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커밍 아웃
[불사의 회귀점이 갱신되었다.]
[일시 - 대륙력 1108년, 1월 12일, 오전 11시 30분]
[장소 - 마르크트레스. 약속의 평원 상부지역, 소도시 케른 거주 지구]
“잠깐! 거기 서!!”
패널이 뒤늦게 등장하고 나서야, 나는 눈을 부릅뜨며 붉은 머리의 부랑자를 쫓았다.
부랑자는 내쪽을 슬쩍 돌아보나 싶더니 이내 으슥한 골목 쪽으로 진입했다.
나는 혀를 차며 곧장 놈의 뒤를 따라가려 했다. 하지만.
“용사! 멈춰라 용사아아아!!”
내 앞을 가로막고 목청을 높이는 마왕 때문에 내 행동은 우뚝 멈췄다.
기차 화통을 삶아먹은 줄 알았다. 주변의 시선이 그녀와 내게 단숨에 쏠릴 정도의 엄청난 성량이었다.
“이, 이 미친…!”
당연히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이 새끼가 주목받아서 뭐 좋다고 이러는 거야 갑자기? 아직도 이 여자는 자기 처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건가?
나는 황급히 마왕을 들쳐멘 뒤,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왔다. 나를 멀찍이서 따라오던 설백은 부리나케 내 뒤를 쫓아 왔던 길을 돌아갔다.
“야 루시. 갑자기 왜 그래? 쥐약 줏어먹었냐?”
“…….”
인적이 뜸한 길목에 도착한 나는 곧장 마왕을 추궁했지만. 루시는 내 물음에도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며, 혼자 골몰히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다.
이따금씩 혼자 무슨 말을 중얼거린다. 어지간히도 깊게 생각에 빠진 모습이었다.
“야. 왜 그러냐고 갑자기.”
“그래. 그래서였군. 놈들의 술식에서 익숙한 기척이 느껴진 것은….”
“대답하자? 두 번 말했다.”
“아니. 하지만 그녀는 이미 죽었을 텐데. 매개물이 있지 않은 이상 그런 일이 있을 수가… 내가, 정녕 제대로 본 것이 맞단 말인가?”
이 쌔기가 아까부터 자꾸 혼자 코난 모드네. 나는 유명한이냐?
‘사람을 짜증나게 하는 방법이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말을 하다 마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이라는 말이 있지.
무슨 말이냐고? 사람을 불러놓고 말을 하다 말면 짜증이 솟구친다는 소리다.
“으아갸갸갹!”
나는 당연한 수순으로 루시의 볼을 쭈욱 잡아당겼고.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볼을 문질렀다.
이내 쌍심지가 번쩍 올라간 루시가 내게 바락바락 대든다.
“아니 뭐하는 게냐! 지금 이몸이 골똘히 고민하고 있는 모습이 안 보이냐!”
“보인다. 그러니까 아까부터 계속 물어보잖아. 대체 뭔 일이냐고.”
“… 아.”
루시는 그제야 내 눈을 똑바로 보고는 탄성을 흘렸다.
그녀는 잠시 고민했다. 발등으로 바닥을 툭툭 치다가, 팔짱을 끼우고 침음을 흘리다가.
이내 나와 설백을 한 번씩 돌아보는가 싶더니. 입을 열었다.
“여봐라. 용사.”
“그래. 왜.”
“저 계집한테 모든 진실을 털어놔라.”
“…… 뭐?”
지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것인가. 순간 귀를 의심했다.
우리 파티에 여자라곤 마왕과 설백 밖에 없으니 ‘저 계집’은 당연히 설백을 말하는 것이고. 그녀가 지금 상황에서 모든 진실을 운운할만한 진실은 하나 밖에 없다.
‘시공회귀의 진실을 설백한테?’
나아가 마왕과 나의 진짜 관계에 대해 설백에게 털어놓으라고 종용하는 것이다.
“저, 저요? 루시 씨. 저한테 뭔가 하실 말씀이라도?”
“아니. 내가 아니고 용사놈이 너한테 해야 할 말이 있다.”
“정용님이요?”
설백은 어리둥절하게 나를 쳐다봤다. 마왕과 나란히 서서 열렬한 눈빛이 내게 쏟아진다.
당연히 나는 기가 막혀서 반박부터 했다.
