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사신의 선물
“여기는….”
거울에 손을 대자마자 아득한 추락감이 느껴졌고. 그것이 끝난 뒤 눈을 뜨자, 나는 칠흑처럼 어두운 공간 한 가운데 서있었다.
‘루시는… 같이 오진 못했나 보군.’
나는 주위를 살피다 루시가 없는 것을 눈치챘다. 입맛을 다신 나는 주변을 좀 더 자세히 살폈다. 사방팔방, 위아래까지 순수한 어둠이다. 시작과 끝조자 가늠되지 않는 공간.
시험의 장막도 딱 이런 삭막한 느낌이었는데. 이쪽 세계 아신들은 죄다 ‘심플 이즈 베스트’가 인테리어 모토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와아아.”
“계약자다 계약자.”
“드디어 만나러 와줬어.”
그런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온다. 나는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그리고 순간 할 말을 잊은 나머지 입을 콱 다물어 버렸다.
‘… 뭐냐 저건. 요괴?’
괴상한 생물이 하늘에 떠 있었다.
로브를 입은 에메랄드빛 머리칼의 소녀였다. 문제는 하나의 로브 밖으로 튀어나온 머리가 세 개라는 점이다.
똑같은 얼굴에 개성을 주고 싶었던 건지, 한명은 짐승의 아래턱뼈를 마스크처럼 쓰고 있었고. 한명은 잘린 머리뼈로 코 윗부분을 가리고 있었고. 한명은 왼쪽 얼굴을 가리고 있다.
그리고 낫.
엄청나게 거대한… 전장이 5미터는 족히 넘을 법한 거대한 수확용 낫이, 그런 소녀들 위로 유유히 유영하고 있다.
‘아니… 그냥 셋이서 로브 하나를 같이 뒤집어쓴 건가?’
트윈헤드 오우거는 내가 들어봤어도 트리플헤드 미소녀(?)라니. 아무리 내가 요즘 정서함양이 막장이라지만, 그런 현실은 아직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문제의 트리플헤드 미소녀가 내게 불쑥 세 얼굴을 들이밀었다.
“안녕 안녕.”
“있잖아 계약자.”
“우리 누군지 알아?”
로브가 펄럭이며 소녀의 세 얼굴이 허공을 빙글빙글 돌았다. 나와 마주치는 얼굴마다 한 마디씩 내뱉는다. 한 사람의 말을 세 개로 끊어놓은 느낌이었다.
방금 그 말하는 방식 덕분에 ‘세 명이 한 로브’설보다 ‘트리플헤드 미소녀’설이 더 설득력을 얻었다.
‘미… 미미르의 눈.’
물론 저런 진기한 생물을 보고 가만히 있을 내가 아니다. 당장 정체를 스캔해봤다.
두둥, 평소보다 조금 무거운 효과음이 들리며 패널이 등장했다.
[명칭: 운터드레드]
[별칭: 사신. 시간의 신(과거). 사신 세 자매 중 장녀]
[오류 - 규격 외 존재. 능력치 측정 불가.]
[명칭: 타나트닉스]
[별칭: 사신. 시간의 신(현재). 사신 세 자매 중 차녀]
[오류 - 규격 외 존재. 능력치 측정 불가.]
[명칭: 케이어시스]
[별칭: 사신. 시간의 신(미래). 사신 세 자매 중 막내]
[오류 - 규격 외 존재. 능력치 측정 불가.]
… 상태창은 또 세 개로 분할돼서 나오는군. 지금까지 학계 정설이었던 ‘트리플헤드 미소녀’ 설이 급격히 폐기 위기를 맞았다.
로브 안의 상태가 심각하게 궁금해지는 한 편. 나는 또 다른 사실에 숨을 삼켰다.
‘규격 외 존재…!’
상태창의 오류를 보고 나서야 그들의 정체를 깨달았다.
사신. 그녀들이 바로 나를 이곳으로 부른 존재이자, 플릭을 그렇게 떨게 만든 아신이였다.
… 내가 알고 있는 사신의 이미지랑은 좀 많이 다른 것 같긴 하다만.
“나는 운터드레드.”
“나는 타나트닉스.”
“나는 케이어시스.”
세 아신이 번갈아가며 자기소개를 했다.
턱뼈 마스크가 운터드레드. 눈가리개가 타나트닉스. 그리고 왼쪽 얼굴 가린 게 케이어시스라고 한다.
세 사신은 내가 정말 반가운 기색이었다. 반짝이는 여섯 개의 눈이 내 얼굴에서 떨어질 생각을 안 하는게 그 증거다.
