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시간은 화살처럼 흘러갔고. 해는 뉘엿뉘엿 기울어, 어느새 캄캄한 밤이 찾아왔다.
물론 나는 그동안 손가락만 빨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어떻게든 더 전력을 증강시킬 방법이 없을까 해서. 인근에 가장 강력한 몬스터가 서식한다는 지역으로 찾아온 상태다.
“이봐 용사.”
“왜.”
“드루이드는 분명 숲을 지키는 나무의 정령 같은 놈들 아니냐?”
“내가 알기론 그런데.”
“근데 여기 숲이 어디 있냐.”
“알 게 뭐야. 옛날엔 있었다잖아.”
“쯧. 인간놈들은 뭔 과거에 그리 붙잡혀 사는지 원….”
약속의 평원에서 살짝 더 서쪽으로 가면 무너진 사원 같은 곳이 있었는데. 이름은 ‘드루이드의 사원’이다.
왜 드루이드의 사원이냐고? 원래는 여기가 삼림지대였고, 이름이 ‘드루이드의 숲’이었단다
물론 지금은 약속의 평원처럼 숲의 흔적도 남아있지 않은 황량한 평야다.
어쨌든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이 사원을 중심으로 강력한 몬스터가 터를 잡아버려서 유적을 조사할 수가 없다는 모양이다.
그리고 이세계의 주민들이 정식으로 용사들에게 의뢰를 할 경우, 퀘스트가 발생한다. 케른처럼 번화한 마을은 아예 퀘스트 수주와 의뢰를 할 수 있는 모험가 길드가 따로 존재한다.
내 노림수는 바로 그 퀘스트였다.
[퀘스트 발생!]
[명칭: 드루이드 신전의 점령자]
[난이도: 고급]
[상세: 케른의 유물연구가 월영은 신성국 슈엘츠의 유물을 발굴하기 위해 드루이드의 사원을 연구하려 한다. 어떤 방법을 사용해도 상관없다. 드루이드의 사원에 터를 잡은 몬스터를 모두 없애자.]
[보상: 케른 내 주민 평판 상승. 전 스탯 +5. 히어로 센스 +3]
꼴랑 전 스탯 5 올리려고 이 고생을 사서 하냐? 뭐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좀 단순하게 생각하면 전 스탯이 5 상승하는 건 5레벨을 올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절대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다.
사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바로….
‘… 뭐라도 안 하면 미칠 것 같다.’
바로 그것이다.
불안. 초조. 공포. 강박.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자꾸 가슴에 스며들고. 내 뇌로 속삭인다.
이번 생은 글렀다고. 변수가 너무 많다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라고.
까짓 거 몇 번을 죽든… 다시 살아나서, 다 쳐죽여버리면 되는 거 아니냐고.
‘부족해… 더 강해져야 돼….’
가만히 있으면 잡음이 더 심해진다. 지금 나는 뭐라도 해서, 머리를 비워야 했다. 살아남기 위한 발악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중2병 같아서 이런 표현은 하기 싫었는데… 정말로, 내가 아닌 뭔가가 되어버릴 것 같다.
―쿠아아악!
그래서 이곳 드루이드의 사원에 자리한 몬스터가 대체 뭐였는고 하면. 골렘들이었다.
나는 베스타크 칼질 한 방에 두부처럼 썰리는 눈앞의 강철 골렘들을 보며 슬쩍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상대도 안 되는군.”
나는 쓰러진 골렘들과 내 앞을 막아서는 수 마리 골렘들을 나란히 쳐다봤다.
삐빅. 효과음과 함께 상태창이 떠올랐다.
[몬스터 정보]
[명칭: 망집(妄執)의 골렘]
[체력: 480/480 마력: 510/510]
[힘: 101 민첩: 29 지능: 55]
[상세: 고대의 드루이드 엘카의 마지막 집착이 담긴 골렘. 조악한 골렘술로 인해 원본의 강력함을 재현하지는 못했다.]
몬스터는 기본적으로 레벨이 표기되지 않는다. 다만 스테이터스를 종합적으로 따져봤을 때, 대충 망집의 골렘 레벨은 70―100 전후이다.
참고로 내가 한참 전에 할센베르크에서 졸업했던… 유령기사가 딱 이 정도의 스펙이었다.
상대가 안 되는 건 상관없다. 내가 그만큼 강해졌다는 증거니까 오히려 좀 기쁘기까지 하다.
그에 따른 문제가 생기니까 그렇지.
‘… 경험치가 전혀 안 올라.’
그렇다. 용사 육성 시스템은 레벨이 상승할수록 경험치 상한폭도 가파르게 상승한다. 이 정도 스펙의 몬스터는 하루 종일 때려잡아도 1레벨도 안 오른다.
다만 제논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자기보다 하이스펙인 몬스터는 그만큼 추가 경험치가 막대하게 들어온다고 한다. 그래서 내가 할센베르크에서 고작 2주만에 미친 듯한 폭렙업을 할 수 있었던 거고.
