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
두 사람이 사라지자 잠깐동안 숨막히는 적막이 찾아왔다.
이제 설백은 약속의 평원에서 홀로 대기하게 될 것이고. 제논은 제나를 안전지대로 피신시킨다.
그리고 폭발이 일어나고 나면. 제논은 만의 하나를 대비해서 루시를 데리고 설백이 있는 곳을 찾아간 뒤, 두 사람을 데리고 내가 있는 곳으로 다시 찾아온다.
‘원래 세스나를 포함한 계획도 있었지만….’
뿐만 아니라 케른상연회, 혹시나 적랑이 합류했을 때의 계획도 전부 준비해 뒀다.
하지만 다 소용없다. 결국 셋 중 누구도 포섭하지 못했고. 전투는 내 혼자의 몫이 되었다.
‘… 착한 생각해라. 착한 생각.’
나는 자꾸 스멀스멀 가슴을 기어오르는 불안과 공포를 이겨내느라 여념이 없었다.
물량에는 장사가 없다. 특히 암습이 특기인 나는 직업 특성상 더 그렇다.
이번 생은 생존에 실패할 것이다.
거의 확신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러면 다음 생은?
케른상연회를 포섭하자.
설백이 확실하게 세스나를 물어올 수 있을만한 대책을 세워보자.
적랑의 행방을 알 수 있을만한 방법을 찾아보자.
그러면. 그러면 분명히. 다음 번에는 분명….
―그렇게 잘 풀릴 수 있겠냐? 고작 하루만에?
…….
뇌리 한켠에서 끊임없이 질문하는 시커먼 목소리에 좀처럼 대답하지 못했다.
솔직히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는 것이다. 내가 살 수 있을지.
내가… 이보다 더 잘 할 수 있을까.
―그렇게 되려면 너는… 앞으로 몇 번의 오늘이 더 필요할까?
나는 언제나 최선을 다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나는 한결같이 오지게 살고 싶었으니까.
그렇게 최선을 다해 발버둥친 결과가 이거라고. 이거보다 더 잘 하라고?
다음 생에 다시 하면… 이거보다 더 좋은 결과가 나온다는 법이, 대체 어디 있는데.
―너는… 나는 앞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이번 생에는 제논을 포섭했지.
하지만 만약에… 다음 생에는 제논마저 포섭하지 못한다면?
이번이 내게 찾아온 처음이자 마지막 찬스라면?
‘무섭다.’
나는 그 때 처음으로 실감했다.
죽음을 하찮게 여기는 나에 대한 공포. 그 이상으로 지금 나를 짓누르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생 이상으로 내가 열심히 할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존나 무섭다… 진짜….”
앞으로 10번. 50번. 100번… 몇 번을 반복해도 이번만한 기회가 찾아오지 않는다면.
그러면… 나는, 그 현실을 감당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쫓아와 옴짝달싹 못하고 있던 나였고.
“뭐 그리 무섭느냐. 쫄았냐? 용사.”
언제나처럼 비아냥거리는 앙칼진 미성이 내 정신을 깨웠다.
고개를 돌려보니. 거기엔 와인 같은 새빨간 눈동자로 이쪽을 보는 루시가 있었다.
그녀는 내 굳은 표정을 보고 즐겁다는 양 이죽거리더니. 이내 말한다.
“여봐라 용사. 네가 다음 생에 깨어나면. 이번보다 잘 할 자신이 있느냐?”
이 년이 그 사이 독심술을 익혔나.
식겁한 나였다.
* * *
“말해 봐라 용사. 네 진심을 듣고 싶다.”
루시는 당당한 행색으로 내 앞에 버티고 서서 그렇게 물어왔다.
눈이 평소답지 않게 반짝거리고 있다. 단순 흥미를 넘어, 끈덕진 관심이 느껴지는 눈빛.
“…… 어떻냐고?”
어떻냐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가 그런 질문을 하면 안 되지.
35번이나 필사적으로 발악했던 나를 처음부터 끝까지 봐온 네가… 나보다 잘 알잖아.
“… 모르겠다.”
나는 통렬하게 고개를 저었다.
