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월척이구나
속으로 씨근거리는 한편. 나는 제나에게 물었다.
이제 분위기는 거의 제논의 청문회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제논은 평소엔 몇 시쯤에 귀가하지?”
“… 늦어도 자정까진 들어왔어요. 지금쯤이면 원래 들어왔을 시간이죠.”
“그런데 오늘은?”
“오늘은… 새벽에 중요한 일이 있어서 늦을 거라고. 내일 아침에 올 거니까 먼저 자라고….”
“어디로 뭘 하러 가는지는 모르고?”
“네… 죄송해요.”
하필이면 오늘. 새벽에 중요한 일이라.
이쯤 되면 거의 확정이다. 관련이 없으면 그게 더 이상할 정도다.
나는 곧장 펜과 종이, 그리고 망자의 함을 꺼내들어 휘갈기기 시작했다.
[쫓는 놈의 이름은 제논. 슬럼가 3번 골목 8번째 판잣집에 거주.]
[네 죽음과 관련이 있다. 무조건 찾아가라.]
됐다. 드디어 실마리가 조금씩 풀려나간다.
나는 회심의 미소를 띄웠다.
‘하지만… 이번은 여기까지인가.’
나는 주머니를 뒤져 성녀의 문장을 꺼냈다.
눈부신 빛을 발하고 있는 문장. 그러나 자정 때의 빛보다는 확실히 바래 있었다.
이게 내 눈으로 느껴질 정도면… 이미 자정에서 꽤 많은 시간이 지났다는 소리다.
“난 그만 가볼게. 고마웠다 제나.”
“아, 네. 저도…!”
“넌 천천히 음식 다 먹고 돌아가. 조심히 가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서둘러 돌아갈 채비를 했다.
제나는 퍼뜩 올려다보며 나를 따라 일어나려 했지만, 내가 만류했다. 내 나름의 배려였다.
그 대신. 무심결에 그녀에게 묻고 말았다.
“만약에 말이다.”
“네?”
“네 오빠가 오늘부로 갑자기 사라지면… 어떻게 할 거냐?”
“그, 그런 말씀을 왜….”
처음엔 날 뚫어지게 쳐다보던 제나.
그녀는 내가 나름 진지하게 물어봤다는 걸 깨닫고는,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상상도 하기 싫다는 듯이 몸서리를 쳤다.
“저는… 그러면… 이 세상에서… 더 이상 살아갈 자신이 없어요….”
이번엔 내가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리고 그 말이 거짓 하나 없는 진심이라는 걸 깨닫고는, 아무 말 없이 등 돌려 걸어갔다.
아, 하는 탄성과 함께 제나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 음식 감사했습니다. 오빠.”
“나도 오빠라고 불러줘서 고맙다.”
“… 아하하.”
나는 농담이나 한 마디 던져주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입 안이 유난히 쓰다. 나는 번쩍거리는 엠블렘을 손가락으로 돌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 물어보지 말 걸 그랬네.’
만약 제논이 내 죽음과 관련이 있다면. 나는 높은 확률로 그놈과 싸운다.
경우에 따라선 죽일 수도 있다. 케른상연회 살수를 찌를 때가 퍼뜩 떠오른다.
여러 모로 손해만 본 질문이었군.
나는 뼛속 깊이 후회하며, 뛰다시피 여관으로 돌아갔다.
* * *
“눈깔 똑바로 뜨고 있어라. 아직 안 졸리지?”
“지금 그거만 몇 번째 물어보는 게냐… 안 졸리다니까 그러네.”
나와 루시는 내 방 침대에 걸터앉아 기다리는 중이었다.
“눈 감기는 거 같은데?”
“아니라니까.”
뭘 기다리냐고 묻는다면. 내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
정확히는 내가 죽는 원인이 다가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야. 조냐?”
“졸긴… 누가….”
그런데 불사의 마왕 루시. 이 쐉년이 아까부터 자꾸 옆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다.
33번째 오늘을 맞이해 놓고도 아직 정신을 못 차린 모양이다.
그래서 나는 쿨타임 찼다 싶을 때마다 계속 그녀에게 말을 거는 중이다.
