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우스운 인질극
“걱정 근심 해결하고 온 꼬라지는 아니구나?”
기억의 수복이 끝나고. 403호로 돌아오자 곧장 마왕의 비아냥이 들려왔다.
“정용님. 괜찮으세요?”
동시에 설백의 걱정스러운 목소리도 들린다. 나는 찡그렸던 눈을 펴고 그제야 방을 제대로 살폈다.
침대에 마왕과 설백이 나란히 걸터앉아 있었다. 아무래도 둘이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빤히 나를 쳐다보던 두 여자 중 먼저 말을 건 것은 마왕이었다.
“기다리느라 목 빠지는 줄 알았다. 쾌변 했느냐?”
“아니 루시씨! 무, 무슨 그런 걸 물어보고 그래요!”
“농담인 거 뻔히 알면서 반응이 찰지구로.”
“…… 흐흠.”
기분 탓인가. 두 사람이 앉은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진 느낌이다. 평소엔 보이지 않는 벽이 있는 느낌이었는데, 그게 사라진 것 같다고 할까.
둘이서 막역하게 대화하는 모습을 보니, 나 없는 사이 서로 대화의 꽃이라도 피운 모양이다.
“하하….”
도저히 웃을 기분은 아니었지만. 그녀들의 평소 같은 행색에 저절로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직후, 칼정색하면서 곧장 입을 열었다.
“설백. 말해야 할 게 좀 있어.”
설백은 내 말에 어깨를 움찔하더니. 이내 자세를 똑바로 고쳐 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말씀하세요.”
행색을 보아하니 마왕에게 대충 언질을 받은 모양이다. 뭐 내가 중요한 애기를 할 거다. 이 정도로 얘기해 놓은 듯싶은데….
… 이상하게 얼굴이 빨개져 있는 거 같다? 대체 뭔 얘기를 기대하는 거지?
“흐흠. 사실 나랑 루시는 말이야….”
그렇게 알 수 없는 기대어린 눈빛에 대고, 나는 진실을 털어놓았다.
내 얘기를 듣는 설백의 눈이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 * *
“소, 솔직히… 믿기지가 않네요.”
내가 시공회귀와 루시의 정체, 그리고 나와의 관계까지 밝히고.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그녀에게 대략적으로 설명했을 때. 설백의 반응은 그것이었다.
뭐 그래. 당연한 반응이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의심 어린 눈초리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게 진실이야.”
“… 저도 죽었다 이 세상에 살아난 거라지만, 지금 그 말씀은 믿기 힘든 얘기라서….”
“증거는 없지만 믿어줬으면 좋겠어.”
나는 설백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그렇게 단언했고. 설백은 화들짝 시선을 피하는가 싶더니, 이내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네에… 믿을게요. 정용님의 말씀이라면… 뭐든 믿고 싶으니까요.”
“그래. 고마워. 일단 그걸로 됐어.”
이제 한시름 놓았군. 나는 한숨을 흘리며 마왕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침 루시도 이쪽을 보고 있었던지라 그녀와 눈이 맞았다. 루시가 곧장 히죽거렸다.
“큰 걱정거리 하나 넘겼구먼. 다행이로구나.”
“뭐… 걱정이 사라지진 않네. 늘었으면 늘었지. 이게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아무렴 잘하는 짓이지. 더 이상 그 여관에서 밤을 맞는 건 사절이라서 말이다.”
“후우. 나도 그러고는 싶은데….”
반사적으로 전생의 일들을 떠올렸다. 저절로 웃음기가 사라졌다.
분한 마음에 주먹을 피가 나도록 움켜쥐었다.
‘… 뭐 하나 제대로 한 게 없어.’
내가 설백에게 사실을 밝혀야겠다고. 마왕의 말대로 해야겠다고 곧장 마음먹은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뼛속 깊이 새겨진 전생의 무력감. 그것이 내게 가르쳐줬다.
이번 일은… 절대 나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도움이 필요하다.
‘누구라도 좋으니 내 편을 늘려야 해.’
지금까지 당한 복수를 해주겠답시고 제논에게 덤볐다가, 가오 상하게 개털렸다.
레벨 차가 남에도 놈이 나를 압도한 이유조차 알아내지 못했다.
심지어 폭발도 막지 못했다. 설백이 죽어갈 때 제논에게 뻗어서 퍼질러 자고 있었다.
마지막엔 마왕조차 지키지 못했다.
‘그 양반… 대체 정체가 뭐야.’
나는 죽음 직전의 압도적인 패배를 떠올렸다.
사자 갈기 같은 하얀 장발. 깊게 패인 흉터와 주름이 박힌 얼굴. 사납고 위험한 웃음. 눈에 보이지도 않는 스피드. 내 심장을 한 번에 관통해 뽑아버리는 압도적인 힘.
… 그리고 뽑은 심장을 내 입 안에 쑤셔넣는 잔인한 손속까지. 손에 잡힐 듯이 선하다.
‘적랑이라고 했지.’
정신차려보니 나는 떨고 있었다.
