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뭐 어쨌든. 의외로 제논은 내 질문에 성심성의껏 대답해줬다.
그 대답은 대충 이렇다.
“케른에 있는 불사교도의 수는 못해도 300, 많으면 500명 가까이 될 거다. 개인 무력은 나보다 한참 밑돌지만… 10명 이상 몰리면 나라도 힘들 테지.”
“500명?! 아니 경비병들 문 안 지키고 뭐했대! 야동 봤대?!”
“놈들은 정해진 복장도 없고, 특징도 없다. 그 흔한 문신도 없지. 뇌를 뜯어보지 않는 이상 불사교를 먼저 식별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놈들이 어떻게 피아식별을 하는지는… 아직 세간에도 알려진 게 없어.”
“이런 미친….”
“그만큼 불사교는 이 파라이소의 어둠에 깊게 뿌리박고 있다. 함부로 적대할만한 조직이 아니야.”
우선 그게 첫 번째 대답. 여기서 대략 정신이 멍해졌다.
물론 두 번째 질문의 대답은 더 가관이었다.
“아스타르트의 파편을 소환하려면 우선 화신체가 될 제물. 그리고 그 제물에 바쳐질 수많은 인간의 목숨이 필요하다. 조건은 그것뿐이다.”
“수많은? 정확히 얼마나.”
“그걸 아는 건 반지에 잠들어 있는 아스타르트의 파편뿐이야. 그녀가 만족하는 순간 의식이 끝난다. 피와 목숨이 충족되면 아스타르트의 파편은… 화신체의 목을 스스로 뽑아 씹어 삼킨 뒤, 눈을 뜬다.”
“…….”
“소환 의식을 발동하면. 가장 먼저 반지를 중심으로 일대를 휩쓰는 거대한 폭발이 일어난다. 거기서 아스타르트가 만족할만한 목숨이 희생되지 않을 때… 그 때부터 불사교도가 움직이겠지.”
“그렇… 군.”
“그 뒤로는 나도 모른다. 내 임무는 거기까지였으니까.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 계획이 성공했을 경우, 케른은 지도에서 사라질 예정이었다.”
“그래. 알았어… 아주, 잘 알았다고.”
일단 그 대답으로 전생의 참상에 대한 것은 대부분 이해됐다.
폭발 이후에도 무참히 살해당한 주민들. 그리고 목이 없는 시체로 나뒹구는 설백의 모습까지.
모든 것이 이해됐고. 그 대가로 나는 잠시 동안 구역질을 막는데 사력을 다해야 했다.
“그… 박정용. 네놈과 내가 싸웠을 때 누가 이기는가에 대해선….”
그리고 대망의 세 번째.
절대 사심 따윈 없는 미래지향적이고 온고지신의 자세가 투철한 내 세 번째 물음에 대한 대답은, 이러했다.
“일단 높은 확률로 내가 이긴다. 아니, 백중백으로 네놈 따윈 내가 압살한다.”
“말쌈 참 듣기 좋게도 하시네. 왜! 와이! 대체 무엇 때문에! 너 나보다 레벨도 낮잖아!”
“그건 잘 모르겠다만… 박정용. 전직은 했나?”
“…… 전직?”
“거 봐라. 전직이 뭔지도 모르고 있군. 기본도 안 된 놈 같으니. 전직도 없이 지금까지는 어떻게 살아남은 건지, 그게 더 신기하군.”
“…….”
소환된 용사들 중 용사시험에 합격한 사람은, ‘전직’을 할 수 있는 모양입니다. 예.
내가 대충 그 ‘전직’에 대해 캐물어본 결과. 게임에서 자주 나오는 그 전직 맞았다.
전직을 해서 클래스를 확정하면 추가적인 스탯이나 스킬을 얻고. 클래스 특성에 따른 특수 기술이나 특수 스탯 같은 것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럼 이 좋은 걸 대체 왜 나만 모르고 있었느냐? 그건 간단하다.
“애초에 어떻게 전직을 안할 수가 있는 거냐. 시험을 통과하고 나면 시험장의 아신이 신전으로 데려가서 전직을 시킬 텐데. 네놈, 시험에 합격했다고 하지 않았나?”
“…… 아신이요? 내가 있던 곳은 좀비랑 샌즈 밖에 없었는데… 허허 씨봉알….”
그렇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할센베르크는 폐쇄됐던 시험장이다.
전부터 내 취급이 영 소홀하다 싶더라니. 그 스노우볼이 불어나서 이제야 나한테 들이닥친 거다.
