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지금 타이밍에 신호탄을 보낸다? 누구에게 보내는 거지?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내 생각을 읽듯이 제논이 선수를 쳤다.
“그래도 이 세상의 얼마 안 되는 구면이니. 저승길 선물로 좋은 걸 가르쳐주지.”
그 목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온다. 나는 깜짝 놀라서 퍼뜩 주위를 살펴봤고.
직후 눈을 부릅떴다.
“이건 또 뭐야…!”
제논이 수십명이다.
사방팔방에서 거적때기를 펄럭이는 제논이 나를 둘러싼 채 즐겁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먹물대가리. 내가 불사의 마왕에게 저주를 시도했던 건… 다름 아닌 네놈과의 연결을 끊기 위해서다.”
“… 뭐라고?”
“불사의 마왕에 대한 정보는 너무나 적다. 비록 지금 약체화 된 것으로 추측되나… 어떤 변수가 있을지 알 수 없지. 그러니 마왕의 계약자인 네놈과의 단절을 꾀한 것이다.”
뒤통수가 해머로 맞은 듯이 얼얼하다. 목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했다.
‘… 이 X발. 그런 거였냐?’
제논. 저놈의 역할은 딱 거기까지인 것이다.
마왕에게 저주를 걸어 잠에 빠뜨린다. 그것으로 불사의 마왕이 나와 상호작용한다는 변수를 사전에 차단한다. 그걸 위한 장기짝에 불과하다.
그렇게 변수를 차단하는 이유는 하나뿐이지.
마왕이 잠들고. 그 뒤에 일어나는 일이 뭐가 있겠는가.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서, 설백!”
폭발. 새하얀 폭발이 일어난다.
방금 그건 폭발을 일으키라는 신호탄이 분명하다.
제논은 폭발을 일으킨 장본인이 아니다.
폭발과 마왕에게 걸린 저주는 별개의 인물이 일으킨 사건이다!
‘이런 망할… 이대로는!’
결국 우려하던 일이 벌어지고 마는 건가?
안 돼. 루시를 지켜야 한다. 루시가 죽으면 모두 끝장이다. 빨리 설백에게 루시를 지키라고 부탁해야 한다.
루시와 내가 동시에 죽으면 나는 더 이상 부활을 할 수 없어!
이번엔 헛다리를 짚었지만, 루시만 살아있으면. 그러면 기회는 언젠간 온다!
나는 애써 희망적인 생각을 하며 허겁지겁 케른을 향해 달렸고.
“어딜 그리 급하게 가지?”
등 뒤에서 싸늘한 목소리와 함께 푸욱. 익숙한 감각이 등줄기를 화끈하게 치달렸다.
“컥.”
순간 눈앞이 아찔해졌다. 시간이 느리게 가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그런 와중에 조소를 머금은 제논의 한마디가 귓전을 때렸다.
“나를 잊으면 곤란하지.”
“… 쿨럭.”
후두둑. 가슴 깊은 곳에서 기침이 터졌다. 핏줄기가 쏟아졌다.
나는 멍하니 복부를 내려다봤다. 단검의 끝자락이 내 배꼽을 뚫고 삐죽 솟아 있었다.
“크, 으….”
비틀거리며 가까스로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지척까지 접근한 제논의 모습이 보였다.
놈은 손에 묻은 피를 거적 소매에 문지르며 한숨을 흘렸다.
“이러나 저러나 너는 죽는다. 얌전히 여기서 최후를 맞아라.”
“… 하.”
힘아리없는 웃음이 새어나왔다.
나는 복부를 관통한 단검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여유로운 행색의 제논에게 고개를 돌렸다.
“너. 대체 내가…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그런 짓을 하는 거냐.”
복잡한 감정을 담아 날린 질문이었다.
반쯤은 정말 궁금해서 물어본 거고. 반쯤은 그냥 억울하고 치사해서 짜증을 부린 것이다.