“야… 아니. 미쳤냐? 왜 갑자기 설백을 끌어들여?”
“지금의 네놈 혼자만으론 감당할 수 없는 상대니까.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하는 처지란 말이다.”
“상대…? 너 X발 걷다 졸았냐? 뭔 개소리야 아까부터.”
이쯤되니 얘가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건지, 나는 갈피조차 잡지 못할 지경이었다.
나는 얼빵하게 뒷머리나 긁적였고. 그런 내 얼굴을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던 마왕은 이내 한숨과 함께 홱 등을 돌렸다.
“아무렴 한세월 설명해봐야 직접 보는 것만 못하지. 내 명령을 듣기 싫다면, 얌전히 따라오기나 해라. 네 쪽에서 사실을 밝히고 싶어질 테니까.”
그 말만 남기고 마왕은 설백과 나를 제치고 앞장 서 걸어갔다.
저벅저벅. 걸어가는 루시의 왜소한 어깨가 평소답지 않게 힘이 들어가 있었다.
“허, 참….”
나는 설백과 잠시 눈빛을 교환했다. 하지만 설백도 아무것도 모른다는 눈초리다. 일단 나를 위해 준비한 몰래카메라는 아닌 것 같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앞장서 가는 루시를 쫓아가야 했다.
“야 루시! 어디 가는데!”
“여관이다. 너와 저 계집이 숱하게 죽었던 그 여관.”
“죽어…?”
루시의 농담이 유난히 서늘하게 들렸다. 마치 진담이라도 되는 듯하다. 나는 헛웃음을 잠깐 흘렸다.
그리고 그게 진담이 맞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웃은 직후였다.
‘… 인생 X벌.’
우웅. 우우웅.
보랏빛으로 음산하게 빛나는 허리춤의 랜턴, 이자나미의 심장.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발동시켜 봤더니 작동이 된다.
죽은 것이다. 나도 모르는 새에 부활한 모양이다.
게다가 망자의 함이 발동되지 않은 걸 보면… 전생의 나는 그 중요한 걸 까먹을 정도로 급박한 상황이었던 게 틀림없다.
‘뭐지 대체.’
이쯤 되니 루시의 돌발행동에 딴지를 걸고 싶은 마음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대신 미칠 듯한 의문이 일었다.
그러나 내가 왜 시공회귀를 설백에게 밝혀야 하는지, 그 이유에 대한 의문이 아니다. 오히려….
‘… 대체 뭘 봤길래 저러는 거지?’
마왕은 대체 전생에서 무얼 본 것인가. 그게 궁금해졌다.
지금처럼 얼굴이 싸늘하게 굳은 루시는 그녀의 탄생 이래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얼마나 걸었을까. 우리는 거주지구 끝자락에 박힌 문제의 여관에 도착했다.
“그래. 여기로군.”
“약속의 쉼터?”
“맞다. 그런 이름이었다. 그만큼 반복하니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구나.”
“…….”
익숙하다 못해 징글징글하다는 어조였다.
마왕은 익숙하게 스윙도어를 열었고. 익숙한 행색으로 카운터에 가서, 익숙하게 403호의 열쇠를 받아들고 돌아왔다.
꼭… 여기서 몇 번이나 묵어본 경험이 있는 듯한, 숙련자의 행색이다.
나는 결국 참다 못해 물었다.
“… 이 여관이냐? 대체 나한테 보여줄 게 뭔데 그래.”
“내가 네놈에게 보여주는 게 아니다.”
“… 뭐?”
벌컥. 마왕은 여관의 출입문을 다시 여는 것과 동시에 나를 돌아봤다.
그녀의 싸늘한 눈빛이 폐부를 찌르고 들어오는 것 같았다.
“죽은 네가 지금의 네놈한테 보여줄 것이다. 왜 저 계집한테 모든 것을 밝혀야 하는지.”
“……!”
“뭐 하느냐. 어서 그 가증스런 사신 년들의 장난감을 사용하거라. 부활하면 항상 가장 먼저 하던 일 아니냐?”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루시의 시선이 내 허리춤의 이자나미의 심장에 가 있었다.
나는 랜턴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빛은 이미 눈이 멀 정도로 강렬해져 있었다.
이 여관 주변에 내 시체가 있다. 빛의 강도로 보건대… 100보 이내의 코앞이다.
