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그런 해프닝도 있었다만.
나는 딱히 설백의 오해를 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어차피 일을 진행하면 내 의중이야 알아서 파악될 거라는 계산이었다. 얻어맞을 뻔한 건 좀 예상외긴 했지만.
그런 쓸데없는 걸 하기보단, 당장 시도해볼 수 있는 모든 걸 해보는 데 시간을 쓰기로 했다.
그래서 나는 가도를 걷다 말고, 설백에게 대뜸 손을 내밀었다.
“설백.”
“왜요, 납치범 지망생님.”
“……”
내 호칭이 좀 길어진 느낌인데.
뭐 됐다. 아무려면 어때. 오늘만 벗어날 수 있으면 납치범이든 살인범이든 못 될 것도 없는 마당인데.
나는 들이민 손을 물리지 않은 채 그녀에게 말했다.
“일단 그 반지. 내가 맡아놓을게. 위험하니까.”
“반지? 아… 이거요.”
설백은 손에 끼워놓은 반지를 흘깃 쳐다보며 탄성을 흘렸다.
한참을 고민하던 설백은 끝내 순순히 반지를 빼내 내게 넘겼다. 하지만 얼굴에는 아쉬운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갸웃, 고개를 기울였다.
“왜 그래? 그거 위험한 거라고 말했잖아. 갖고 있으면 지옥간다 지옥.”
“그, 그건 알고 있지만….”
“있지만?”
“이거… 정용님이 저한테 처음으로 준 선물인데….”
설백은 모기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하더니 이내 얼굴을 푹 수그렸다.
입을 꽉 닫은 그녀는 얌전히 반지만 나한테 내밀었다. 손 끝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다.
“아니에요. 자, 여기요.”
“…?”
… 처음으로 준 선물인데 뭐. 어쩌라고. 왜 말을 하다 마냐, 사람 궁금하게.
나는 알 수 없는 설백의 반응에 머리만 긁적이다가. 이내 설백이 내민 반지를 받기 위헤 손을 뻗었다.
그 순간 파지직! 시커먼 전류가 내 손을 태워먹을 듯이 치달렸다.
“왐마 X발!”
퍼뜩 손을 떼고 깜짝 놀라서 반지를 쳐다봤다. 설백 역시 토끼눈을 뜨고 반지와 내 손을 번갈아 쳐다봤다.
두둥. 음산한 소리와 함께 패널이 내 앞으로 등장했다.
[오류 ― 양도 불가]
[알 수 없는 강력한 힘에 의해 보호받고 있다. 해당 아이템은 타인 양도가 불가하다.]
우리가 놀라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있으려니. 옆에서 마왕이 그럴 줄 알았다는 양 혀를 한 번 쯧, 깊게 찼다.
“쯧. 예상은 했다만… 이미 그 계집은 제물로서의 침식이 끝났군.”
“뭐라고?”
내가 의문스런 시선을 보내자, 마왕은 어깨를 으쓱이더니 나를 삿대질했다.
“이봐 용사. 그 반지를 다시 한 번 살펴보거라.”
“살펴보라고? 그게 무슨 소리야.”
“네놈이 항상 하는 그거 있잖느냐. 이상한 판때기 띄우는 그거.”
“아. 미미르의 눈….”
“아마 설명이 전보다 친절해졌을 게다. 그 빌어먹을 년의 잔향이 짙어졌으니까. 그 썩을년은 항상 그런 식이거든.”
“친절해져…?”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였지만. 일단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곧장 미미르의 눈을 발동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직후 깨달은 사실 하나 때문에 내 행동은 우뚝 정지했다. 삐걱삐걱 돌아간 눈으로 루시를 주시했다. 그리고 얼떨떨하게 물었다.
“아니 근데. 네가 미미르의 눈을… 어떻게 아냐?”
“아앙? 이상한 놈일세. 지금까지 내 앞에서 잘만 사용해놓고 어떻게 모르길 바라는 게냐?”
“아니… 너, 지금까지 그게 다 보였어?”
“인식저해 마법이 걸려있는 것 같다만… 그건 전생의 시신도 마찬가지 아니냐? 그걸 볼 수 있는데 판때기는 못 볼 리가 있겠느냐.”
오히려 루시가 이상한 소리 한다는 듯이 나를 빤히 쳐다봤다.
그런가. 마왕은 미미르의 눈으로 뜨는 패널이 지금까지도 보이고 있었군. 그래서 내가 패널 확인을 할 때면 유난히 조용했던 건가.
어쨌든 나는 곧 정신을 차리고 반지에 시선을 집중했다. 그러자 언제나처럼 패널의 정보가 눈앞을 가렸다.