어쩌면 잘될 수도 있다. 케른상연회를 구워삶을 수도 있고. 기적적으로 세스나를 찾아낼 수도 있고. 적랑의 위치를 알아내 접촉할 수도 있지.
‘하지만 안 되면?’
하지만 제논에게 어이없이 당했을 때처럼. 아무도 포섭하지 못한 채 최악으로 치달을 가능성도 있다. 난 이미… 그 최악의 결과를 직접 보고 온 사람이다.
내가 오만상을 쓴 채 우물쭈물하고 있자니. 그 모습을 빤히 쳐다보던 마왕이 카핫, 하고 높은 웃음소리를 냈다.
“그 사이 쫄보가 다됐구로. 엘더리치를 사냥한다고 날 이용해먹던 뻔뻔한 면상은 시장에 팔아치웠느냐.”
“그 때랑 지금은… 상황이 변했지.”
나는 변명하듯 간신히 한 마디 했다.
그러자 마왕의 안색이 싹 변했다. 그녀가 팔짱을 단단히 끼운다.
조롱이 담긴 시선이 쏟아졌다.
“변한 건 상황이 아니라 네놈이다.”
“… 내가?”
“이거나 좀 확실히 하자꾸나. 네가 무서운 건 작전이 실패해서 죽는 것이냐? 아니면 너 자신이냐?”
나는 그 말에 숨을 삼키고, 잠깐 생각에 잠겼다.
의식이 까마득한 적막 속으로 침잠된다. 그때서야 처음으로 내가 지금 느끼는 시커먼 감정을 직면했다.
마왕이 때맞춰 서늘한 목소리로 말한다.
“뭐가 그리 초조한 게냐.”
초조. 그래. 초조함. 나는 지금 초조하다.
원인 모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건 다름 아닌 초조함과 강박감이었다.
나는 멍청하게 입을 벌렸다.
“딱히 초조하진….”
“흉마에 먹히는 것이 두려우냐?”
“…….”
나는 눈을 부릅뜨고 마왕을 쳐다봤다.
마왕은 내 쪽으로 성큼 한 발짝 다가오더니. 이내 손가락을 들어 내 이마를 콱, 찍었다.
“이대로 수없이 죽음을 반복하다 흉마에 먹혀버리면 어쩌나. 그걸 걱정하는 게로군? 이제 함부로 죽을 수가 없겠지. 슬슬 죽음이 하찮게 느껴지는 한편. 그만큼 목숨 하나하나가 소중하게 느껴지는 거겠지.”
“어떻게 그걸….”
“어떻게 알고 있냐고? 내가 처음에 분명 말했을 거다. 네 몸에 흉마가 쌓이는만큼 내 몸에도 쌓인다. 내 앞에서 부활에 관한 거짓말은 통하지 않느니라.”
그 말대로였다. 나도 마왕이 말하고 나서야, 내가 그런 상태였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지금 내 상태를 나 이상으로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빠악! 마왕은 내 이마를 찔렀던 손가락을 구부려 딱밤을 때렸다.
“예라이 한심한 화상아!”
마왕의 얼굴은 분노로 점철되어 있었다.
딱밤으론 성이 안 찼는지, 언제나 하던 것처럼 내 종아리를 마구 걷어차기 시작했다.
물론 아픔은 전혀 없었다만. 그녀가 느끼는 분노는 확실히 전해졌다.
“용사! 네놈은 내가 왜 엘더리치를 사냥하는데 도움을 줬는지 알고나 있느냐!”
루시의 부릅뜬 붉은 눈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녀가 내 멱살을 채잡았다. 새하얀 은발이 펄럭이며 시야를 장악했다.
그녀는 나와 똑바로 눈을 맞춘 채 계속 말했다.
“난 가지고 싶은 건 가져야 직성이 풀린다. 세상을 정복하려는 것도 그것 때문이니까!”
“갑자기 무슨….”
“네가 미친 부탁을 할 때부터 한 눈에 알아봤지. 네놈은 나와 동류다!”
내가 저 미친년이랑 동류라고? 세상에서 제일 듣기 싫은 말 꼽으라면 탑3 안에 들을만한 발언이다.