‘… 찾았다.’
나는 주위를 슥 둘러보는 것으로 쉽게 사념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럴 수밖에.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가도 한복판에, 부랑자도 아닌 사람이 누워 있는 꼴은 너무 눈에 띄었으니까.
그것도 가슴 한 가운데가 뻥 뚫린 데다. 으깨진 자기 심장을 입에 물고 있으면… 당연히 금방 찾을 수 있지 않겠는가.
다른 사람들은 좋겠다. 저런 끔찍한 시체 몰골을 안 봐도 돼서.
“우욱 씹…!!”
나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하지만 직전에 멈췄다. 가까스로 멈출 수 있었다.
지나가는 행인들을 의식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내가 비명을 참아낸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저, 정용님? 안색이 많이 안 좋아요. 갑자기 왜 그러세요?”
“어, 어?”
설백이 아까부터 걱정스럽다는 양 나를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일까. 나 자신도 잘 이해가 안 되지만… 그녀에게 걱정끼지는 것이 굉장히 꺼림칙하게 느껴졌다. 전생의 내 시체를 보는 것 이상의, 이유 없는 메스꺼움이 몰려왔다.
결국 내가 공포를 삼켜내고 입을 열 수 있게 된 것은 30초 이상이 지난 후였다.
나는 덜덜 떨리는 입술을 간신히 움직여 말을 만들었다.
“…… 똥 마려워서.”
내가 생각해도 어색하기 짝이 없고. 또한 말도 안 되는 개소리였다.
그리고 설백의 구겨진 얼굴을 보아하니 그녀 또한 그렇게 생각하는 듯했다.
“정용님?”
“…….”
하지만 나는 그녀에게 그 이상 신경을 쓰지 못했다. 처참한 몰골로 나뒹구는 전생의 시체를 쳐다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아마 설백에게는 멍하니 땅을 쳐다보며 공포에 잠겨 있는 내가 보이겠지.
“에휴. 이봐 계집. 따라와라.”
내가 멍하니 전생의 내 시체를 쳐다보고 있으려니. 그 모습이 답답했는지 마왕이 덥석, 설백의 팔을 끌고 여관 쪽으로 다시 걸어갔다.
당연히 설백은 나와 루시를 번갈아 쳐다보며 당황의 탄성을 흘렸다.
“어, 아니. 하지만 지금 정용님이…!”
“똥 마렵다잖냐. 잠깐 해우소에서 해피타임 가지게 내버려 두거라. 우린 먼저 여관에 가서 쉬고 있으면 되는 게야.”
“루시 씨! 저런 말도 안 되는 말씀을 믿는다고요?!”
“똥싸고 나면 걱정 근심 다 털어내고 새사람이 돼서 찾아올 게다. 해우소가 괜히 해우소인줄 아느냐.”
“아니 지금 말장난 하고 있을 때가…!”
마지막 그 말은 설백이 아닌 내게 하는 말이었다.
전생의 일을 모두 깨닫고 새사람이 되면. 할 말을 정리해서 그 때 찾아와라. 대충 그런 의미겠지.
흘깃 나를 돌아보는 루시에게 고개를 끄덕여줬다. 그녀는 같잖다는 양 피식 웃더니 설백을 끌고 유유히 여관으로 들어갔다.
“후우….”
나는 시체 앞에 서서 잠시 심호흡을 했다.
전생의 기억을 되돌리기가 이렇게 꺼려졌던 적이 또 있었을까. 아니 없었을 거다.
하지만 알아야 한다. 대체 뭔 일이 있었길래 이런 꼬라지가 돼서 내 심장에 키스를 하고 있는 건지. 나는 그걸 알아야 할 의무가 있다.
‘까짓 거. 한 번 죽지 두 번 죽냐!’
나는 눈에 바짝 힘을 준 뒤. 기세를 몰아 랜턴을 시체에 갖다댔다.
버서석. 길가에 쓰레기처럼 널브러졌던 시체가 바스라지며 고운 입자가 되어 하늘로 날아갔다.
동시에 나는….
“으, 으아아아악!!!”
처음으로 고통이 아닌 공포로 인해 비명을 지르며, 쏟아지는 기억의 격류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나는 한 번 죽지도 두 번 죽지도 않았고. 여기서만 지금 34번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