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사실 불안했던 요소 중 하나가, 바로 일행들의 정확한 소재다.
달리 소식을 구할 길이 없으니 망자의 계곡으로 가지만. 내가 그들과 헤어진지도 벌써 3개월이 가까워 간다.
‘당연히 그동안 일행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을 거고.’
누군가는 시험을 통과해서 나왔을 거다. 아니면 설백처럼 통과 못한 채로 탈출했을 수도 있다. 딱히 패널티가 부과되는 것은 아니니까.
사실 시간이 이만큼이나 지났으면, 오히려 망자의 계곡에서 죽치고 있을 가능성이 더 적다고 봐야 한다.
“그래서. 지금은 어디에 있어?”
“아마… 개구리 아저씨랑 난쟁이 할아버지는 계속 망자의 계곡에서 있을 거예요.”
“…… 음?”
이건 좀 예상 못한 소리다.
나는 눈썹을 튕기며 반문했고. 제나는 두려운 기색으로 몸을 움츠리며 말했다.
“저랑 오빠가 그 지옥을 탈출할 때까지… 두 사람은 아직 시험에 도전 중이었으니까요.”
“그래…?”
방금 ‘지옥’이라는 단어와 ‘탈출’이라는 단어를 들은 것 같은데.
지옥이라. 하긴 그곳이 할센베르크를 제외하면 제일 난이도가 빡센 시험의 장이다. 당연한 걸 수도 있다.
아니지. 할센베르크는 사실상 규격 외 시험장이니, 현 시험장 중 난이도는 원탑이겠군.
‘… 설마 그럼. 아직도 거기서 빌빌대고 있단 말이야?’
나는 황당한 나머지 다급하게 물었다.
“… 너희가 거길 탈출한 게 언젠데?”
“아직 한 달도 되지 않았어요.”
“너희는 시험에 통과했고?”
“오빠는 간신히 시험에 통과했지만… 제가 통과하지 못했어요. 오히려 죽기 직전에 오빠가 구해줘서 그대로 그곳을 빠져나왔죠.”
“흐음.”
가장 난이도가 빡센 시험장을 통과했다니. 얘의 오빠도 나름 한 따까리 하는 듯하다.
… 어쩌면 지킬 사람이 있어서 초인적인 힘이 나오는 걸지도 모르지. 의기소침한 제나의 행색을 가만히 쳐다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 음?”
그러다 어느 순간.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 퍼뜩 제나에게 질문했다.
“스칼로랑 알드콘만? 그럼 세스나… 물색 머리 여자는? 걔는 어디 있는데.”
“그, 그분은 아마 마르크트레스에 있을 거예요.”
“그게 정말이야?! 어디! 지금 어디에 있는데!!”
쾅! 나도 모르게 흥분해서 식탁을 후려쳤다.
제나가 겁을 집어먹고 히익, 하는 비명을 흘렸다. 그녀가 고개를 마구 끄덕이며 울먹이는 목소리를 가까스로 뽑아냈다.
“네, 넷! 그, 그 착한 언니는 일찌감치 시험 통과해서 마르크트레스로 온다고 했어요! 저, 저도 그렇게만 들어서 자세한 건 몰라요!”
“그, 그래. 안 잡아먹으니까 너무 쫄진 말고.”
“네에….”
내 말에 훌쩍거리던 제나의 눈가가 조금 풀어졌다. 그제야 나도 복잡한 한숨을 쉬었다.
얼마 안 되는 이세계 지인이 가까이 있다고 생각하니 좀 흥분하고 말았다.
“아. 근데, 이런 말도 했어요.”
복잡한 머리를 박박 긁고 있자니. 문득 제나가 그렇게 말문을 텄다.
저 눈빛과 표정.
뭔가 알고 있군.
나는 제나에게 진상을 종용하는 시선을 던졌고.
잠깐 고민에 빠졌던 제나가 이내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그 언니가 심각한 표정으로 그랬어요. 자기는 이 세상에서 꼭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고….”
“… 해야만 할 일?”
심상치 않은 행색이다. 그 팔자 좋은 여자가 심각하게 해야하는 일? 상상도 되지 않는다.
나도 모르게 최악의 상황을 상정하고 있던 그 순간. 천천히 제나의 입이 열렸다.
“요리를 배우러 수행을 떠난대요.”
“…… 뭐요?”
“수도인 크로스페이드에는 맛있는 진미가 많기로 유명하거든요.”
“…….”
“망자의 계곡 담당 아신한테 그 얘기를 듣자마자… 마르크트레스로 간다고 했어요.”
아니 X발 잠깐만.
내 귀가 이상한 거야? 저게 대체 무슨 개소리야.
마르크트레스로 갈 수는 있다. 어차피 그 나라에서 갈 수 있는 국가는 마르크트레스와 용제국, 둘 중 하나니까.
그런데 그 뒤에 나온 말이 문제다.
묻고 싶은 게 한 두 개가 아니라 뭐부터 질문해야할지가 막막할 정도다.
현기증이 난 나머지 이마를 짚으며 물었다.
“… 요리? 요리를 갑자기 왜 배워. 요즘 용사는 요리도 교양필수 과목인가?”
“그, 그게… 저는 오히려 오빠가 더 잘 알 줄 알았는데.”
이건 또 뭔 소리야.
오늘은 내 인생의 도전 골든벨 특집이냐? 왜 만나는 사람들마다 나랑 퀴즈쇼를 해대냐고.
나는 갑갑한 마음에 언성을 좀 높였다.
“내가 뭘 어떻게 알아! 시험의 장막 이후로 걔랑 만난 적도 없는데!”
“바로 그 시험의 장막에서 오빠랑 약속했다고 했어요.”
