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뜻밖의 재회
“이 X발! 이렇게 운이 없을 수가 있냐!”
31번째 리스트까지 허탕을 친 뒤. 나는 맨땅에 샷건을 갈겼다.
아니 해도해도 너무하잖아. 35명 중에 31명을 조사했다. 첫 번째에 나오는 건 바라지도 않았지만 최소한 30번 안에는 나올 수 있잖아?
정녕 날 한 번이라도 더 죽여야 속이 시원하냐, 이 개같은 이세계야.
‘사실상 이번이 마지막이다.’
32번째 도전. 성녀의 문장의 밝기로 봤을 때, 가장 밝아지는 12시가 얼마 남지 않았다.
이번에 허탕이면 이번 생의 내게 주어진 시간은 끝이다. 여관으로 돌아가야 한다.
‘만약 그놈을 못 찾으면….’
다음생의 내가 수색을 이어가도록 망자의 함에 유언을 남겨야 하겠지.
하지만. 과연 다음 생의 나는… 이번생의 나처럼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일까?
아니. 아닐 가능성이 높다.
‘지금 내가 그러니까.’
지금도 솔직히 죽고 싶지 않다.
존나게 살고 싶다. 다음 생의 나따위 솔직히 알 게 뭐야. 왜 다음 생의 나를 위해 이번 생의 내가 희생해야 돼. 그런 생각이 지금도 틈만 나면 든다.
그러니 다음 생의 나도… 이렇게 필사적으로 살고 싶을 거다.
‘제발 맞아라.’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32번째 리스트의 거주지 앞에 도착했다.
나는 쓰러져가는 판잣집의 앞에서 마음의 준비를 마친 뒤. 천천히 문을 두들겼다.
똑똑. 노크가 울리고 잠시 침묵. 이내 문이 삐거덕거리며 조심스럽게 열렸다.
“누, 누구세요…?”
이런 제길.
아직 얼굴도 보지 못했지만. 목소리가 들린 순간 어깨에서 힘이 빠져버렸다.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가 리스트가 조금 구겨졌다.
‘여자잖아.’
부딪쳤던 그 부랑자는 절대 여자가 아니었다.
체격부터 시작해서, 부딪쳤던 순간 잠깐 들렸던 목소리도 기억한다. 남자였다.
백번 양보해서 남자 같은 목소리를 가진 여자였다고 해도. 적어도 지금 들린 이 목소리는 아니다.
‘… 실패인가.’
맥이 풀린 나는 곧장 돌아갈 준비부터 했다.
지금의 기억이 유지되지 않으면. 나는 분명 살기 위해 또 최선의 선택을 한다.
즉 이 도시에서 주저없이 도망친다.
그래서 기억의 유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다른 건 몰라도 잔류사념은 최대한 빨리 회복할 수 있도록, 여관으로 돌아가서 죽어야 한다.
‘그래. 멘트나 좀 생각해 보자.’
회귀한 내가 망자의 함을 확인한 직후. 놈이 시야에서 사라지기까지 아주 찰나의 틈은 있다.
다음 생의 나한테 무슨 멘트를 날려야, 붉은머리 부랑자의 스탯창을 곧바로 띄우게 만들 수 있을까.
‘그래. 이렇게 쓰면 되겠군.’
나라면 어떤 말을 들어야 상태창을 확인하지 않고 못배길까. 그런 생각을 했더니 의외로 답은 쉽게 나왔다.
나는 적어놓은 멘트를 망자의 함에 우겨넣었다. 마지막으로 3명 남은 부랑자 리스트를 찢어내 망자의 함에 동봉하려던 바로 그 순간.
덜커덕.
문이 끝까지 열리며 안에 있던 소녀가 얼굴을 비쳤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쪽을 향해 시선을 던졌고. 그녀의 얼굴을 목격했다.
“어.”
나는 얼빠진 탄성을 흘렸다.
의문과 당황. 그리고 그걸 상회하는 반가움이 담긴 탄성이었다.
“야. 너…!!”
구면이다. 나는 저 얼굴을 똑똑히 기억한다.
나는 성큼성큼 붉은 머리 소녀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내가 다가올 때마다 겁에 질린 얼굴로 뒷걸음질 쳤다.
“왜, 왜 그러세요….”
그 자신감이 결여된 행색. 그리고 가까이서 보니 확실히 보이는, 붉은 머리 사이로 뾰족하게 솟은 귀까지. 기억 속 이미지와 똑같다.
혹시나 했던 예감이 점점 확신으로 변해갔다.
“너. 나 본적 있지!”