어차피 저 짬뽕대가리가 제대로 대답해줄 거라곤 생각하지도 않았으니까.
“… 네게 딱히 악감정은 없어. 나는 그저 의뢰를 받고 행동했을 뿐이다.”
하지만 제논은 생각보다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어깨를 눈에 띄게 움찔거리더니. 내 시선을 피하며 변명하듯 대답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와서 죄책감이라도 느끼는 건가. 지랄 나셨군. 나는 피식 조소했다.
“의뢰 대상이 어쩌다보니 구면인 네놈이었을 뿐이다. 먹물대가리.”
“그래. 한 마디로 넌 잔챙이니까 아는 거 없고. 윗대가리한테 따져라 이거냐?”
“… 입은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내가 비아냥거리자 제논은 순간 눈썹을 움찔거렸지만. 그 이상의 반응은 보여주지 않았다.
마무리를 지으려는 듯이 내게 천천히 다가온다.
“시험의 장막 때부터 특이한 놈이라곤 생각했지만… 그놈들의 표적이 될 정도로 눈에 띄는 놈일 줄은 몰랐다.”
“…….”
“다음 생엔 좀 조용히 사는 법을 익혀보는 게 어때.”
네가 다음 생을 겪어본 적이나 있냐? 어디 내 앞에서 다음 생을 논해.
한 마디 해주려다 배가 욱신거려서 참았다. 격통으로 머리가 멍하다.
시뻘겋게 젖어가는 복부를 보다가 문득, 나는 말했다.
“네 동생은 네가 이러고 사는 거 아냐?”
단 한마디.
제논의 얼굴에서 여유를 싹 빼버리는 데는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단박에 험상궂은 말투가 제논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닥쳐. 아무것도 모르면서 제나를 입에 담지 마라.”
“그래. 아무것도 모르지. 나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 죽이고 등쳐먹어서 배때지 채웠다는 걸 알면. 네 동생이 좋아 죽겠다. 오빠 나 죽어어~!”
그 외에도 비아냥댈 말을 팔만대장경 뺨치게 준비해 놨지만.
다음 말은 내뱉지 못했다.
“굳이 명을 재촉하는군. 버러지 같은 새끼가.”
놈이 내 배에서 단검을 뽑아버리더니, 그대로 턱주가리에 다시 꽂아넣은 것이다.
퍼걱. 아래턱이 박살나는 소리와 함께 정신이 혼미해지는 격통이 쏟아진다.
“크, 하아아아악!!!”
혓바닥을 뚫고, 아래턱으로 단검의 날붙이가 삐져나온다. 이빨과 잇몸이 박살나 너덜거렸다. 내가 내지른 비명이 턱의 구멍으로 새는 것이 느껴진다.
고통 이상의 공포심이 노도처럼 밀려왔다. 동시에 나는 생각했다.
‘옘병… 썩을…! 대, 대체 어떻게!’
이건 말도 안 된다.
내가 지금 처한 상황 때문에 억지를 부리는 게 아니다. 이건 정말, 이 세상의 법칙적으로 말이 안 된다.
이 세상에서 수십의 레벨차이는 절대적인 차이다. 제논은 일개 단검으로는 원래 내 몸에 기스조차 내지 못해야 정상이다.
하지만 대체 이건 뭐냐.
왜 나는 지금 바닥을 뒹굴고 있지?
대체 왜 내 턱주가리에 숨구멍이 뚫렸지?
‘모른다.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아…!’
33번이나 죽었는데도 이 꼴이다.
그러면 내가 진상을 알아내려면. 살아남으려면. 대체 얼마나 더 죽어야 한다는 거냐.
그런 생각을 하자 아파 죽겠는 와중에도 클클거리며 웃음소리가 새어나갔다.
“… 시작됐군.”
문득, 제논이 그런 말을 중얼거렸다.
나는 흔들리는 눈을 들어 제논의 시선을 따라갔다. 그리고 목격했다.