그 과도한 관심에 좀 식겁하는 한 편. 시간이 없다 보니, 나는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뭐, 일단 반갑다. 내가 오늘 찾아온 이유는 다른 게 아니고….”
하지만 거기까지. 내게 주어진 말할 기회가 끝났다.
사신 세 자매가 빙글빙글 돌며 쉴 새 없이 떠들어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와아. 계약자한테서 좋은 냄새나.”
“죽음의 냄새가 엄청 짙어졌네.”
“하긴. 벌써 50번도 넘게 죽었지?”
“그런데도 아직 정신을 유지하고 있네.”
“대단하다. 역시 계약자야.”
“멋져. 인간인데 죽음을 견디다니. 굉장해.”
“저기 계약자. 내가 준 물건 어때? 좋았어?”
“내가 준 게 최고였지?”
“아니야. 내가 준 게 제일 유용했지? 그렇지?”
끊임없이 이어지는 눈빛과 질문세례. 무수한 악수의 요청이 쏟아졌다.
웬만한 아이돌 뺨을 후려갈기는 엄청난 인기. 나는 순식간에 졸도할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부담스럽게 들이미는 머리 세 개를 밀어내며 나는 외쳤다.
“아니 친구들아 잠깐! 하나씩! 하나씩 좀 말해봐! 대답해줄 테니까!”
그렇게 나는 내 용건을 이루는 대신, 난데없이 사신 소녀들의 잡담에 어울리는 신세가 되었다.
그녀들이 눈을 반짝이며 가장 궁금해 하는 건, 다름 아닌 이것이었다.
“내가 제일 좋았지?”
“내게 제일 명기였지??”
“내 거! 내 게 제일 좋았지???”
…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발언들이다만. 오해는 하지 말길 바란다.
그녀들이 내게 말한 ‘물건’들이란… 다름 아닌 처음에 미네르바에게 받았던 고유 특전품들을 말한다.
즉 망자의 함과 이자나미의 심장. 그리고 에테르 병. 이 세 개다.
“망자의 함은 내가 만들었어.”
“에테르 병은 내 거.”
“나는 이자나미의 심장.”
들어보니, 망자의 함은 운터드레드. . 에테르 병은 타나트닉스. 그리고 이자나미의 심장은 케이어시스의 작품이라는 듯하다.
계약자… 그러니까 내가 ‘마음이 꺾이지 않도록’ 열심히 만들었다는데. 뭔가 굉장히 익숙하면서 소름 돋는 멘트였다.
“그래… 그러고 보니 그런 설명이 붙어 있었던 거 같기도 하고.”
얼핏 아이템 설명에서 ‘사신 누구의 계약품’어쩌구 하는 소리를 봤던 것도 같다. 워낙 옛날 일이라서 잊고 있었는데, 그 사신이 이 사신들이라는 거군.
나는 새삼 새로운 눈으로 사신 세 명을 고쳐봤다. 그렇게 놓고 보니 눈앞의 이상한 여자들이 굉장히 고맙게 느껴졌으니까.
“고맙다.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 너희들이 아니었으면… 아직도 할센베르크에서 레이라한테 죽고 있었을 거야.”
“와아. 칭찬받았다.”
“우리한테 고맙대.”
“더 칭찬해줬으면 좋겠다.”
내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자, 대번 세 사신의 표정이 밝아졌다. 만족과 뿌듯함이 어린 얼굴로 헤실거린다.
뭐지. 사신치고는 굉장히 잘 웃는데… 웃는 얼굴이 잘 어울려서 기분이 미묘하다.
“누구 게 제일 좋았어?”
“역시 나지?”
“아니야. 분명 나일 거야.”
이제 좀 내 본론을 꺼내도 될까 싶었더니. 그녀들은 다시 한번 얼굴을 가까이 하며 그것을 물어왔다.
아무래도 이 대답을 안 하면 얘기가 진전이 없을 듯하다. 세 쌍의 눈에서 느껴지는 집착적인 무언가가 느껴졌다. 나름 자기들한텐 중요한 문제인가 보다.
“그, 글쎄다. 그냥 셋 다 좋았는데. 누구 게 더 좋고 할 게 있나?”
망자의 함은 엘더리치 공략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해줬고. 내가 한 번 죽었다는 사실 자체를 깨닫게 해주는 필수 아이템이다.
에테르 병이 없었으면 애초에 나는 하수도를 공략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이자나미의 심장은 전생의 기억을 수복할 수 있는 필수 아이템이다. 무의미한 도전을 극단적으로 줄일 수가 있다.
“에이.”
“그게.”
“뭐야.”
