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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417413번째 소울라이크 용사-89화 (65/280)

89화 오래된 약속

“10분 끝! 자, 여기까지.”

“와아. 버텨냈구나 계약자. 역시 대단해.”

“조마조마 했는데 다행이네. 축하해.”

욱신거리는 머릿속으로 그런 목소리가 쑤셔박혔다.

퉁퉁 부어 제대로 떠지지 않는 눈을 들어 위를 쳐다봤다. 사신 세 자매가 내 위에서 방글방글 웃으며 얼쩡거리고 있다.

직후 팡파레와 함께 알림창이 나타나 내 시야를 가렸다.

[전직 성공: 정식용사 → 나이트스토커]

[사신의 시련(난이도 상)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전직 보너스 스탯: 힘 +10, 민첩+30, 지능+15]

[시련 난이도에 따른 추가 능력치 획득.]

[스탯: 힘+30, 민첩+50, 지능+20]

[체력과 마력이 각 300 포인트 상승했다.]

[직업 스킬 ‘눈보다 빠른 손’ 사용법을 알게 되었다.]

[직업 스킬 ‘사냥 표식’ 사용법을 알게 되었다.]

[직업 스킬 ‘그림자 사슬’ 사용법을 알게 되었다.]

“… 허. 허허.”

나 아직 살아있구나. 그 알림창을 보고 나서야 겨우 실감했다.

‘정말… 10년 같은 10분이었다.’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었다. 학창 시절, 일진 무리의 롱패딩에 실수로 칼자국 냈을 때 이후로 이렇게 얻어터진 건 오래만이다.

[체력이 모두 회복되었다.]

[마력이 모두 회복되었다.]

해냈다는 안도감과 뼛속까지 사무치는 피로감에 나는 움직이지 못했다. 알림창 말대로 분명 활력은 돌아온 게 느껴지지만. 지금은 일어설 기분이 도저히 안 났다.

나는 그렇게 한동안, 재배맨에게 자폭당한 야무치처럼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 으으.”

내가 간신히 몸을 일으킨 것은 그 뒤로 10분 가량이 지나서였다. 마음 같아선 좀 더 쉬고 싶었다만. 지금 내 팔자가 느긋하게 쉬고 있을 팔자는 아니라서 말이다.

비척비척 일어나 사신들에게 다가갔다. 손장난을 치던 그녀들은 내가 다가오니 퍼뜩 내쪽으로 시선을 박았다.

“아. 일어났네.”

“잠꾸러기.”

“잘 잤어?”

상큼한 인사를 박는 세 친구. 순간 때려주고 싶다는 마음이 울컥 솟았지만. 추하니까 관두기로 했다.

아무 일 없었다는 양 방글거리는 그녀들을 보며, 나는 일단 고개부터 숙였다.

감사의 인사였다.

“뭐… 일단 지금까지 고마웠다. 덕분에 많이 강해졌어.”

“에이. 뭘.”

“쑥스럽게.”

“당연히 해야 하는 건데.”

그래. 알긴 아는구나. 당연히 해야 하는 건데 좀 늦은 감은 있지.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녀들 덕분에 내가 강해진 것은 사실이다. 애초에 진화의 흑익은 순수한 그녀들의 호의의 산물이고, 그 성능이 어마어마하다. 이런 물건을 만드는 게 분명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장 조금의 전력이라도 더 필요한 내 입장에서는… 그랜절을 박아도 모자랄 엄청난 조력이다.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사신들이 쑥스러워하는 걸 가만히 지켜봤다.

“그럼 이제 좀 나가고 싶은데. 해야할 일이 좀 있어서 말이야.”

“으응? 벌써?”

“좀만 더 있자.”

“우리랑 있기 싫어?”

사신 세 자매가 토끼눈을 뜨며 놀라더니. 시무룩하게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녀들이 지척까지 불쑥 다가와 소매를 붙잡고 꾹꾹 늘어졌다.

잠깐만. 낫. 낫이 가깝다! 저거 어떻게 조절 좀 해봐! 내 뚝배기 깨뜨릴 기세잖아!

내 머리 위에서 흔들거리는 거대한 낫 때문에 식겁한 나머지 몸을 물렸다. 그리고 헛기침과 함께 황급히 말했다.

“다, 당장은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안 돼. 그 일이 끝나면… 조만간 다시 한 번 들를게.”

“으음. 정말이야?”

“진짜지?”

“꼭이야?”

무슨 산타할아버지와 헤어지는 어린애들 마냥 아쉬워한다. 나를 쳐다보는 초롱초롱한 벽색 눈동자들이 심히 부담스럽다.

나는 재차 힘있게 고개를 끄덕이는 한 편. 의아한 나머지 물었다.

“근데… 너희는 대체 왜 이렇게 나한테 잘 해주냐. 나를 언제 봤다고.”

