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3417413번째 소울라이크 용사-90화 (66/280)

90화 에너미 엣 더 게이트

“크억!”

“크악!

“아아악!

좁고 음습한 골목. 세 사내의 비명이 쩌렁쩌렁 울렸다.

털퍼덕. 피와 오물로 젖은 신형 셋이 동시에 바닥에 쓰러졌다. 그들의 위로 꿈틀거리던 새카만 촉수 다발이 순식간에 줄어들더니, 원래의 망토로 돌아갔다.

“그만. 잘 알았다. 너희들의 수준.”

물론 망토를 차고 있는 건 바로 나였고.

내게 페이탈 쏜즈를 얻어맞은 건, 케른상연회의 특등살수들이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 암호를 무시하고 바로 히크와 접촉하려 했더니 이렇게 되어 버렸다.

“시시해서 죽고 싶어졌다.”

나는 곧장 검을 뽑아들었다. 파지지직! 내 주변으로 14개의 마력검이 어른거리며 싸늘한 예광을 발하기 시작했다.

이미 내 페이탈 쏜즈로 전력의 절반을 잃은 살수들은 패색이 다분했고. 나를 가만히 살펴보던 히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아름다운 푸른 검기. 어디서 많이 봤다 했더니… 북방의 호랑이 할센베르크 변경백의 비전이 아닌가.”

그리고 전생과 똑같은 멘트를 주워섬겼다.

나는 그 말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고. 살수들은 그걸 비웃음으로 생각했는지 발끈한 눈초리였지만.

그 전에 히크가 한 발 앞으로 나서 그들을 제지했다.

“맞나 아닌가, 한 번 제대로 보시지.”

나는 위협 삼아 베스타크를 휘둘렀다.

피피피핑! 곧장 마력검이 나선을 그리며 히크를 향해 쏟아졌다.

“유성우를 보는 듯한 마력 칼날의 쇄도. 규모는 조금 작지만 확실하군.”

카카캉!

전생과 똑같이 마력 칼날은 허공에서 흩어져 버렸다. 나는 나른하게 뜬 눈으로 히크를 노려봤다.

두번째 이벤트라 감흥도 딱히 없다. 내가 찾아온 시간이 다른만큼 뭔가 다른 반응을 보여주지 않을까 싶었는데. 의외로 상황부터 대사까지 그대로 판박이였다.

“직접 보게 되어 영광일세. 엘더리치 슬레이어.”

히크는 전처럼 내게 고개를 숙였다.

다시 봐도 정보상의 마스터라는 명패가 어울리는 당당한 인사였다. 나도 저 인사법을 좀 배워볼까? 어디서 있어 보이는 척하기 좋을 거 같다.

“나는 히크 토시오르. 뒷골목을 지배하는 정보상, 케른 상연회의 수장일세.”

히크가 정식으로 인사했다. 드디어 대화의 시간이 왔다는 소리다. 나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그에게 말했다.

다만… 이번에 내가 할 말은, 전생과는 살짝 달랐다.

“제보할 게 좀 있습니다. 케른상연회와 협력을 요청하고 싶습니다.”

“자네 같은 거물 손님은 언제든 환영일세.”

히크는 짧은 인사치레와 의미심장한 웃음으로 대답했다.

* * *

“오늘 케른에 참극이 일어날 겁니다.”

컴컴한 판잣집의 안. 조수를 대동하고 자리에 앉아있는 히크와, 그 반대편에 앉은 나. 두 사람을 비추는 희끄무레한 랜턴의 빛.

상황은 전과 같았으나. 흐르는 분위기와 대화는 전생과 전혀 달랐다.

히크는 돌발적인 내 발언에 눈을 부릅떴다.

“참극이라. 어떤 참극을 말하는 겐가.”

“케른에 불사교 놈들이 침입해 있다는 건 이미 알고 계시죠?”

“… 그래. 정확히는 모르지만 대충은 알지.”

역시. 그는 불사교의 움직임에 대해 대략적으로나마 파악하고 있었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목소리를 조금 낮게 깔았다.

“그놈들이 오늘 움직입니다. 정확히는 내일 이른 새벽에요.”

나는 그 이후로도 놈들이 정확히 언제, 어떻게 이 도시를 습격하는지 자세한 사항을 말해줬다.

마치 진짜 겪어보기라도 한 양 자세한 상황 설명에 히크는 물론이고, 옆에서 듣고 있던 조수도 눈을 부릅뜨고 내 얘기를 경청했다.