내가 말없이 질색하는 시선을 보내자 루시가 발끈했다.
“뭐냐 그 면상은! 지금만 해도 그렇잖아!”
콰악. 루시가 내 볼을 붙잡더니 그대로 쭈욱 늘린다. 이참에 평소에 당하던 것의 복수라도 하려는 행색이다.
그녀는 일부러 나를 도발하려는 듯이 위태롭게 입꼬리를 올렸다.
“솔직히 네놈도 알고 있지 않나? 이 상황을 가장 간단하게 벗어나는 방법.”
“…….”
“그 검은 머리 계집을 버리고 도망쳐라. 네놈은 어차피 이 도시의 다른 인간들 목숨 따위 별로 신경 쓰지도 않잖나? 그게 가장 안전하고 확실하고 빠르다. 옛말에 원래 검은 머리 짐승은 기르는 게 아니라….”
“개소리 2주 압수 새꺄.”
나는 단호하게 루시의 말을 끊었다. 스스로 놀랄 정도로 불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왠지는 몰라도… 그런 말을 주워섬기는 루시의 얼굴 위로 미네르바가 겹쳐보였다.
이전에 미네르바에게 그런 말을 듣기라도 했던 것처럼. 그런 적은 없는데도 말이다.
“하.”
루시는 아랑곳않고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내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한 반응이다.
“그래. 그럴 줄 알았다. 그거야말로 네가 나랑 동류라는 가장 큰 증거다.”
나를 빤히 올려다보는 눈빛. 나는 그녀를 마주보다가 깨달았다.
이 여자는 생각보다 날…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었군. 그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나와는 다르게 말이다.
“그게 네 쓸데없는 고집이다. 이제 와서 정 때문이라고 변명할 생각은 마라. 용사 박정용. 네가 남한테 쉽게 정 안붙이는 뒤틀린 놈이라는 건 다 알고 있느니라.”
그녀의 말대로다.
세계 평화도 관심없고, 솔직히 케른 주민들 따위 죽든 말든 아무래도 상관없다.
하지만 케른의 주민이 학살되는 걸 방치하면, 의식이 완성되고 설백이 죽게 된다. 그건 안 된다.
나는 야망은 전혀 없지만. 지금 내 손에 있는 걸 지키고 싶은 욕심은 있다.
솔직히 그 욕심 하나만큼은 누구보다도 덕지덕지 그득하다.
능력부족으로 주변인을 잃는 것은 진저리가 난다. 이세계 전생까지 해서 그렇게 사는 건 사양이다.
‘… 내가 잘못된 건가.’
여기선 냉정하게 판단해서, 소위 말하는 ‘줄 건 줘’를 시전해야 하나.
지금 내가 하는 발악은 호구들이나 할 법한 쓸데없는 똥고집에 불과한가.
누군가 내 꼬라지를 보면 ‘제발 사이다 좀!’ 하면서 한탄할 장면을 연출하는 건가.
콰아앙! 루시가 발을 구르는 소리가 내 궁상을 끊었다.
“하지만 난 그런 네가 마음에 들어서 힘을 빌려줬다! 지금처럼 빌빌대는 꼴을 보고 싶은 게 아니란 말이다!”
동시에 고함이 쩌렁쩌렁 울렸다. 상념에 잠겨 있던 나는 퍼뜩 놀라 그녀를 쳐다봤다.
그리고 곧장 두 눈을 터질 듯이 부릅뜨고 말았다.
“야… 너, 너 그 모습은….”
루시가 변해 있었다.
정체를 숨기기 위한 낡은 로브는 벗어던졌고. 하얀 은발 아래로 흉흉한 적색 안광이 폭사된다.
서클릿으로 가리고 있던 앙증맞은 뿔은 도깨비의 그것처럼 우뚝 솟아있었고. 숄로 덮어놨던 까만 날개도 어느새 거대해져 시야를 완전히 차단할 정도였다.
“언제부터 마력이… 돌아온 거냐?”
무엇보다도 큰 변화는, 그녀의 주위를 맴도는 압도적인 시커먼 마력의 폭풍.
그녀는 내가 알던 루시가 아니다. 불사의 마왕, 루스티카 아스모데우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