그러나 제논의 지적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야. 네가 지금 입고 있는 꼬라지를 봐라.”
“… 난데없이 패, 패션에 대해 지적하는 거라면 사양하고 싶은데….”
“뭔 개소리냐. 장비 말하는 거다.”
“장비…?”
나는 그제야 내가 입고 있는 꼬라지를 한 번 주욱 살폈다.
다 뜯어져 누덕누덕해진 셔츠. 그 아래 가죽바지와 벨트. 등 뒤로는 빛바랜 백팩을 메고, 허리춤에는 작은 파우치와 흑백의 쌍검이 달려 있다.
참고로 이 패션에서 쌍검 빼고는… 이 세상에 떨어진 직후로 바뀐 기억이 없다. 나와 이세계 인생을 함께 헤쳐나온 소울메이트들이다.
제논은 내 항상심 있는 그 패션을 척, 삿대질하며 단호히 선고했다.
“대체 레벨1 때 착용하는 초보 용사 장비를 언제까지 써먹을 생각이냐. 그 정도면 장비가 너한테 죽여달라 그러겠다.”
“…….”
“전직의 부재. 그리고 허접하기 짝이 없는 초기 보급용 장비. 이래놓고 날 이기길 바라나? 넌 그냥 양심이 없는 거다.”
그제야 난 깨달았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팬티만 입고 전직도 안 하는 고인물 플레이를 하고 있었다.
‘… 그럼 설마….’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제논의 허리춤을 살폈다. 전생에서 내 턱을 꿰뚫고, 몸을 관통했던 단검이 거적때기 안으로 슬쩍 비쳤다.
겉보기엔 낡고 추레한 일반적인 단검이다. 하지만… 과연 내용물은 어떨까.
‘미미르의 눈.’
두둥. 익숙한 효과음과 함께 단검의 정보 패널이 눈앞을 가렸고.
[명칭: 날카로운 침묵의 용치기 단검 (+6)]
[보정치: 힘 +15, 민첩 +15, 용족에게 추가 데미지 20% 적용]
[강화보정치: 힘 +53, 민첩 +37, 지능+11]
[특수보정치]
[접두어 ‘날카로운’ ― 방어력 무시 30%]
[접두어 ‘침묵의’ ― 스펠 브레이크 1단계 적용]
[상세: 용제국 케나인에서 아룡(亞龍)을 방목하는 용치기단 일족의 전통 단검. 용골로 제작되어 외관은 투박하나 마모가 적고 강도가 상당하다. 용의 가죽을 찢는 데 특화되어 있다.]
[강화 가능 회수: 1 (강화 적용: 6회)]
“으아아 강화존망겜!!!”
빽빽하게 들어찬 환장할 스펙에 비명을 터뜨렸다.
* * *
―… 당장 할 일이 없으면 여신의 신전부터 다녀와라. 전직이든 아이템 강화든 시간이 많이 들지 않아. 지금 네 상태면 단기간에 전력이 대폭 증가될 거다.
망연자실한 내게 제논은 그렇게 조언했고. 나는 그의 말대로 곧장 신전에 향했다.
적이었을 때는 그렇게나 내 발목을 붙잡던 제논이었지만. 같은 편이 되니 이렇게 의지가 될 수가 없다.
―아이템 강화도 신전에서만 가능하니 대장간을 따로 들를 필요는 없어. 애초에 용사 육성 시스템으로 아신의 힘을 추가하는 거지 물리적으로 강화하는 게 아니니까. 재료는 따로 필요 없지만… 아마 그에 따른 시련이 기다릴 거다.
제논은 불사교와 엮여서 산전수전공중전까지 다 겪은 진짜 베테랑 용사라 그런가. 정보 보따리가 따로 없었다. 아이템 강화나 전직 정보 외에도 용사로서 생존하는 팁을 꽤 많이 얻었다.
고렙 법사님한테 쩔 받아 급성장한 할센베르크 촌놈이랑은 다르긴 다르군.
‘가능하다면 이 동맹은 이어가고 싶은데.’
같은 편이 되고 나니 더욱 확실해졌다. 제논은 적으로 돌리기에는 너무 위험하고. 또한 아까운 인재였다.
물론. 그러려면 어떻게든 이번 사태를 해결해서. 제나를 포함한 모두가 살아남는 게 중요하겠지.
“여긴가.”
나는 도착한 신전 앞에서 가만히 건물을 올려다봤다. 내 옆에서 쫄래쫄래 따라붙은 마왕이 같이 시선을 올리더니 탄성을 질렀다.