새하얀 빛이 하늘 저편에서 천천히, 이쪽을 향해 쏟아지고 있었다.
‘끝났다.’
전생에서 모든 걸 아작냈던 그 폭발이다. 그것을 깨닫자 체념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털퍼덕. 나는 그 자리에 쓰러졌다. 멍하니 땅을 보며 천천히 주변이 밝아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자니 제논이 혼자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죽음으로 케른은 지도에서 사라지겠지만… 뭐, 내가 알 바가 아니지.”
터벅터벅. 발소리가 천천히 멀어진다.
동시에 들뜬 기색이 역력한 제논의 목소리도 천천히 멀어졌다.
“기다려 제나. 이번 일만 끝나면. 이 지긋지긋한 생활도 끝이야. 아무도 우릴 건드리지 못해….”
그리고 일시에 적막이 찾아왔다. 발소리조차 어느 순간 사라졌다.
의아함에 고개를 들어보니, 제논의 모습이 씻은 듯이 사라져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신출귀몰하기 짝이 없군. 설마 지금까지 전부 환영이었고, 나는 혼자 허공에 삽질을 하고 있었던 건가?
‘… 아니.’
그렇지 않다는 건 여기저기 펑크난 내 몸이 증명하고 있고.
그렇다면 아무래도… 제논의 능력에 대한 전제 자체가 틀렸던 걸지도 모른다.
‘순간이동인가?’
제논은 소위 말하는 블링크나 텔레포트 같은 걸 사용할 줄 아는 것이다.
맹점이었다. 따지고 보면 내가 눈으로 쫓지 못하게 움직일 방법은 순간이동 외에는 없다.
내가 쉽사리 이것을 떠올리지 못한 건 이유가 있다. 이 세상에서 공간이나 시간을 다루는 마법은, 변경백 급의 대마법사라도 힘들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것 때문에 변경백은 나대신 죽기까지 했는데….’
남아 있는 전생의 기억 중에서도 아주 강렬하게 박혀있는 기억. 변경백이 언데드 적진의 한 가운데서, 하나뿐인 공간이동 룬을 사용해 나를 피신시켰던 때를 똑똑히 기억한다.
공간이동이 방금 제논처럼 밥 처먹듯 사용할 수 있는 거라면. 그런 눈물겨운 장면은 애초에 나올 건덕지도 없었다.
그래. 꼴에 너도 나름 베테랑 용사라 그거지.
비장의 수 한두 개 정도는 가지고 있는 거군.
“크으… 죽겠다. 진짜로.”
이를 악물고 몸을 비틀었다.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느낌이다.
출혈이 너무 많아서인가.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멍한 머리로는 여러 가지 생각들이 강렬하게 맴돌고 있었다.
‘… 아하.’
그리고 어느 순간. 사고가 우뚝 정지했다.
위화감. 가슴 속을 간질이던 위화감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여동생은 집에 있는 거군.’
제논의 여동생. 제나는 그 새하얀 폭발이 일어나는 시기에 우리와 같이 케른에 있었다.
저번 생에는 거의 죽기 직전까지 제나와 같이 있어서 확실히 기억한다.
그런데. 저 시스콘 짬뽕 대가리가 얌전히 자기 동생이 폭발에 휘말리게 방관한다고?
아니야. 그럴 리가 없다.
놈이 지금 사라진 건, 여동생을 데리고 텔레포트해서 케른을 탈출하기 위함이다.
“이, 이대로….”
나는 점차 밝아지는 케른 쪽의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다 죽어가는 손을 가까스로 움직여 가방을 뒤졌다. 이내 무언가 익숙한 그립감이 딸려나온다.
병이었다. 새파랗게 빛나는 에테르 병.
나는 망설임없이 그것을 입으로 갖다 대었고. 온몸에서 새파란 기운이 감도는 찰나.
“이대로 끝낼… 수는….”
하지만 거기까지. 까마득한 추락감이 온몸을 휘감는다.
나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