로우리스크엔 철저한 로우리턴, 하이리스크엔 철저한 하이리턴인 셈이다.
“퀘스트 보상으로 만족하는 수밖에.”
나는 중얼거리며 곧장 스킬을 발동시켰다.
파바바박! 주위로 14개의 마력검이 생성됨과 동시에, 망토가 열 가닥으로 갈라지며 꿈틀거리는 시커먼 가시촉수를 만들어냈다.
‘그래. 다른 건 몰라도 이건 좀 괜찮군.’
사원에 자리잡은 골렘이 무식하게 많아서, 스킬 다루는 연습은 기가 막히게 된다는 점.
기왕 시험해보는 거, 나는 직업 스킬로 받았던 스킬들도 시험해보기로 했다.
‘사냥 표식.’
내가 난이도 상의 시련을 돌파하고 얻은 직업스킬은 총 세 개.
그 중 확률적으로 터무니없는 속도의 공격을 가능하게 해주는 ‘눈보다 빠른 손’ 스킬은 패시브 스킬이다.
사냥 표식은 특수한 표식을 찍어 추격을 용이하게 하고, 표식이 남아있는 동안 대상에게 가하는 데미지를 폭발적으로 증가시켜주는 스킬이었다.
―그, 우우우….
골렘 하나의 이마에 시커먼 해골 그림이 떠올랐다.
저 WA!풍 센스는 사신 자매들의 것이다. 내 감성 아니니 오해하지 말자.
나는 그 골렘을 가만히 노려보며 다음 스킬도 영창했다.
“그림자 사슬!”
그러자 덜컹! 내 뒤로 시커먼 문이 하나 생기더니. 문이 서서히 열리며 안에서 꿈틀대던 어둠이 골렘에게 달려들었다.
촤르르륵! 꿀렁거리던 어둠의 형태는 점점 정형화되었고. 이내 골렘을 속박하는 단단한 쇠사슬 더미로 변했다.
―그오… 그오오오!
골렘은 비명처럼 들리는 목소리를 내뿜었다.
놈이 저항하려고 몸을 비틀 때마다 사슬은 시커먼 기운을 울컥 내뱉었다. 그 기운이 골렘에게 처덕처덕 달라붙는다. 골렘은 더욱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나는 그 골렘을 가만히 살펴봤다.
[상태 이상 - 탈기(脫氣)]
[상세: 대상의 체력을 강제로 빼앗는다. 빼앗은 체력은 시전자의 체력으로 환원된다.]
그렇다. 두 번째 액티브 스킬인 ‘그림자 사슬’에는 무려 에너지 드레인 효과까지 달려 있었다.
나는 괴로움에 바둥거리는 골렘을 보며 가학적인 기쁨에 젖었다.
‘이젠 전직 없는 박정용은 상상도 할 수 없어!!’
나는 쓰게 웃으며 마력검과 촉수를 동시에 사출시켰다.
마력검 14개와 가시촉수 10개. 총 24개 개체를 동시에 컨트롤하는 것정도는, 이미 내 손발처럼 쉽게 움직이는 경지에 이른지 오래다.
―쿠아악….
―비상… 코어 붕괴….
―동력… 전달… 실패….
사정없이 꿰뚫리고, 찢어지고, 우그러지는 골렘들. 스킬샷 한 방에 사실상 한 마리씩 부서지다 보니, 생각보다 정리가 금방 될 것 같았다.
나는 끊임없이 스킬을 영창하며 천천히 골렘들을 차근차근 부숴나갔다.
놈들의 비명 아닌 비명이 더 이상 울리지 않을 때까지.
[퀘스트 완료!]
[명칭: 드루이드 신전의 점령자]
[상세: 사원을 점령했던 골렘이 모두 사라졌다. 무의미한 원념을 품었던 고대의 드루이드도 이젠 편하게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이다.]
[보상: 케른 내 주민 평판 상승. 전 스탯 +5. 히어로 센스 +3]
* * *
약속했던 시간이 되었다.
케른과 약속의 평원이 이어지는 서쪽 관문 앞. 나는 루시와 함께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일행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곧 자정이다….’
이제 이곳으로 제논과 설백이 찾아올 것이다.
과연 성공했을까? 아니, 해야 한다. 다른 한쪽 믿는 구석이었던 케른상연회는 포섭에 실패했다.
여기서 세스나까지 없다면… 굉장히 절망적인 전투가 될 건 분명하다.
“제발… 제발 기적을 일으켜줘 설백…!”
“본인은 실패해 놓고 남한테 기도나 하는 꼬라지라니… 추하기 그지없구로.”
옆에서 루시가 짤딜을 넣는다. 상관없다. 이 새낀 맨날 이랬다.
지금은 저런 무능 마왕보다도, 한 줄기 희망인 설백에게 극한의 기도메타를 적용할 때다.