“오호. 이게 그 신전이냐? 더러운 천계놈들의 소굴이라.”
“일단 제논이 준 지도 상으론 여기가 맞아.”
“… 뭔가 신전치곤 성스러운 맛이 없구나. 내가 마왕이라 그렇게 느끼는 게냐?”
“아니. 내가 봐도 성스럽기보단 상스러운데.”
제논이 말한 ‘여신의 신전’은 거주지구와 상업지구의 중간 지역 즈음에 있었다. 신전이라기에 으리으리하게 지어졌겠지 싶었는데, 의외로 겉모습은 투박한데다 규모도 작았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규모는 상업지구의 웬만한 호화 레스토랑보다 작고. 외벽은 군데군데 마모되고 칠이 벗겨졌으며. 부서진 대리석 기둥과 동상이 을씨년스럽게 방치되어 흉물스럽기까지 했다.
뭐랄까. 편의점보다 많다는 한국의 교회들이 차라리 더 성스럽고 호화스럽지 싶다.
‘그보다, 이 정도면 그냥 망한 수준 아닌가?’
이거 운영은 하고 있는 거 맞나? 그런 생각이 절로 드는 수준의 피폐함이다.
나는 제논에게 사기 먹은 게 아닌가 싶은 생각에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조심스럽게 신전의 문을 열고 안으로 진입했다.
“안은 생각보다 깨끗한걸.”
으스스한 건물에 들어갈 때 이 대사 꼭 해보고 싶었다. 버킷리스트 하나 달성했군.
실제로 안이 생각보다 깨끗한 건 사실이었다. 전체적으로 검은 색조에, 신을 모시는 제단을 중심으로 각양각색의 제기(祭器)가 눈에 띄었다.
‘… 저건?’
그리고 거울.
제단의 뒤로 거대한 거울이 일자로 주르륵 늘어져 있다. 10개는 족히 넘을 듯했다. 특이한 광경이다 보니, 한 번 박힌 시선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자니 눈앞에서 불쑥, 시커먼 사제복을 입은 사람이 하나 튀어나왔다.
“어, 오오…! 오, 오랜만에 용사님이 찾아오셨네요… 프로피샤는 언제나 이 세계의 구원자를 화, 환영합니다.”
“헛…!”
순간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놀랐다. 비명은 지르지 않았다. 너무 놀라니까 아예 말문이 턱 막히더라.
나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간신히 말문을 텄다.
“어, 언제부터 거기에?”
“아, 아까부터 계속 여기서 기도를 드리고 있었습니다만….”
“아 예….”
주변이 시커매서 시커먼 사제복이 스텔스 기능을 했나 보다. 나는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눈앞에 나타난 사제의 모습을 살폈다.
습관적으로 눈에 힘을 주고 있다가, 피식 웃으며 힘을 풀었다.
‘미미르의 눈… 까지 쓸 필요는 없겠지?’
사제는 온화한 인상에 안경을 썼고, 눈은 파란색이다. 키가 크고 깡마른 것이 두툼한 사제복 너머로도 느껴졌다. 손에는 경전 같은 것을 들고 있다.
말을 더듬는 게 습관인 것 같고, 행동거지가 쭈뼛거린다. 외향적인 스타일은 아닌 듯했다.
무엇보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눈처럼 새하얀 머리칼.사제모 아래로 내려온 단발이 워낙 깨끗한 하얀색이라 굉장히 눈에 띄었다. 적어도 나이 먹어서 샌 머리칼은 아니었다.
“아… 이, 이 머리칼이 신경 쓰이시는군요. 이, 이건 백발병 환자라서 그렇습니다.”
내 시선을 눈치챈 건지 사제가 먼저 설명했다. 아무래도 이런 시선을 받는 것이 익숙한 듯했다.
나는 처음 듣는 병에 눈썹을 틀어올렸다.
“백발병이요?”
“예에… 디, 디아나의 저주라고 불리는 병이지요. 그, 그냥 체모가 하얗게 되는 것 외에 증상은 없고 전염성도 없으니 안심해도 좋습니다.”
“그렇군요….”
그 순간, 사제의 시선이 내 신형 뒤로 숨어있던 루시에게 향했다. 루시는 퍼뜩 후드를 깊게 눌러썼다.
“그쪽의 아가씨도 백발병 환자인 줄 알았습니다만… 아니었나요?”
“아 네. 이, 이쪽은 유전입니다.”
“그렇군요. 이거 실례했습니다. 반가워서 그만.”
“아닙니다.”
사제는 슬쩍 웃으며 먼저 신전 안으로 걸어갔다.