“불사의 마왕님. 근무 투입하셔야 합니다.”
“아갸악!”
내가 귓가에 속삭이자 등을 퍼뜩 세우는 루시. 경기를 일으키며 귀를 비비는가 싶더니.
퍽, 퍼억. 얼굴을 슬쩍 붉히며 내 면상을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소, 소름 돋는 짓거리 하지 마라! 왠지 멘트도 엄청 불쾌하다!!”
“듣기 싫으면 졸지를 마시던가.”
나는 짜증도 풀고 잠도 깨울 겸 그녀의 볼을 한 번 주욱 잡아당겨봤다.
음. 언제나 생각하는 거지만 정말 중독성 있는 볼이란 말이야. 어떻게 이렇게 찰지고 말랑말랑하지? 마왕들은 다 이런가?
“아, 아아아! 미, 미안! 아, 안조께! 안 존다! 그만 당겨!!”
“그래. 이젠 졸지 마라.”
“으으… 아, 아프다….”
나는 눈물을 찔끔 흘리는 루시를 지켜보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고 침대에 누워버렸다.
누워서 가만히 천장을 보고 있으니 여러 생각이 치고 들어온다.
그 중에서도 가장 먼저 치고 들어오는 생각은….
‘… 무력하다.’
압도적인 무력감이었다.
나는 분명히 강해졌다. 웬만한 용사들은 물론이고, 마왕들도 손도 못댈 정도로 강해졌다.
하지만 지금 내 꼬라지를 봐라. 아무 것도 못한 채, 얌전히 손가락 빨면서 내 죽을 때만 기다리고 있다.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그게 분하다. 힘이 빠진다.
그리고, 엄청나게 화가 난다.
“다 박살내 주지.”
나는 혼자 중2병 환자마냥 중얼거렸다.
나를 이 꼬라지로 만드는 수수께끼의 죽음. 그걸 만들어내는 수수께끼의 단체. 아니면 내가 죽을 운명 그 자체. 뭐든 상관없다.
내 죽음의 원인이 사람이라면 놈의 사지를 분해해 버릴 거고. 어떤 단체라면 공중분해 시켜주겠다.
이 세상 전체가 내 죽음을 바란다면. 이 세상을 박살내 주겠다.
―자네는 아신의 편인가? 아니면 마왕의 편인가?
문득 아까 히크가 내게 했던 질문이 떠오른다. 어느새 또 졸고 있는 마왕을 무심결에 쳐다봤다.
똥털의 편이냐, 아님 루시의 편이냐고? 당연히 난 둘 중 어느 편도 아니다.
나는 이기는 편이 좋다. 그래서 나는 누구의 편도 아니고, 내 편이다.
나는 죽지 않으니까. 내가 무조건 이기는 편이니까.
이번에도 이겨주겠다. 상대가 누구든.
‘궁상은 이쯤 하고.’
나는 상체를 벌떡 일으켜 루시에게 손을 뻗었다.
쭈우우욱. 루시의 볼을 있는 힘껏 잡아당기며 한숨 섞인 말을 늘어놨다.
“안 존다고 한지 이제 5분 지났다. 양심이 좀 있어 봐라 인마.”
“… 우웅….”
하지만 아무리 당겨도 마왕이 일어날 생각을 않는다.
나는 눈썹을 튕기며 반대쪽도 잡아당겼다. 쭉쭉 늘렸다가, 한 바퀴 돌린다. 얼굴을 마구 뭉갰다. 운전하듯이 상하좌우로 돌려봤다.
“음냐… 헤, 머저리 용사… 히히.”
하지만.
꿈속에서까지 나를 욕하며 루시는 세상모르게 자고 있을뿐이다.
순간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는 느낌이 몰려왔다.
“설마.”
나는 온몸이 굳어버렸고. 손에 힘이 풀린 나머지 그녀의 볼을 놓았다.
풀썩. 끈 떨어진 인형처럼 루시가 침대로 엎어져 버렸다.
자고 있다. 루시가 그 사이에 누군가에게 재워졌다.
