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좌절감이 사나이를 키운다
“아하하.”
“힘내, 계약자.”
“끝나면 상도 줄게.”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시커먼 공간. 시험의 장막을 떠올리게 하는 그런 어둠 속에서.
내 앞에 둥둥 떠있는 사신 세 자매는 그런 말을 했다.
나를 놀리고 있다. 대들고 싶었다. 하지만 대들어줄 여유가 없었다.
지금도 내 몸을 미친 듯이 두들기고 있는 시커먼 구체들 때문이었다.
“아아악! 크헉! 잠깐만! 잠깐 타임! 뼈맞았어! 이, 이건 뼛속까지 아프다!”
퍼버벅, 퍼벅, 퍼퍼퍽!
몸 여기저기서 타격음이 시원하게 울린다. 그럴 때마다 내 몸은 종잇장처럼 사방팔방 날아다녔다.
전신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었고.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것 같다.
헛구역질이 연신 나왔다. 게워낼 건 아까 다 게워내서, 더 토해낼 게 없기 때문이다.
“계약자. 많이 아파?”
“하지만 강해져야 하는걸. 피할 수 없으면 즐기자 계약자.”
“즐겁지, 계약자?”
즐겁긴 개뿔이 X발!
나는 눈을 부릅뜨고 사신 세 자매를 노려봤다.
세 얼굴과 그것을 감싼 로브가 허공에서 천천히 제자리 회전한다. 세 얼굴은 누구 하나 빠질 것 없이 내 꼬라지를 보며 방글방글 웃고 있다.
“아하하하.”
“즐거워져라.”
“얍얍얍.”
때려주고 싶다. 저 태평하게 빙글빙글 도는 웃는 얼굴들을 흠씬 두들겨 패주고 싶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지금 이 고통도 전부 내가 바래서 시작한 거고. 그녀들은 내 요구에 따른 죄밖에 없는 것을.
퍼퍼퍽. 퍼버벅!
한탄에 빠져 있을 틈도 없이 시커먼 구체 수십 개가 동시에 날아와, 다시금 나를 두들겨패기 시작했다. 머릿속 잡념이 깔끔히 사라졌다.
대신 들어차는 생각은 단 하나뿐이다.
‘아프다. 너무 아프다…! 이렇게 아플 줄은 몰랐지!!’
엄청난 후회가 물밀 듯이 몰려온다.
나는 1시간 전의 객기 충만한 나에게 쌍욕을 날리며 속으로 오열했다.
“강해진다, 강해진다. 더 강해지자!”
“강해지면 더 못 보니까 아쉽지만….”
“그래도 소중한 계약자가 망가지면 안 되니까.”
여전히 멀찍이서 박수를 쳐가며 빙글빙글 돌고 있는 사신 세 자매를 보며. 내 의식은 어리석었던 1시간 전의 그 순간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 빌어먹을 상황을 만들어낸 내 뼈아픈 결정의 순간으로.
* * *
“좋아 좋아. 나이트스토커로 전직시켜줄게.”
“난이도는 어떻게 할래?”
“최하, 하, 중, 상, 최상 중에 골라.”
난이도? 갑자기 웬 난이도.
의문에 고개를 치켜들었다가, 곧 전직을 위해선 ‘시련’을 넘어야 한다던 제논의 말이 떠올랐다.
아마 그 전직 시련의 난이도를 말하는 거겠지. 나는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난이도가 차이에 따라 달라지는 게 있나?”
사신들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있어. 전직 보상.”
“난이도가 낮으면 쉬운 대신 보너스 스탯이나 스킬이 적어.”
“난이도가 높으면 당연히 그 반대야.”
그렇다는군.
그렇다면 망설일 건 없다. 전력은 당연히 조금이라도 높을수록 생존율이 증가하니까.
못 먹어도 고다. 노 빠꾸, 예스 상남자. 보너스 스탯과 스킬을 위하여!