그 물음에 세 사신도 순간 흠칫거렸다.

똑같은 자세로 곰곰이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똑같은 표정으로 똑같은 타이밍에 입을 열었다.

“으음. 그냥?”

“그 사람이랑 비슷해서?”

“그 사람처럼 불쌍하고 귀여워서?”

… 그 사람이라면, 마녀의 기사 한을 말하는 거겠지. 내가 그렇게 그 사람이랑 닮았나?

아니. 애초에 마녀의 기사도 원래 용사였다면 이계인일 거고… 외모가 아니라 분위기가 닮았다는 걸 수도 있겠다. 이곳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코쟁이들이라 동양인을 닮았을 확률은 적으니까.

‘하지만 이 반응은… 좀 이상하지 않아?’

미네르바… 똥털은 분명히 마녀 디아나는 물론이고. 마녀의 기사도 엄청 싫어했다.

이건 확실하다. 그녀에게 처음 루시의 감시 임무를 받을 때. 그 혐오 어린 표정은 절대 연기로 나올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사신들의 태도를 보면….’

사신 세 자매는 마녀의 기사를 싫어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싫어하기는커녕… 오히려 호감이 있어 보인다. 그것도 상당한 호감이다.

사신들이 내게 잘해주는 이유부터가 ‘마녀의 기사와 닮았으니까’라는데, 이미 말 다했지.

“그럼 너희들은… 왜 마녀의 기사를 좋아하는 건데.”

나는 그 질문을 하고 곧장 후회했다.

분위기가 바뀌었다. 사신들이 질문을 듣자마자 피식, 웃더니. 이내 게슴츠레한 눈을 뜨고 내쪽을 쳐다보는 것이다.

스르릉. 그녀들의 위에 떠 있던 낫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온다 싶더니. 세 사신이 동시에 그것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니, 낫은 갑자기 왜. 그거로 뭐 하려고?

“왜냐하면 말이야.”

“그 사람은 우리의 유일한 친구고.”

“우리는 그 사람을 믿어주기로 약속했으니까.”

그 말의 의미를 생각해볼 시간도 없었다.

쩌저적! 사신 자매가 붙잡은 낫이 곧장 내 몸을 반으로 갈랐기 때문이다.

어, 어어. 나는 사선으로 반토막난 내 몸을 가만히 쳐다보며 얼빠진 탄성을 흘렸고. 시선이 사신들에게 닿았을 때, 그녀들은 어딘가 쓸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궁금하면 계속 죽어보면 돼.”

“계약자는… 결국 그 사람이랑 만나게 될 거니까.”

“망가지지 말고 오래 살아줘. 계약자.”

그녀들이 내뱉는 작별의 인사에서 나는 강렬한 기시감을 받았다.

순간 눈을 부릅떴다.

―제발… 망가지지 말고 오래 살아요. 꿈자리 사납기 싫으니까.

어두운 금발의 미인 하나가 캄캄해지는 눈앞으로 스쳐지나갔다.

그녀도 저런 슬픈 표정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제야 난 그걸 깨달았다.

* * *

“커헋켁!”

나는 돼지 땅콩 떼는 소리와 함께 정신을 차렸다. 퍼뜩 양손으로 몸을 훑었지만, 몸이 토막났던 흔적 같은 건 다행히 없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사방을 훑었다. 시커먼 건물의 안이다. 눈앞으로 거대한 거울이 늘어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걸 한참 본 다음에야, 이곳이 케른의 신전 내부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오오. 도, 돌아오셨군요.”

그러자니 이번에도 불쑥, 시야맡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비쩍 마른 외관에 말을 더듬는 하얀 머리 사제. 플릭이었다.

“꽤, 꽤 긴 시간이 지나셔서 무, 무슨 사단이 난 건 아닌가 걱정했습니다. 요, 용사님.”

그 얼굴을 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마지막에 내 몸을 둘로 가른 그 낫. 그게 허상세계의 탈출구였나 보군. 그러면 그렇다고 말을 해줄 것이지, 뭔 일언반구도 없이 사람을 토막내냐.

사신 세 자매의 싱글거리는 얼굴을 한 번 상기시킨 나는, 곧장 플릭에게 물었다.

“… 제가 들어간지 얼마나 지났죠?”

“에… 두, 두 시간 정도 지난 것 같습니다.”

“생각보다 많이 지체됐네….”

나는 플릭에게서 시선을 떼고 다시 주위를 살폈다. 내 1+1상품이 안 보였기 때문이다.

루시를 찾아내는 건 쉬웠다. 그녀는 제단 앞에 멀뚱히 서서 그 제단을 흥미만만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으니까.

“흐음… 마녀와 최초의 용사의 전투. 성녀의 죽음… 그리고 배신이라. 재미있는지고.”