줄기차게 기도하길 수 분. 드디어 공간이 빠지직,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찢어져 내렸다.
“드, 드디어!”
나는 화색을 띄우며 곧장 찢어진 공간 앞으로 달려갔다. 불쑥, 먼저 손이 튀어나온다. 제논의 손이었다.
제논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뒤를 이어 설백이 빼꼼 고개를 내민다.
“…….”
“…….”
두 사람의 미묘한 표정과 어색한 침묵이 심히 신경쓰였지만. 나는 계속해서 다음 사람이 나오길 기다렸다.
그리고 스르륵. 찢어졌던 공간은 제논과 설백만을 토해낸 채, 그대로 닫혀버렸다.
순간 바닥이 꺼지는 듯한 느낌이 온몸을 휘감았다.
“… 죄, 죄송해요 정용님.”
그리고 이어지는 설백의 울먹이는 사죄. 확인사살이었다.
나는 제논과 설백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허. 나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못 찾았구나.”
“네… 저, 정보 길드랑 정보상에 의뢰도 넣고, 음식점부터 노예상까지 뒤져보고 전단지까지 있는대로 붙였는데… 정용님이 믿고 맏겨 주셨는데… 흐흑!”
“아니야. 괜찮아. 문제없어… 울지 마.”
아니. 문제 있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 다 끝났다 박정용. 네 이번 생은 이걸로 끝이다.
이래저래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서럽게 우는 설백을 보니 그럴 마음도 사라졌다.
대신 나는 힘빠진 웃음과 함께 그녀에게 다른 걸 물었다.
“뭐 재밌는 거 있든?”
“…… 네, 네?”
“수도에 뭐 재밌는 거 없었냐고. 아니면 재미있어 보이는 거라도.”
“재, 재밌는… 거라면….”
내 힘빠진 얼굴을 보고 설백이 퍼뜩 머리를 쥐어짜기 시작했다. 눈을 질끈 감고 끙끙거린다.
곧 그녀는 아, 하는 탄성과 함께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곧 무신제라는 전국 규모의 격투대회가 수도에서 열린다고… 들었어요.”
“오호.”
“그리고 무신제가 끝나면… 불꽃놀이라는 걸 한 대요. 하늘에 화염이 꽃처럼 치솟는 아름다운 것이라고… 한 번 보면 다시는 잊지 못할 정도로 아름답대요.”
“불꽃놀이라.”
이쪽 세상에도 불꽃놀이가 있긴 하구나.
무신제라면 마르크트레스의 선거 겸 격투대회인 국가이벤트였지. 그 피날레로 하는 불꽃놀이면 무지막지하게 성대하게 벌이겠구만.
나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고, 설백에게 말했다.
“그러면 이번 일 마무리되면 바로 수도로 올라가서. 그거 꼭 보자고.”
“…… 네?”
“한 번 보면 다시는 잊지 못할 정도로 아름다우면 봐줘야지. 그럼.”
설백을 위로하고자 내뱉은 말이기도 하고. 나 자신에게 미래를 다짐하는 말이기도 했다.
그거 이상의 큰 의미는 없었다.
“아… 으…! 네… 네!”
그것을 설백은 대체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갑자기 눈물을 펑펑 흘리기 시작하더니, 붉게 물든 얼굴로 고개를 연신 끄덕거린다.
“꼭 봐요. 무신제가 끝나면… 꼭이에요.”
우는 와중에 설백이 활짝 웃었다.
그렇게 필사적인 미소를 나는 태어나서 본 기억이 없다.
'이야. 장하다 박정용.'
당장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와중에 데이트 약속을 잡아내다니. 난 사실 하렘마스터의 자질이 있는 거 아닐까?
자학적인 비아냥이나 중얼대고 있으려니, 제논이 내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저 여자는 정말 최선을 다했다. 애초에 한나절 안에 대도시에서 사람 하나 찾는 것 자체가 불가능에 가까운 주문이었다.”
같이 세스나 찾다가 그 사이 친구라도 먹었나. 제논이 설백의 실드를 쳐주고 있었다.
나는 안 어울리는 짓을 하는 제논을 향해 비웃음을 머금었다.
“그래. 나도 다 아니까 뭐라 안 했잖아. 말도 안 되는 부탁인 건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었어.”
“… 그냥 전해두고 싶었을 뿐이다.”
“고맙다. 이젠 너도 네 할일 해.”
“알겠다. 그럼.”
제논은 내게 짧게 목례를 하더니, 훌쩍이는 설백의 어깨를 붙잡았다.
파지지직! 다시금 공간이 갈라지더니 두 사람의 신형을 삼켜버렸다.
텔레포트였다. 두 사람은 이제 약속의 평원에 갈 것이고. 설백은 거기서 의식의 시작을 기다릴 것이다.
“…….”
나는 한동안 두 사람이 사라진 장소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하늘을 쳐다봤다.
뭐, 물론.
혼자 궁상 떤다고 없던 뾰족한 수가 솟아나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