“남자면 무조건 최상이지. 최고 난이도로 도전한다.”
내 자신만만한 발언에 사신들의 얼굴이 활짝 폈다가. 이내 조금 걱정스럽다는 듯이 찌그러졌다.
“하지만… 계약자. 잘못하면 오늘 안에 안 끝나.”
“최상 난이도는 정말 어려워. 우리도 추천 안해.”
“계약자. 죽을 수도 있어. 다른 사람들처럼 그냥 최하 난이도로 받아.”
혹시 사신한테 목숨 걱정 받아봤는가? 정말 무섭다.
나는 빛살같이 꼬리를 내렸다.
“…… 그, 그럼 한 단계 낮춰서 그냥 상 난이도로.”
인정한다. 솔직히 개추했다.
하지만 저 방글방글 해바라기 같던 사신 자매들이 우중충한 표정으로 입 모아서 저렇게 만류하는데. 안 쪼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니냐.
운터드레드 말대로 시험이 길어져서 오늘 안에 안 끝나기라도 하면 그것도 큰일이다.
… 그, 그래. 실리를 추구한 거다. 그런 걸로 하자.
“상 난이도도 어려운데… 걱정돼.”
“으음. 우리 계약자라면 할 수 있지 않을까? 죽음도 50번 넘게 견뎠는걸?”
“그, 그렇겠지? 버틸 수 있겠지?”
어딘가 불안한 얼굴로 쑥덕대는 사신 소녀들.
그냥 얌전히 추천대로 최하 난이도로 할까 울컥 충동이 들었지만. 거기까지 가면 올해 추함도르는 따놓은 당상이므로 그러진 않았다.
대신 긴장을 한껏 머금으며 허세만만하게 목청을 높였다.
“됐으니까 빨리 시험이나 줘! 남자가 한 입으로 두 말은 안 하지!”
“이미 두말 하지 않았어?”
“쉿.”
“그런 걸로 해주자.”
사신들은 내 허풍에 키득거리며 손을 하늘 위로 뻗었다.
우우웅. 그녀들의 위에 떠있던 거대 낫이 공명하는가 싶더니 허공을 천천히 갈랐다. 칠흑의 공간은 하릴없이 갈라지며 바직, 빠직하는 스파크를 뿜었다.
그리고 갈라진 틈새에서 우수수 쏟아져 나오는 건… 내 머리통만한 시커먼 구체들였다.
“지금부터 시험을 시작할게.”
“나이트스토커는 민첩성이 생명이야.”
“그러니까 지금부터 계약자의 민첩성을 테스트할 거야.”
그녀들이 말하는 것과 동시에 피피피핑! 검은 구체들이 전방위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한참을 종횡무진하던 그것들이 이내 내 주변에서 빙글빙글 돌며 선회하기 시작한다. 숫자가 좀 많다. 20… 아니, 30개는 넘어 보인다.
… 이런 망할. 벌써 시험의 내용이 대충 예상된다. 나는 마른 침을 삼켰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이 공들을 피해서.”
“제한시간 10분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아주면 돼.”
“간단하지?”
잠깐만. 시험의 합격 조건이 ‘살아남기’라고?
설마 ‘당신은 죽을 수도 있습니다’ 뭐 그런 뜻인가?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주변에서 회전하는 구체들을 쳐다봤다. 식은땀 한 줄기가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럼.”
“전직의 시련.”
“시작.”
그녀들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퍼어억! 둔탁한 타격음이 들렸다.
어디서 들린 건가 가만히 살펴보니. 내 배에서 나는 소리였다.
“어… 커, 억….”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고개를 떨궈 내 배를 쳐다봤다. 어느새 날아온 구체 하나가 내 배를 파고들어 하얀 김을 뿜어내고 있었다.
‘대, 대체 어드 틈에…!’
이거 가죽갑옷만 입었으면 분명 한 방에 주님 곁으로 갔다. 그런 확신이 드는 섬짓함이 몰려왔다.