혼자 뭐라고 중얼거리며 제단을 읽고 있다.

내가 흘깃 제단을 쳐다봤지만. 거기 있는 꼬부랑글씨까진 알아보지 못했다. 용사 시스템의 번역 기능이 지원하지 않는 문자인 듯하다.

“야. 루시.”

“호오… 흐음….”

내가 불렀지만, 루시는 제단에 신경이 집중되어 듣지 못했다.

나는 그녀에게 성큼 다가가며 계속 말을 걸었다.

“야 루시.”

“오호. 과연. 이렇게 된 것인가.”

“뭘 보고 있는 거야.”

“흐음… 그 다음은….”

“… 소난다.”

“오오. 여기서 이런 전개가…!”

“꼬집을게.”

“아가가가각!”

나는 통보와 함께 사정없이 루시의 양 볼을 잡아 늘렸다.

갑작스런 고통에 어찌할 바를 모르며 몸을 바동거리는 루시. 나는 뺨을 붙잡은 채 그녀의 얼굴을 내쪽으로 돌렸다.

눈물이 찔끔 어린 붉은 눈동자가 나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으헥? 어, 언제 나왔느냐? 나왔으면 말을 하지 왜 볼부터 꼬집고 지랄이냐 이놈아!”

“…….”

말했다. 하지만 네가 못 들은 거다. 그렇게 말하려다 관뒀다.

루시와의 소모적인 말싸움은 입과 귀만 아프다. 그리고 결국 내가 볼을 꼬집는 것으로 끝난다.

그러니 중간과정 생략하고 계속 볼이나 꼬집기로 했다.

“아야야야! 미, 미안! 그만하거라! 아파! 아파아! 제, 제성함미다아아!”

그리고 결국 언제나 그랬듯이, 루시의 입에서 존대말로 사죄가 나온 순간 나는 볼을 놔줬다.

“씨이… 흐욱… 보, 볼이 뜨거워어….”

참고로 그녀에게서 존대말이 튀어나오는 주기는 점점 짧아지고 있었다.

능지가 상승하는 건지, 자존심이 점점 얄팍해지는 건지. 어쨌든 내 입장에선 좋은 발전이다.

나는 루시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어주고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신전 용건 끝났다. 빨리 다음 작전으로 이행하자고.”

“으… 아, 알았다.”

나는 신전의 입구를 향해 성큼성큼 발을 놀렸고. 나가기 직전, 플릭을 향해 고개를 슬쩍 숙였다. 플릭은 얼떨떨하게 인사를 받아줬다.

“… 기이한 조합에 기이한 사건까지… 대체 저분은….”

아리송한 플릭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온다.

혼잣말 하려한 것 같은데, 다 들립니다 아저씨. 나는 피식 웃어주고는 신전을 나왔다.

오랫동안 어두운 곳에 있어서 그런가. 바깥의 밝은 햇살을 보니 나도 모르게 인상이 찌푸려졌다.

나는 거침없이 케른의 가도를 전진했고. 문득 따라붙던 루시를 향해 물었다.

“근데 루시.”

“음? 뭐냐.”

“아까 제단에서 뭘 그렇게 열심히 본 거냐.”

“아. 그거….”

루시는 기본적으로 만사에 관심이 없다.

불사신이라 그런 건지는 몰라도. 힘과 마력이 죄다 사라진 지금조차 감정기복이 적고. 뭔가에 큰 흥미를 가지는 경우도 적다. 나랑 쌈박질할 때만 제외하고.

그러던 그녀가 내 부름조차 못 들을 정도로 뭔가에 집중해 있었다. 이것자체가 나의 흥미를 끌기 충분했다.

“… 뭐, 그냥.”

“그냥?”

“옛날 얘기가 좀 적혀 있었다. 내 어미… 네크로맨서 디아나 에스파다에 관한.”

“…….”

“인간놈들의 역사를 각인해 놓은 것 같던데. 나라도 그 시절에 살아있진 않았으니, 꽤 흥미로웠다.”

“그러냐.”

“특히 마녀의 기사. 그놈은 어디로 튈지 몰라서 더 재미있더구나.”

또다. 또 그 이름이 나왔다.

그놈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뜻모를 불안감이 차오르는 건… 그냥 내 신경이 과민한 걸까?

그래. 그럴 거다. 이 세계 역사의 절대악 중 한 명이잖아? 생각해보면, 이름을 많이 듣는 게 당연한 놈이기도 하다.

‘당장 할 일에나 집중하자.’

나는 고개를 흔들고 잡념을 물렸다. 살아남는 것에 집중하기 위해서였다.

이제부터 할 일은… 지금까지처럼 잘 풀리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으니까.

‘케른 상연회… 이번엔 좀 원만하게 접촉했으면 좋겠네.’

나는 늙은 너구리의 얼굴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머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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