.

'미미르의 눈!!'

물론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1차 감별을 했으면 확정지을 결정타가 필요하지.

하지만 그 수단이라면 내가 이미 가지고 있었다.

[몬스터 정보]

[명칭: 케인 코커스]

[체력: 980/980 마력: 730/730]

[힘: 124 민첩: 106 지능: 33]

[상세: 아신의 뜻을 져버린 용사. 더러운 배신자에게 죽음의 철퇴를.]

'잠깐. 이건….?!'

나는 떠오른 상태창을 보고 순간 눈을 부릅떴다.

놈들의 표기가 용사도 일반인도 아닌, 몬스터로 표기되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상세 설명란에는 작성자의 적대감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멘트까지 있다.

'마녀의 기사한테 뒤통수 맞더니, 배신자가 많이 싫어졌구만?'

당연히 그 분노는 이 시스템을 구축한 아신들의 분노일 테다. 그걸 깨닫자 전말이 대충 가늠되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아신을 배신하면 용사든 시민이든 시스템상 '몬스터'로서 취급되고, 인류의 공적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이건 크다. 놈들이 인간으로 취급될 때와는 엄청난 차이가 발생한다.

새롭게 눈앞에 등장한 돌파구에 나는 회심의 미소를 흘렸다.

'몬스터는, 잡으면 경험치를 준다!'

가능성이 있다.

어쩌면… 정말로 나 혼자서도 이놈들을 막을 수 있을지 모른다.

물론 이번 생의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내 예상대로 된다면….

‘마지막엔 결국 내가 이긴다!’

나는 곧장 망자의 함을 열었다. 상비하고 다니는 펜과 종이를 들어, 이 세기의 대발견을 휘갈겨 넣었다.

망자의 함을 닫는다. 짧은 공명음과 음울한 보랏빛이 한 번 비친 뒤, 나는 한숨을 슬쩍 내쉬었다.

달성감에서 나오는 한숨이었다.

“역시 나는….”

나는 사납게 웃으며 쌍검을 치켜들었고. 곧장 주머니를 뒤져 에테르 병을 입에 처넣었다.

키이이잉! 몸이 오색으로 빛나며 옅은 증기를 뿜는다.

“이게 더 성미에 맞아.”

흑익을 발동시켰다. 파바박! 망토가 갈라지며 거대한 까마귀의 날개로 변했다.

나는 시커먼 밤하늘로 날아올랐다. 달빛이 등 뒤로 내리쬐어 지상에 흐릿한 그림자를 만들었다. 몇몇 불사교도들이 그것을 눈치채고 나를 올려다본다.

―대가리 비우고 쌈박질이나 해라. 그게 네놈에게 어울린다.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해.

루시를 떠올리며 히죽 웃어준 나는, 불사교도를 도살하기 위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이번만큼은 대가리 비우고 쌈박질이나 하는게 정답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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