[아이템 정보]
[명칭: 이스그라드의 전조]
[보정치: 착용자의 모든 능력치 약 3배 강화 (아이템 효과 미적용)]
[상세: 태고룡 이스그라드를 격살한 청염의 마왕, 아스타르트의 전조가 깃든 반지. 착용자는 아스타르트의 제물이 되기 위한 각인이 새겨진다. 각인이 새겨진 제물은 희생되기 전까지, 일시적으로 아스타르트의 화신체로서 막대한 힘을 얻는다.]
[강화 가능 회수: 0]
[특수 상태 적용 - 착용 시 양도 및 파괴 불가]
[현재 상태: 착용 중 / 각인 발동 중]
물음표가 아니었다. 엄청난 정보들이 일거에 쏟아진다.
나는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그 정보들을 읽어내려갔다.
“…… 뭐야 이게.”
보인다.
전에는 물음표 투성이로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던 반지가 모든 정보를 실토해내고 있었다.
‘설마 이거…’
설명에 나온 대로 각인이라는 게 발동되면, 그 때부터 상태창이 표기되는 그런 시스템이었나? 소위 말하는 조건분기 아이템?
지구에서 살 때는 뼛속까지 겜창인생이었던 주제에 그런 기본적인 것도 확인해보지 않다니. 이세계 물을 너무 많이 먹었나 싶다.
나의 안일함에 탄식하는 한편. 드러난 반지의 실체에는 말 그대로 전율했다.
“뭐라고 써있느냐.”
루시가 물어왔다. 설백도 옆에서 무슨 일인지 궁금해하는 눈치다.
하지만 오히려 묻고 싶은 건 내쪽이다. 루시는 이 반지의 정체에 대해 알고 있는 눈치였지. 나는 오히려 루시에게 반문했다.
“이봐 루시. 너 이 반지에 대해 아는 거 있냐?”
“자세히는 모른다. 나도 전생에서 얼핏 감각으로 느낀 게 다라서.”
“느꼈다고? 뭘 느꼈는데.”
“아스타르트… 그 개같은 년의 지독한 썩은내가 풀풀 풍기는 걸 느꼈지.”
그렇게 뇌까리는 루시의 행색엔 불쾌감이 잔뜩 끼어 있었다. 연신 혀를 차고 입은 댓발 나왔으며. 미간에 골이 깊게 패여 있다.
나는 루시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스레 물었다.
“그래. 아스타르트. 이 반지에도 그 이름이 나왔어. 아스타르트가 대체 누구야?”
“청염의 마왕 말이냐? 별명 짓길 좋아하는 인간놈들이 소위 ‘4마왕’이라고 부르는 놈들 중 하나다.”
“4, 4마왕…?!”
“그래…. 징글징글맞게도 오래 산 할망구 년이지.”
내가 반지에 드러난 내용을 말해주지 않았음에도 루시의 입에서 ‘청염의 마왕’이라는 이명이 나왔다. 그걸로 봐서 일단 그녀가 말하는 아스타르트가 반지 설명에 나온 아스타르트와 같은 인물이라는 건 확실하다.
그리고 그 마왕의 정체는… 무려 불사의 마왕과 동급인 4마왕 중 하나라고 한다.
“허. 이런 미친….”
이를 어쩐다. 어쩌면 좋냐.
정말 터무니없이 스케일이 큰 사건에 휘말렸구나. 새삼 루시의 말로 그걸 실감했다.
나는 머리를 쥐어 싸매고 한숨을 뻑뻑 내쉬었다.
“아니 미친 이게 말이 되냐… 어떻게 랜덤박스 가챠에서 그런 정신나간 아이템이? 하필이면 설백한테….”
그리고 거기까지 중얼거린 순간. 나도 모르게 입을 콱 다물었다.
생각해보니 그건 진짜 말이 안 된다. 그걸 깨달은 것이다.
‘그 하얀 폭발이 우릴 죽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일으킨 거라면….’
그 폭발을 일으키는데 중요한 매개체인 반지가 우연히 설백에게 입수됐을 리가 없다.
의도된 것이다. 설백에게 이 반지를 팔아넘긴 그놈은 불사교도일 확률이 높다.
‘그 카사스라는 놈들처럼, 불사교도 우리를 주시하고 있었던 건가?’
그래서… 기회를 봐서 저런 위험한 물건을 우리에게 넘긴 건가?
우리를… 나와 루시를 죽이기 위해서?
설백은… 그런 우리 때문에 계속해서 희생된 거고?
‘이런 망할…!’
갈수록 태산이요, 산 넘어 산이구나.
나는 속으로 씨근거리며 무릎을 털어냈다. 그리고 다시 케른의 뒷골목 쪽으로 박차를 가했다.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걷고, 짐짝처럼 여기저기 널브러진 부랑자들을 피해 전진하길 잠시. 나는 곧 눈에 익은 판자집 하나를 앞에 두고 일행들을 세웠다.