“흐음… 흥미롭군.”

잠시 히크와 나 사이에 침묵이 오갔다. 그는 조수에게 흘깃 눈짓을 주더니, 이내 종이와 펜을 꺼내 무언가 끼적이기 시작했다.

전에도 저걸 했었지. 아무래도 발언한 놈이 그 유명한 엘더리치 슬레이어라 그런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적는 것일 테다.

적을 테면 적어라. 어쨌든 난 그에게 내 용건을 곧장 들이밀었다.

“제가 바라는 건 간단합니다. 같이 불사교를 막읍시다. 이대로 있으면 당신이고 나고, 이 케른의 모든 시민이 불사교 손에 죄다 죽습니다.”

스케일이 큰 얘기가 나와서 그런가. 히크는 눈을 조금 크게 떴다. 내 진위를 파악하려는 듯 가만히 내 얼굴을 뜯어본다.

곧 그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스쳤다. 내가 거짓말 하는 것으로는 안 보여서 그랬을 테다.

“정녕 진실인가. 아니면 광인의 허무맹랑한 믿음인가….”

듣자하니 나를 미친놈 취급하고 있다. 일단 어디까지 가나 지켜나 보기로 했다.

그러자 히크는 한 수 양보한다는 양,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 가능성이 아주 없는 얘기는 아닐세. 그렇다면 그런 일이 벌어질 거라는 근거는 뭔가.”

“근거는 아마 당신이 더 잘 알고 있을 텐데요.”

“말장난이나 할 거라면 이쯤에서 그만두도록 하지.”

히크는 순식간에 시선을 싸늘하게 굳히며 일축했다. 역시 정보상의 수장. 나 정도의 일반인의 화술로는 떠보는 것도 안 되는군.

나는 혀를 내두르고 결국 사실대로 이실직고했다.

“제 근거는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내가 당당하게 말하자 히크의 눈가에 황당하다는 기색이 스쳤다.

그는 끼적이던 것을 멈추고 펜 끝으로 종이 끝부분을 따각, 따각 두들기며 말했다.

“… 근거도 없이 케른상연회의 힘을 빌리길 바라는 겐가? 우리가 꽤 얕보였나보군. 설마 아까 그 살수들이 우리의 전력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러는 댁들도 아까 그게 제 전력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

사실 전력 맞다.

나는 허세충이 아니라 싸움에 임하면 무조건 필살기부터 갈기고 보거든.

그들에게 안 보여준 기술이라곤 흑익이랑 방금 얻은 직업 스킬들 정도밖에 없는데. 넷 다 애초에 공격스킬도 아니니 말 다했지.

‘하지만 고민 좀 될걸?’

왜냐하면. 이번 생에선 아직 내 정보를 너희한테 준 적이 없으니까.

너희가 알고 있는 내 이미지는 ‘엘더리치 슬레이어’지. 소환된지 고작 몇 달만에 미텔란트 북방의 가장 큰 골칫덩이였던 엘더리치를 때려잡은 요주의 인물.

그런 내가 설마, 방금 전까지 전직의 개념조차 몰랐을 거라고는 생각하기 힘들겠지. 겉보기엔 개허접 같아도 엄청난 비장의 수가 있을 거라고 지레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물론 난 있는 그대로의 개허접이 맞지만.

“흠… 거래상대로서는 최악이다만. 비밀을 중요시하는 자세는 정보상으로서 칭찬해주지.”

히크는 한참 후에야 그렇게 말문을 텄다. 그는 대충 적다 만 종이를 조수에게 건네주고는, 팔짱을 끼웠다. 그리고 내게 상체를 조금 가까이 했다.

나는 눈썹을 틀어올리며 물었다.

“그럼, 협조해주시는 겁니까?”

“누구 마음대로. 그런 소리는 일절 한 기억이 없네만.”

“…….”

나는 또 골치아프게 돌아가는 상황에 이마를 부여잡았다.

사태는 점입가경으로 흘러갔다. 히크가 손가락을 치켜들며 이런 말을 지껄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면 어떤가. 내 나름대로 가장 합당한 근거를 하나 찾아봤네.”

“뭡니까.”

“자네가 불사교의 일원인 거야. 그리고 모종의 이유로 우리를 끌어들이려 하는 게지.”

“뭐가 어쨌다고요?”

“가장 합리적이고 앞뒤가 맞는 추론일세. 그렇지 않고서야… 자네가 어떻게 그리 불사교의 계획을 속속들이 파악할 수 있겠나. 다른 조직도 아니고 불사교를 말이야.”