백발병이라. 루시의 특이한 외견에 대한 변명거리가 추가됐군. 나는 곁눈질로 루시와 시선을 교환하고는 곧장 그의 뒤를 따라붙었다.
그러자니 사제가 제단 앞에서 멈춰서서 내쪽을 돌아봤다.
“저, 저는 플릭 아바스입니다. 모든 아신들의 어머니인 프로피샤 여신을 모시고 있습니다.”
“박정용입니다.”
“루스티… 가 아니고 루시이니라.”
갑작스런 통성명에 나도 이름을 밝혔고. 루시도 덩달아서 밝혔다.
너는 왜 밝히냐. 하는 것도 없는 깍두기 주제에.
“오, 오늘 방문하신 목적은 어찌 되시는지요? 축성이나 축복이 필요하십니까? 아니면 전직이나 장비 강화를?”
“아… 전직이랑 강화 쪽입니다만.”
“그, 그렇군요. 따라오시지요.”
사제는 익숙한 몸짓으로 우리를 인솔하더니 제단 앞으로 이끌었다. 동시에 본인은 제단 뒤로 돌아가 거울들을 손으로 가리켰다.
“사, 사실 우리 프로피샤의 신전에서는 직접적으로 용사님들께 도움을 드리진 않습니다. 어디까지나 각 아신들의 허상세계로 이어주는 징검다리 역할을 해줄 뿐이지요.”
“징검다리요?”
“예에… 여, 여기 보이는 제단에 손을 올려놓으시면, 요, 용사님이 총애를 받고 있는 아신이 누구인지 제단이 파악해줄 것입니다. 그, 그러면 해당되는 허상세계와 연결되는 거울이 빛나는데, 들어가시면 아신과 대면하여 전직이나 아이템 강화를 하실 수가 있습니다.”
“아하… 그렇군요.”
사제는 굉장히 익숙한 본새로 친절하게 설명했다. 틀에 박힌 멘트를 영혼없이 주워섬기는 모습이 흡사 놀이공원 진행스탭 같았다.
나는 곧장 손을 제단쪽으로 가까이 가져갔다. 손을 대기 직전 혹시나 싶어 플릭을 쳐다봤다.
“그냥 손만 갖다 대면 됩니까?”
“예에. 저, 절차는 제가 알아서 해드릴 겁니다.”
“예. 그럼.”
허락도 떨어졌겠다. 나는 곧장 손을 제단 위로 짚었다.
그러자 두근. 순간 심장이 멈추는 듯한 감각이 몰려왔다. 알싸한 고통이 손바닥을 간질이나 싶더니. 이내 미친 듯한 흡인력이 제단에서 느껴지기 시작했다.
빨려 들어간다. 제단이 나에게서 무언가 빨아내고 있다!
“크으… 이, 이게 뭐야!!”
나는 화들짝 놀라 손을 떼고 플릭을 쳐다봤다.
아마 시선에 상당한 적대감이 있었을 거라 생각한다. 검을 뽑을까 고민했을 정도니까. 처한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혹시 불사교의 첩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직후 플릭의 표정을 보고 적대감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가 나 이상으로 당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 아니… 이, 이, 이럴… 수, 수가….”
아니. 당황 수준이 아니다. 공포였다.
플릭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서는, 시커먼 기운을 무럭무럭 토해내는 거울 하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사, 사, 사신 운터드레드… 사, 사, 삼십 년동안 열린 적 없었던 사신계의 문이… 게, 게다가 이, 이 농밀한… 마, 마의 기운은… 대체…!!”
플릭은 지금까지의 2배 이상으로 말을 더듬었다. 그러다 불쑥,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나를 쳐다보는 그의 눈에는 아까같은 자애와 여유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요, 요, 용사님… 다, 다, 당신은 대체… 누, 누구입니까?”
경외와 공포가 담긴 질문에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천천히 거울로 다가갔다. 거울은 기분 나쁜 오라를 무럭무럭 내뿜고 있었다. 거울 너머에 있는 누군가의 지나친 관심이 여기까지 느껴지는 것 같다.
‘하지만….’
공포에 젖은 플릭과 달리, 나는 뭐랄까. 오히려 그 시커먼 기운에서 편안함마저 느끼고 있었다.
나는 거기로 거침없이 손을 갖다댔다. 그리고 쓴웃음과 함께 말했다.
“그냥 164317413번째 용사요.”
중얼거림과 동시에 눈앞이 스르륵, 따스한 무언가로 뒤덮였다.
잠깐 아득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