“그래. 여기다.”
“아. 여기가 그….”
“흐음. 용사. 네놈을 주무를만한 고수가 살 집으론 안 보이는걸.”
물론 그 집은 제나와 제논이 사는 판잣집이다.
이로서 꼬박 세 번째 방문. 농담 좀 보태면, 이제 눈 감고 물구나무 서서도 찾아올 수 있을 것 같은 익숙함이 느껴진다.
나는 쓴웃음을 머금었고. 잠시 하늘을 쳐다봤다.
‘… 시간은 딱 좋아.’
해가 살짝 서쪽으로 기울어 있다. 정오를 지나고 1시에서 2시 정도 된 것으로 보인다.
내가 전생에서 이 집을 방문했을 때. 딱 정오 쯤 되는 시각이었다.
‘그 때 제논은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제논과 문앞에서 정확히 맞닥뜨렸지.
그러니까 제논의 외출 시간에 큰 변동사항이 없다면… 제논은 지금 집에 없다.
지금 여기 판잣집엔 제나 혼자만이 집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시작해볼까.”
호기롭게 중얼거린 나는 곧바로 행동으로 옮겼다.
“계십니까. 좋은 말씀 전하러 왔습니다.”
똑똑똑. 문을 두들기며, 있던 신뢰도 팍팍 떨어지는 멘트를 주워섬겼다. 물론 신뢰가 떨어지는 건 지구 한정이니 이곳 파라이소에선 상관없는 얘기다.
그렇다고 이 멘트가 잘 먹힌다는 소리는 아니지만.
“…….”
“…….”
나는 일행들과 나란히 서서 반응이 오길 기다렸다.
그렇게 한 3분 정도가 지났을까. 옆에서 루시가 내 옷깃을 꾹꾹 잡아당겼다.
“누구 있는 거 맞냐? 반응이 전혀 없지 않느냐.”
“… 그러게.”
나도 그쯤 되니 뭔가 이상하다 싶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반응이 없을까. 그 자리에서 몇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봤다.
‘없는 척을 하고 있다. 잠깐 외출했다. 그 외 기타 등등….’
여러 경우의 수가 있지만. 아무래도 가장 확률이 높은 건 안에서 없는 척을 하고 있는 경우겠지.
절대 밖에 나오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는 제논의 모습을 내가 기억하고 있으니까. 아마 확실할 것이다.
‘… 그냥 강제로 끌고 나올까?’
잠깐 뇌리를 스친 생각이었지만. 이내 헛웃음과 함께 사라졌다.
솔직히 저런 판잣집 부수고 여자애 하나 데려가는 거야 쉽지만. 나는 진짜 납치범이 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어디까지나 정당한 방법으로. 제나가 제 발로 인질이 되도록 만들어낼 생각이다.
그녀에게는 협박용 인질 그 이상의 효과를 기대하고 있으니 말이다.
‘솔직히 무슨 함정이 있을지도 모르고 말이지.’
사실 더 큰 이유는 이쪽인데. 교활한 ‘z지존 법사★제논z’놈이 판잣집에 장난질을 쳐놨을 가능성 때문이다. 소중한 동생이 기거하는 집이니 당연히 방어체계가 잡혀 있겠지.
될 수 있으면 쓸데없는 마찰은 피해야 한다. 앞으로 벌어질 ‘쓸데 있는’ 마찰을 위해 힘을 비축해야 하니까.
‘흠. 어쩔 수 없나.’
나는 결국 최후의 수단을 사용하기로 했다.
성큼 앞으로 나갔다. 문 앞에 바짝 붙어 서서 가만히 귀를 대봤다.
“…….”
안에서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온다.
“… 오빠….”
가냘픈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제나가 숨을 죽이고 반대편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나는 쓴웃음을 삼켰다.
미안하지만 너희 남매는 말이다. 서로가 약점인 게 너무 티가 나서 문제야.
“문 좀 열어주십시오. 당신 오라비… 제논 씨가 위험합니다.”
“…!!”
“한 시가 급합니다. 어서요.”
거 봐라.
내가 내뱉은 거짓말 한 마디에 안에서 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려오잖냐.
나는 문 앞에서 입꼬리를 올렸고. 동시에 굳게 닫혀 있던 판자집의 문이 끼이익, 천천히 열렸다.
“오빠가… 위험하다니… 그게 무슨….”
살짝 열린 문틈으로 나를 훑어보는 제나의 붉은 눈동자가 보인다.
그리고 한참을 내 얼굴을 살피던 제나의 눈이 어느 순간 크게 뜨였다.
“어. 다, 당신은…!”
세 번째 첫만남이군. 첫만남이 지겨울 수도 있다니. 내 인생이 레전드다. X발.
나는 질리도록 반복했던 첫인사를 이번에도 우려먹었다.
“너. 나 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