오랜만이다. 태산을 앞에 두고 있는 것 같은 이런 기분.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실감. 이런 압도적인 실력차는 변경백 이후로 처음이다.
‘적랑… 변경백….’
가만 있어 봐라. 변경백?
“그래. 변경백!”
나는 번개처럼 뇌리를 후려치는 기시감에 몸을 곤두세웠다. 두 여자가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지만. 난 아랑곳않고 여관 안을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변경백과 적랑. 분명히 이 두 단어를 같은 곳에서 본 기억이 난다.
뇌 속이 터질 듯이 뜨겁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어디였지?’
왜 연관되어서 생각이 난 거지? 둘 다 터무니없이 강한 사람들이라서 착각한 건가?
아니. 그런 느낌이 아니다. 분명히 이 둘은 관련이 있는 사람이다. 대체 뭐가 이런 확신이 들게 만드는 걸까?
머리를 짜내던 나는, 곧 물로켓마냥 그 자리에서 펄쩍 튀어올랐다.
“맞다! 편지다!!”
“으앗 깜짝이야! 뭐냐 갑자기!”
“편지라고! 변경백이 준 편지!”
“편지가 뭐 어쨌다는 게야 미친놈아!”
깜짝 놀란 루시가 연신 내 종아리를 걷어찼지만. 나는 아랑곳않고 황급히 가방을 뒤졌다.
보자. 에테르병 아니고, 망자의 함 아니고, 휴대용 점화기도 아니고… 그래. 이거다.
나는 곧 손에 든 꼬깃꼬깃한 편지봉투를 활짝 펼쳤다. 그리고 그 표면에 쓰인 글자를 읽었다.
―친애하는 벗 적랑에게, 할센베르크 변경백
적랑(赤狼). 붉은 늑대. 확실히 적혀있다.
“그 남자…! 적랑!”
나는 기억 속의 백발 중년을 떠올렸다. 변경백의 강직한 눈과는 다르면서도 비슷한, 나른한 기색 속에 숨은 흉포함이 인상적이었지.
거기서부터 뭔가 익숙한 느낌이다 싶긴 했는데, 그 터무니없는 강함도 변경백의 지인이라면 이해가 된다. 원래 끼리끼리 논다고들 하지 않는가.
‘설마 동명이인?’
아니야. 그 정도의 강자가 흔하게 여기저기 굴러다닐 리가 없다.
적랑이라는 중2병 냄새 풀풀 풍기는 이명을 사용하는 것도 웬만한 네임드가 아니고선 힘들다.
답은 하나다.
“그 남자… 백발 중년이 변경백의 친구였어!”
“아까부터 혼자 뭐라 중얼대는 게냐 미친 용사놈아!”
옆에서 루시가 드롭킥을 날려온다. 정신이 멍해졌던 나는 그대로 얻어맞고 여관 바닥을 뒹굴었다.
“꺄악! 정용님 괜찮으세요?!”
설백이 호들갑을 떨며 나를 일으킨다. 나는 멍하니 설백의 도움을 받아 그 자리에 일어섰다.
그대로 침대에 걸터앉은 나는 이내 실성한 사람처럼 웃음을 흘렸다.
“인간사 오지게 얄궂네.”
“네? 그게 무슨….”
“아무것도 아니야.”
원래는 평범하게 마르크트레스 수도, 크로스페이드에 내가 직접 찾아가서. 이 적랑이라는 사람에게 도움을 받는 것이 변경백과 계획된 수순이었다.
도움을 받으라고 변경백이 편지까지 쥐어줬던 사람한테. 만날 계획도 없었던 변경 마을 케른에서 그렇게 처참하게 학살을 당하다니.
‘변경백. 친구 하나는 잘 뒀네요. 망할.’
다 망해가는 성 지키겠다고 혼자 농성하는 당신을 보고 친구놈 꼬라지를 예상했어야 되는데. 아무렴 다 내 불찰이지. 우라질.
자조를 짓는 한 편. 나는 턱을 쓰다듬으며 눈을 빛냈다.
‘하지만… 이건 기회다.’
그것도 엄청난 기회. 내게 있어서 일발역전의 찬스가 될 수도 있는 중요한 가능성.
암만 회상해 봐도 그 백발의 남자는 나사가 좀 위험한 방향으로 풀려있었지만. 적랑의 등장을 나쁘게 볼 것만은 아니다.
―마녀에 관한 건 모두 처단한다. 적랑의 이름을 걸고.
마녀에 대한 뚜렷한 증오가 엿보이던 눈빛과 목소리. 똑똑히 기억한다.
그는 내가 폭발을 일으킨 장본인이라 착각했기에 나를 죽였다. 그 오해를 풀 방법만 있다면 아군이 될 가능성이 없지 않다.
일단 그와 나의 목적은 비슷한 것 같으니까.
―주변에 있던 불사교도들을 붙잡고 심문해봤네만, 아무것도 모르더군.
“맞아. 불사교도…!”
나도 모르게 그 말을 중얼거렸다.