‘… 어떻게?’
하지만 대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지.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을 텐데.
내가 그녀를 옆에 둔 건 감시의 목적도 있었다. 당연히 강제로 재우기 위해선 그녀에게 모종의 접촉이 있어야 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게 아니면… 그래. 저주. 마법.’
원거리에서 강제로 재우는 마법 같은 게 있나? 있어도 이상할 건 없다.
하지만 그걸 지금 당장 루시에게 사용하는 건 불가능하다. 마법의 권위자인 할센베르크 변경백이 내게 말해준 적이 있다.
―소위 말하는 디버프. 즉 저주 계열 마법은 범용성이 뛰어난 것이 가장 큰 장점이네. 하지만 치명적인 단점이 있지.
그가 말한 단점이라 함은, 술자의 시야 안에 대상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
그게 아니면 최소한 전에 한 번이라도 접촉하여 대상의 생체마력 정보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접촉… 접촉?’
그리고 난 그제야 깨달았다.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래. 접촉.”
오늘 하루동안 우리를 제외하고, 루시가 접촉했던 유일한 사람.
그 아무 의미도 없는 것 같았던 어깨빵의 의미.
그것을 드디어 깨달았다.
“그 개새끼…!”
다음에 만나기만 해봐라.
사지를 레고마냥 분질러줄 거다… 다음 생의 내가!
이를 악물고 욕지기를 씨근거리는 그 순간.
화악, 하고 바깥이 일순간 밝아지는 것을 느꼈다.
나도 모르게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눈을 크게 떴다.
“저게… 대체….”
그 순간. 내가 왜 그랬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33번이나 반복하며 경험한 것들이 뇌가 아닌, 육체에 새겨진 건지도 모른다.
나는 마왕을 들쳐업고 곧장 설백의 방으로 뛰쳐나갔다.
“설배애애액!!!”
이번엔 그야말로 버저비터였다.
설백이 마왕에게 아란을 붙여주자마자, 하얀 폭발이 덮쳐왔다.
* * *
[불사의 회귀점이 갱신되었다.]
[일시 - 대륙력 1108년, 1월 12일, 오전 11시 30분]
[장소 - 마르크트레스. 약속의 평원 상부지역, 소도시 케른 거주 지구]
“잠깐! 거기 서!!”
패널이 뒤늦게 등장하고 나서야, 나는 눈을 부릅뜨며 붉은 머리의 부랑자를 쫓았다.
부랑자는 내쪽을 슬쩍 돌아보나 싶더니 이내 으슥한 골목 쪽으로 진입했다.
나는 혀를 차며 곧장 놈의 뒤를 따라가려 했다. 하지만.
[명칭: 망자의 함]
[알림: 아이템 갱신 - 전생에서 망자의 함 저장 아이템이 갱신되었다.]
그 패널이 내 눈앞을 가려서 따라갈 수가 없었다.
나는 순간 숨을 삼켰고. 홀린 듯이 망자의 함으로 손을 가져갔다.
뽈칵. 망자의 함을 열고 내용물을 가만히 쳐다봤다.
[방금 너 치고 간 사람, 세스나다.]
“아니 X발 뭐가 어째?!!”
그런 쪽지가 하나 들어있었다.
벼락 맞은 듯한 전율이 일었다. 붉은 머리색을 분명히 봤지만. 그에 대해서도 깊게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다.
나는 곧장 행동했다.
‘미미르의 눈!!’
골목 끝으로 거적때기의 부랑자가 사라지기 직전. 나는 놈을 노려보며 스킬을 발동했다.
스르륵. 패널이 시야맡을 차지한다. 나는 황급히 거기로 시선을 돌렸고.
[명칭: 제논]
[별칭: 163400157번째 정식 용사. 갈란 숲의 여섯 번째 아들. 지존]
[LV. 137]
[체력: 1010/1010 마력: 770/770 신체상태: 정상]
[힘: 129 민첩: 144 지능: 101 히어로 센스: 11]
“… 하다하다 나한테까지 속네 X벌….”
잔뜩 실망한 나머지, 전생의 나에게 욕을 한사발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