“…….”

그래. 생각해보면 전생에서도 나와 불사교의 관계를 물어보긴 했었지. 그 물음에 나에 대한 의심도 반 정도는 섞여 있었던 모양이다.

게다가 내가 너무 불사교의 계획을 세세하게 말해준 것이 오히려 독이 되었다. 철저하게 베일에 싸인 불사교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는 점이 의심을 부추긴 것이다.

불찰이었다.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 협상은 결렬이군요.”

“그렇게 되겠군.”

히크는 쌈박하게 긍정했다. 나는 아니꼽게 그것을 지켜보다가, 이내 툭 물었다.

“다음에 혹시 또 만날 수도 있으니, 히크씨한테 접촉할 때 필요한 암호나 알려주시죠.”

“문어(問語)는 ‘순백의 마왕’. 답어는 긍정일 경우 ‘용사의 전추’. 그리고 부정일 경우는 ‘아신의 몰락’일세.”

“워우. 거 멋지기도 하지.”

나는 쓰린 속을 달래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고 그 순간. 키이잉, 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내 목으로 칼이 들어왔다.

지금껏 침묵을 지키고 있던 히크의 조수였다.

“누가 그냥 보내준다고 하던가. 불사교 관계자.”

… 아.

안 그래도 내 맘대로 되는 게 없어서 짜증나 죽겠는데.

사람 속을 이리 긁어 버리네. 노망난 영감탱이가.

“막을 수 있으면.”

내가 중얼거리는 것과 동시에 파파팍! 망토가 여러 가닥으로 갈라지며 순식간에 조수에게 날아갔다.

푸부북! 섬짓한 파육음과 함께 가시가 조수의 몸에 사정없이 꽂혔다. 가시는 조수의 사지를 꿰뚫은 채 판잣집 벽까지 날아갔고. 그대로 조수를 벽에 진열해 버렸다.

부지불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1초 정도가 소요됐을까.

“어디 X발 막아보던가. 어떻게 되나.”

나는 조수와 히크에게 한 번씩 시선을 맞췄다. 히크는 불에 덴 듯 움찔거리며 시선을 피했다.

스르륵. 가시가 조수에게서 떨어져 나와, 다시 망토로 집결되었다.

조수는 몸을 움찔거리며 서둘러 상처를 지혈하기 시작했고. 나는 혀를 차며 판잣집 문을 거칠게 열고 나왔다.

“욕봤수다. 급소는 피했으니 알아서 치료하든지.”

“자, 잠깐! 아직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네!”

“나는 할 얘기 더 없습니다.”

씨근거리며 나오려던 나는 문득, 결국 아쉬운 건 나라는 불변의 사실을 떠올렸다.

그래서 문을 닫기 직전. 결국 한숨과 함께 덧붙였다.

“… 내가 정 의심된다면 미행을 붙여놓으세요. 그리고… 지금 당장 총력을 다해 군대를 모으십쇼. 잊지 마세요. 약속의 평원에 폭발이 일어나면… 그 때부터 참극의 시작입니다.”

이렇게 해 놓으면 나를 의심하든 신뢰하든, 내 말의 진위여부를 판단하기 위해서라도 미행을 붙이겠지.

그리고 의식이 시작되고 난 뒤엔… 믿고 싶지 않아도 눈앞의 현실을 믿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때 가서 ‘그 놈이 옳았구나!’ 해봐야 이미 늦었겠지만.

‘그 때까지만 버티면 돼. 그 때까지만….’

나 혼자서 최소 300이나 되는 불사교도를 모조리 막는 건 불가능하다. 자고로 다구리에는 장사가 없는 법이니까.

좋지 않군. 같이 기습을 대비해도 모자랄 판에 같은 적을 두고도 서로 못 믿고 있으니. 승기가 희박해지는 것 같아 내심 착잡하다.

‘… 일단은 최선을 다한다. 그뿐이다.’

다음 생에는 히크를 설득시킬 적당한 구색이나 좀 생각해놔야겠다… 싶은 생각이나 하던 찰나.

패배를 이미 상정한 채 생각하고 있던 자신을 깨닫고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왜 이러냐 박정용….’

가슴 속에 불쾌감이 스멀스멀 기어오른다.

그러고 보면.

나는 이번 생에서 조수에게 가시를 쏘고, 살수들을 상처 입히는데….

너무 거부감이 없지 않았나?

그런 뒤늦은 자각을 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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