“… 어?”
“오빠한테 맛있는 요리를 대접해주기로 했다고 들었어요. 검은 머리의 평범하게 생긴 남자면… 오빠 아닌가요?”
“…….”
“그 언니는 오빠 얘기를 할 때면 항상 웃곤 했어요. 오빠가 부러워질 정도였어요.”
앗. 아아.
나는 이마를 싸짚었다.
드디어 이야기의 전말이 모두 가늠되었기 때문이다.
‘… 이런 미친. 그 농담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고?’
―요리 배워둬. 나중에 밥 푸짐하게 차려줘라. 여기서 받은 만큼.
머리맡에서 울리는 목소리는 다름 아닌 내 목소리다.
내가 세스나를 게이트로 밀면서, 농담처럼 내뱉었던 말이다.
‘이 미련하고 솔직하고 정직하고 농담을 모르는 로봇 같으니.’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관용구라는 게 있다.
오랜만에 만난 어색한 친구와 헤어질 때. ‘언제 밥 한 끼 하자!’라고 말하는 게 국룰이지만. 다시 만나서 밥 한 끼 하는 경우는 절대 없단 말이다.
그냥 그렇게 말하기로 정해진 클리셰라고.
“골 빠개지네….”
나는 천근 같은 한숨을 내쉬며 그렇게 한 마디 중얼거렸다.
‘후우. 진정하자.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한참 후에야 나는 가까스로 충격을 가다듬었다.
정리하고 나니, 새삼 내가 여기에서 붉은 머리 엘프 소녀와 대화하고 있던 본래 목적이 떠올랐다.
“흐흠.”
나는 분위기를 정돈하기 위해 헛기침을 했고. 제나는 남은 음식을 깨작이다가 내게 흘깃 시선을 던졌다.
“좋아 제나. 오빠는 지금 어디 있지?”
“그… 이, 일을 나가서 아직… 안 들어왔어요.”
“일? 어떤.”
“그건….”
제나의 말꼬리가 흐려진다. 그리고 다시금 얼굴에 그늘이 졌다.
설마 또 우는 건가. 그런 생각에 아찔해지려는 찰나.
제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저도 모르겠어요. 오빠는… 여기에 온 이후로 자기 일을 잘 말해주질 않아요.”
“흐음.”
뒤가 구린 일하는군.
저 반응만 봐도 대충 내막까지 줄줄이 꿰일 정도다. 각이 너무 예뻐서 더 물어볼 필요도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제나의 오빠가 내가 찾는 그 남자일 가능성이 더욱 짙어졌다. 이건 좋은 징조다.
제나의 오빠는 흑화했다. 그걸 기정사실로 깔아둔 채 다음 질문을 떠올렸다.
“좋아 제나. 너희 오빠… 잠깐만.”
오빠의 이름이 생각 안 나는군. 분명 리스트에 있던 게 오빠의 이름일 테지?
나는 탁자 밑으로 손을 뻗어 리스트를 흘깃 훔쳐봤다.
[32. 제논 - 슬럼가 3번 골목 8번째 판잣집. 동생과 함께 거주.]
이름이 제논이었군.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질문을 이어나갔다.
“그래. 제논. 걔가 요즘 이상한 점 같은 건 없었냐?”
“이상한… 점이요? 어떤 식으로요?”
“어떤 식이든. 뭐라도 좋으니 말해줘.”
“이상한 점이라면… 아.”
생각에 잠겼던 제나가 곧 퍼뜩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나와 눈이 마주치더니 흘깃 시선을 피하며 입을 다문다.
뭔가 생각났군. 하지만 그걸 나한테 말해도 될지 고민하는 듯하다.
‘그렇다는 건. 중요한 정보라는 소리지.’
내가 원했던 게 바로 그런 정보라고.
남이 들어도 될까? 싶은 켕기는 정보 말이다.
슬쩍 입꼬리를 올리길 잠시. 나는 얼굴을 최대한 굳히고 슬픈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부탁이야 제나. 사람의 목숨이 걸린 일이야.”
나는 제나에게 상체를 뻗고, 두 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녀는 순간 몸을 움츠렸지만. 내 절박한 얼굴을 보더니 서서히 눈에서 힘이 풀렸다. 내 눈빛에서 진심을 읽은 것이다.
점점 벌어지는 그녀의 입은 떨리고 있었다.
“모, 목숨… 이요?”
“그래. 나의 소중한 사람이 위험해. 그러니까 가르쳐주지 않을래?”
“그, 으… 하, 하지만… 오빠가 얘기하지 말라고….”
“정말 소중한 사람이야. 너한테 네 오빠가 소중한 것처럼.”
“… 으으.”
거짓말은 안 했다. 나는 나 자신이 누구보다 소중하니까.
표정이 불쌍했던 건지, 오빠까지 들먹인 약팔이가 잘 먹힌 건지. 내 똥꼬쇼는 곧 빛을 발했다.
한참을 고민하던 제나가 이내 체념하듯 눈을 질끈 감은 것이다.
“사, 사실은… 요즘 들어 오빠가 돈을 많이 벌어오기 시작했어요. 엄청 많이요.”
“돈을 엄청 많이 벌어온다고?”
“네. 믿을만한 거래처가 생겼다면서….”
“거래처라….”
“이, 이번 일만 잘 되면… 판자촌을 나와서 당당하게 집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저한테 그랬어요.”
그 대사는 떡밥을 풀다 못해 완전히 답안지 수준인데.
얼굴도 잘 기억 안 나는 제논아. 너 지금 정황증거가 너무 수상하다.
아무리 고쳐 생각해도 그 거래처가 내 죽음이랑 관련이 있을 것 같은데.
‘대체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거니, 이 X발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