그리고 그 순간. 쇄애액, 하는 공기의 비명이 내 귓가를 자극했다.
“이, 이런 썅!”
나는 생각할 틈도 없이 곧장 몸을 날렸다.
투두두두! 직후 내가 있던 자리로 무수한 공이 쏟아진다. 도저히 눈으로 쫓지도 못할 스피드로 날아간 공이 시커먼 바닥을 두들긴다.
지축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요란하게 요동쳤다.
“…….”
상상 이상이다.
대체 뭐야 이 미친 스피드는. 이걸 피하라고? 변경백에 버금가도록 빨리 움직이는 저걸? 수십 개나 되는 저걸?
그런 잡생각에 발이 묶인 그 짧은 순간. 피피피핑! 땅에 박혔던 그것들이 일제히 다시 하늘로 쏘아지나 싶더니. 그대로 선회하여 사방팔방에서 나를 향해 쏟아졌다.
“으악!”
왼쪽, 오른쪽, 고개를 숙이고, 땅을 구른다.
정신을 추스를 새도 없이 뒤에서 날아온 공에 등을 얻어맞았다. 퍼어억, 하고 육중한 충격과 함께 내 몸은 총알처럼 앞으로 튕겨나갔다.
“흐, 흑익!!”
이건 이미 생존의 문제다. 뭐라도 써서 살아남아야 한다.
나는 방금 얻었던 스킬을 곧장 활용했다. 아무렴 뚜벅충 보다는 하늘을 나는 게 피하기가 쉽겠지!
푸화악! 등 뒤로 펄럭이던 망토가 두 갈래로 찢어지더니, 까마귀의 그것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날개로 화했다.
흩날리는 깃털들의 여운에 젖을 새도 없이, 허공에 치솟은 나를 따라 구체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이런 망할! 왼쪽으로…!’
하지만 한 가지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날개라는 게 사람한테 기본적으로 달려 있는 기관도 아니고. 애초에 하늘을 처음 날아보는데,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게 가능할 리가 없지.
“아니 야 잠깐! 어디 가냐!!”
투학! 왼쪽으로 살짝만 움직이려던 내 생각과 달리 신형이 대포알처럼 쏘아져 나갔다. 속도를 내가 감당하지 못한 나머지, 찢어진 종이비행기마냥 떼떼굴 굴렀다.
간신히 속도 제어에 성공해 활강을 시작했을 땐, 이미 눈앞까지 구체들이 다가온 상태였다.
‘안 돼!’
필사적으로 몸을 틀어 피해냈지만. 모든 공들을 피할 수는 없었다.
퍼퍼퍽! 둔중한 충격이 온몸을 두들겼다.
“크헉!”
구체 몇 개가 몸을 스쳤다. 스친 것만으로도 정신이 아찔해진다.
방어도가 있는 상태에서 맞으면 이런 느낌이군. 아직까진 통증이 둔한 것을 보니 방어도가 남은 모양인데. 이 기세면 아마 조만간 전부 삭감될 것이다.
‘일단 내려가자!’
나는 좀처럼 제어하기 힘든 날개를 어거지로 퍼덕거려 급격히 하강했다. 바닥에 착지하는 즉시 다시금 꿀렁, 망토가 요동쳤다.
“페이탈 쏜즈!”
뿌드드득! 망토가 이리저리 뭉치고 흩어지길 반복하더니, 이내 흐느적거리는 열 가닥의 가시촉수로 변화했다. 모서리는 물론이고 촉수의 옆 부분이 굉장히 날카로워서, 사실상 촉수라기보다는 연검(軟劍) 같았다.
‘반격이다!!’
나는 시시각각 가까워져 오는 구체의 폭격에 대고 열 개의 촉수를 모두 때려박았다. 다행히 촉수의 조작은 세븐 소드 피어스와 매커니즘이 비슷해서, 적응이 어렵지 않았다.