케른상연회에서 들었던 그 단체. 마녀 디아나라는 최종보스를 부활시키려는 나쁜 놈의 새끼들.
그러고 보면 히크도 나한테 비슷한 언질을 했었다.
‘내가 불사교와 관련이 있는 게 아니냐고 물어보려 했지.’
그걸 깨닫자 새로운 가능성이 하나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눈을 번쩍 떴다.
… 혹시 그 질문이, 단순히 불사의 마왕과 내가 함께 있어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면?
‘히크는 이미 불사교도가 잠입해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걸 맞다고 가정하고 다시 풀어보면. 이 시점의 케른에는 이미 불사교도가 사방에 쫙 깔렸다는 말이 된다.
그렇게 생각하면, 생각보다 아귀가 들어맞는다.
‘이건….’
좀 사실확인을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번 생엔 다시 한 번 히크를 만나러 가야할지도 모르겠군.
이럴 줄 알았으면 전생에서 케른상연회와 접촉할 암호라도 알아놓을 걸 그랬다. 쓸데없는 마찰이 반복되겠다. 새삼 후회가 된다.
‘그래도 뭐… 완전히 진척이 없진 않았나.’
나는 혼란스러운 머리를 정리시키며 그렇게 자위하기로 했다.
전생에서 알아낸 사실은 대충 이렇다.
거대한 폭발은 불사교라는 놈들이 관여했으며, 설백의 반지는 그 매개물이다.
그 과정에서 변수를 없애기 위해 제논이 고용되었다. 놈의 목적은 나와 마왕의 소통 단절이다.
마지막으로 나를 죽인 그 남자는… 원래 나를 도와줄 예정이었던 ‘적랑’이라는 남자다.
거기까지 정리를 마치고 나니 좀 의욕이 돌아오는 느낌이다.
‘그러면… 이번에 내가 해야할 일도 자명하지.’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은 세 가지다.
첫째. 불사교를 막는다.
둘째. 제논을 막는다.
셋째. 적랑을 비롯해, 최대한 아군을 긁어모아서, 그 불사교라는 놈들을 함께 쳐죽인다.
하지만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내 힘도 한정되어 있다. 둘 다 턱없이 부족하다.
나는 아직 제논을 이길 방법조차 떠오르지 않는다. 나의 무력함을 실감하고 있다.
그리고 그 시점에서, 나는 생각을 그만뒀다.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떴다.
‘그러니까 남의 도움이 필요한 거다.’
동시에 나는 찾아야 한다. 제한시간 내에 최대한 강해질 수 있는 방법을 말이다.
결국 오늘을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나다. 그런 내가 이렇게 쓸모없는 상태여서야 될 일도 안 된다. 나는 반드시 지금보다 강해져야 한다.
나는 주먹을 한 번 쥐었다 폈다. 내 손은 어느새 떨리고 있었다.
‘강해질 계획은 있다. 있지만….’
단적으로 말해서 미친 계획이다.
무엇 하나 틀어지면 곧장 수틀리는 데다, 기본적으로 내 목숨을 걸레짝처럼 소모해야 하는… 그런 계획.
지금 내가 떠는 것은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다.
죽음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그런 계획을 가장 먼저 떠올려 버린 나 자신이 무서워진 것이다.
변했다. 인간 아닌 무언가의 감성이 되어가고 있다. 그것을 지금 확실하게 느꼈다.
‘… 아 몰라. 지금은 아무래도 좋아.’
괴물이 되어야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다면. 괴물이 되어주지.
나는 사납게 웃으며 여관방의 출입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기다렸다는 듯이 마왕과 설백이 내 뒤를 쫓았다.
나는 그런 두 사람을 잠깐 쳐다본 뒤, 호기롭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성큼성큼 두 사람을 앞질러 걸어나갔다.
“좋아. 바로 가보자고.”
그리하여 내가 빡빡한 오늘의 스케줄을 대충 추려보던 그 때.
여관을 빠져나와 대로를 걷던 나란히 설백이 별안간 내게 말을 걸었다.
“저, 근데 정용님.”
“음?”
“그럼… 먼저 무슨 일을 하실 생각이세요?”
“가장 급한 일이면….”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피식, 조금 음험한 웃음을 흘렸다.
“납치.”
“네?”
“납치와 인질극.”
“… 어, 그, 조, 좀 더 정확하게… 말씀해주실래요?”
설백은 기대대로 귀를 의심하는 표정을 지어줬다. 아마 내가 장난을 치고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장난을 치고 있는 건 맞지만. 난 이런 상황에서까지 농담을 할 정도로 실없지 않다.
나는 그녀의 바람대로 좀 더 정확하게 되풀이 해줬다.
“세상물정 모르는 15살 전후의 예쁜 여자애를 납치해서. 협박용 인질로 쓸 거다.”
일부러 목소리 좀 깔고 말했다. 나름 진지함을 어필했다고 자부한다.
그리고 나는 그 날 처음으로 여자한테 진지하게 얻어맞을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