그런 의미에서 그렇게 말했다만… 아무래도 사신들이 원했던 답은 아닌 듯했다. 밝았던 그녀들의 얼굴이 대번 싸하게 식어버린 것이 그 증거다.
기분 탓일까. 사신 자매의 위에 떠있던 낫이 조금 아래로 가까워진 느낌이다.
“우유부단.”
“바람둥이.”
“인간쓰레기.”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인간쓰레기는 좀 심하지 않니?
방금까지 호의만만한 얼굴로 헤실거리던 얼굴에서 ‘인간쓰레기’ 발언이 나오니 좀 충격먹었다.
사신들은 그런 내 얼굴을 빤히 보더니, 이내 똑같은 포즈로 팔짱을 끼우며 말했다.
“그래서 오늘은 갑자기 왜 찾아왔어 우유부단?”
“우리랑 놀러와준 건 아닐 텐데 바람둥이.”
“뭐든지 들어줄 테니까 말해줘 인간쓰레기.”
태도는 사근사근한데 호칭은 그대로였다.
뭐냐 저거. 화가 풀린 거냐 아닌 거냐. 황당한 나머지 헛웃음을 잠시 흘렸다.
시간 낭비는 이쯤이면 충분하다. 나는 세 사신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장비의 강화. 그리고 전직을 좀 하고 싶어서 찾아왔다.”
“아.”
“아.”
“아.”
세 사신은 내 입에서 ‘전직’ 소리가 나오자 흠칫 몸을 떨었다.
디룩디룩. 여섯 개의 눈이 바쁘게 제들끼리 마주치기 시작했다. 척 봐도 당황이 느껴지는 얼굴로, 그녀들은 제들끼리 속삭였다.
“와. 계약자 아직 전직을 안 했어? 한참 전에 했어야 하잖아?”
“계약자 상대하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 그, 그거 막내가 처리하기로 했던 거 아니었나?”
“아니, 그걸 나한테 덮어씌운다고? 양심 있어?”
“어쩐지 그 사이에 너무 많이 죽었다 싶더라니….”
“미, 미네르바가 알면 엄청 화내겠다.”
“설마 이미 알고 있는 건 아니겠지?”
“… 일단 우리가 준비한 선물로 얼버무릴까?”
“그게 좋겠지?”
“계약자한텐 절대 비밀로 하자?”
야. 다 들린다.
각기 세 사람이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보니, 속삭인다 해도 주위가 훤해서 안 들릴 수가 없었다.
이거 봐. 내가 전직 못한 거 내 잘못이 아니라고. 아신 새끼들 일처리가 군대 행정업무보다 개판으로 돌아가니 이런 일이 생기는 거라고.
“얘들아. 화 안 낸다. 그러니까 그만 쑥덕대고 전직이나 시켜줘. 내가 좀 바빠 지금.”
내 말에 사신들은 흠칫 몸을 굳혔다. 그리고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더니, 다시금 내게 눈빛을 반짝이기 시작했다.
“와. 쿨 가이.”
“역시 계약자. 배포가 크다.”
“멋져. 반하겠어.”
입발린 말이 하나씩 들어왔다. 우유부단이니 인간쓰레기니 하던 멸칭도 씻은 듯이 사라져 있었다.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는 여자들이다.
나는 그런 그녀들을 스윽 훑어보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일단 나는 뭘 하면 될까. 전직이나 아이템 강화는 ‘시련’을 거쳐야 한다고 들었는데….”
“그.”
“전.”
“에.”
사신 자매는 드라군 놀이마냥 한 글자씩 띄어 말하더니. 이내 내 앞으로 시커먼 상자 하나를 들이밀었다.
내가 의문에 찬 얼굴로 그것을 노려보자. 사신 자매가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템 강화는 안 해도 돼!”
“우리가 계약자를 위해 준비한.”
“특별한 선물이 있으니까.”
특별한 선물?
나는 얼떨떨하게 상자를 받아들었다. 이거 망자의 함이랑 같은 재질이군. 나는 손에 닿는 감촉으로 단박에 그것부터 눈치챘다.
나는 상자의 자물쇠 부근에 손을 가져갔고. 곧장 사신 자매를 올려다봤다.
“열어봐. 얼른.”
“지금의 계약자한테.”
“꼭 필요한 물건이니까.”
그렇다고 하는군. 저렇게까지 기대하는데, 안 열어보기도 좀 그렇지.
지금 나한테 꼭 필요한 물건이라 했으니. 끝장나는 스펙의 방어구라도 들어있으려나?
나는 기대와 함께 상자를 열었다. 그리고 안에 들어있는 물건을 보고 눈을 조금 크게 떴다.
“이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