쇄애액! 내 의지를 읽은 촉수가 일제히 구체를 향해 쏟아졌다. 나는 기대를 담아 그것을 지켜봤고. 이내 촉수와 구체가 격돌했다.
파사사삭!
그리고 구체의 기세 앞에 종잇장처럼 찢어지는 촉수를 보며 경악했다.
“이런 미친! 끄떡도 안 하네!!”
쇄애액! 나는 간신히 고개를 숙여 머리에 구체가 직격하는 걸 면했다. 그나마 촉수 덕분에 속도가 줄어서 반사신경으로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직이다!’
이렇게 포기할 순 없지. 나는 베스타크와 에스파다를 뽑아들고 마력을 주입했다.
파지지직! 스파크가 터진다. 새파란 기운을 날름거리는 마력검과 시커먼 구체가 마구 뒤섞여 허공을 수놓기 시작했다.
‘세븐 소드 피어스!’
피피피핑! 사출된 새파란 마력검들이 구체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흑색 구체는 사실상 목적지가 무조건 나였기에, 이동 경로가 무척 단순하다. 마력검을 구체에 하나씩 때려 박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다.
키잉, 키킹!
하지만 마력검 역시 그런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허공에서 으스러질뿐. 구체의 전진을 막지는 못했다.
페이탈 쏜즈와 비슷한 느낌이다. 마치 공격을 견딘다기 보다는… 공격 자체가 흡수되는 느낌이다.
“소용없어 계약자. 이 시련에서 공격은 반칙이거든.”
“그 구체는 모든 공격을 무효화할 거야.”
“시련 도중엔 에테르도 소용없으니 참고해 계약자.”
일찍도 알려준다 빌어먹을!
팝콘 뜯을 기세로 강 건너 불구경하는 사신 자매들에게 원망의 시선을 쏘아보내준 뒤. 씨근거리며 다시금 그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콰과과광!
그러자 주변을 배회하던 구체는 어김없이 내가 있던 자리로 유성처럼 때려박혔다.
충격파로 심장일 울릴 정도의 엄청난 속도가 새삼 실감된다.
“으… 으아! 제길… 제기라아알!”
그 뒤로는 실로 지리멸렬했다.
나는 미친 듯이 땅을 구르고 온몸을 비틀며 최선을 다해 발악했다.
“크허억! 이, 이건 뼛속까지 아프다!”
본능에 몸을 맡겨 가까스로 피해나갔지만. 무너지는 건 한 순간이었다.
갈수록 피하지 못하는 구체가 많아지고. 점점 급소에 맞는 구체들이 많아진다 싶던 어느 순간.
퍼억! 어깨에 살짝 공 하나가 스쳤다.
“끄아아악!”
나는 비명을 터뜨렸다. 동시에 깨달았다.
통증이 눈에 띄게 선명하다. 드디어 방어도가 바닥난 것이다.
도저히 참기 힘든 고통에 방어 태세가 무너졌으며, 순간 중심을 잃었다.
아. 끝났다. 속으로 체념했다.
퍼버버버벅!
엄청난 타격음과 함께 오장육부가 마구 뒤틀린다. 공이 사방팔방에서 내 몸을 마구 두들겼다. 골통이 윙윙 울리며 시야가 아득해졌다.
나는 그 자리에 엎어져 몸을 최대한 말았다. 그런 내 위로 공들이 사정없이 내리꽂혔다.
“아아악! 자, 잠깐! 잠깐 타임! 뼈, 뼈맞았어! 형님! 누님! 살려줘! 잠깐마아안!”
나는 온몸을 바둥거리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고.
“당신의 전직시험.”
“학창시절 담당일진으로.”
“대체되었다.”
사신 자매들이 흥미진진한 얼굴로 그런 나를 내려다 보며, 빙글빙글 허공을 유영했다.
나는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질러대며 구체에 얻어맞길 계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