나는 대뜸 얼굴을 들이밀며 그렇게 물었다.
내가 아는 그 여자가 맞다면. 오히려 그녀가 나를 잊었을 리가 없다.
왜냐면 이 여자를 만났을 당시에 나는 기행을 하는 것으로 꽤 유명했으니까.
‘1일 1식’이라는 기행으로 말이야.
“… 어?”
공포에 질려 있던 붉은 머리 엘프 소녀가 곧 탄성을 흘렸다. 나를 쳐다보는 눈이 점점 크게 뜨인다.
역시 나를 알아본다. 내가 아는 그 여자가 확실하다.
소녀가 천천히 나를 삿대질하며 중얼거린다.
“서, 설마 개구리 아저씨랑 같이 있던… 밥 맨날 먹는 사람?”
“… 마, 맞긴 한데….”
미친. 시험의 장막에서 내 이미지는 저거였단 말이야?
새삼 남의 입으로 ‘꼬박꼬박 밥 챙겨먹던 스칼로 사은품’ 소리를 들으니 좀 씁쓸하다.
뭐 씁쓸한 건 씁쓸한 거고. 이 만남이 반가운 건 변함없다.
내가 정말 만나고 싶었던 사람 중 하나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오랜만이다. 최후의 16인.”
나는 그렇게 소녀에게 악수를 건넸고.
소녀 역시 처음엔 쭈뼛거렸지만, 이내 조십스럽게 내 손을 붙잡았다.
그녀의 정체는 시험의 장막에서 마지막까지 잔류했던 최후의 16인 중 하나.
기억 한 구석에 처박혀 있던 붉은 머리의 엘프 남매 중 여동생 쪽이었다.
그 사실을 새삼 깨닫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시험의 장막 최후의 16인 구성은 대충 이렇다.
나와 스칼로, 알드콘, 그리고 세스나까지 네 명.
이름 모를 한국인 청년과 특색없는 일행 셋까지 해서 네 명.
터번을 두른 인물 5명과 손에 족쇄를 찬 누더기 여자까지 해서 여섯 명.
그리고 마지막으로, 붉은 머리와 뾰족한 귀를 가진 엘프 남매가 두 명.
‘그 중에서 나만 빼고 전부 같은 곳으로 떨어졌지!’
새삼 떠올리니 슬프기 그지없지만, 지금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중요한 건. 눈앞의 엘프 소녀가 스칼로와 알드콘, 세스나와 같은 곳에 떨어졌다는 것.
다시 말해 내 일행들의 행방을 알고 있을 확률이 높다는 것.
중요한 건, 그것뿐이었다.
‘귀가 계획 중지다.’
작전 변경이다. 리스크를 감수하더라도 이 정보는 얻고 간다.
나는 당장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판자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당황한 엘프 소녀는 서둘러 문을 닫으려 했지만 어림도 없다. 나는 곧장 그녀의 팔목을 붙들어 버렸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술이라도 한 잔 해야지. 내가 쏜다.”
“아… 으…!”
물론 거부권 따윈 없다. 이세계 입사 동기.
나는 여전히 경계심이 가득한 소녀의 얼굴을 마주보며 히죽 웃었다.
* * *
당연히 맨입으로 소녀에게 정보를 뜯어갈 생각은 아니었다.
나는 곧장 그녀를 데리고 케른의 번화가로 돌아왔다. 그리고 성대하게 펼쳐진 야시장으로 가서, 길거리 음식들을 상다리 부러지도록 사줬다.
적발 엘프 소녀는 자기 앞에 펼쳐진 진수성찬에 정신도 제대로 차리지 못했다.
“… 이, 이거 제가… 머, 먹어도… 돼요?”
“당연하지. 너 먹으라고 산 건데.”
“와, 와아…!”
소녀는 한동안 걸신들린 듯이 음식을 탐했다.
꾀죄죄한 차림새부터 판자촌에서 사는 시점에서 대충 예상했지만. 역시 그녀는 많이 굶주려 있었다.
뇌물로 음식을 선택한 건 최고의 초이스였다.
“어쩌다 이런 데서 부랑자로 살고 있냐?”
그 많던 음식을 거의 다 비운 엘프 소녀가 만족스럽게 배를 쓰다듬을 즈음.
나는 툭 물었다.
“그, 그건….”
곧장 엘프소녀의 얼굴에 그늘이 우장창 졌다.
그녀는 방금까지 먹던 닭다리도 식탁에 팽개친 채 울먹이기 시작했다.
이런 제길. 분위기 좀 풀어보자고 한 질문이었는데 오히려 분위기가 곱창났군.
우는 건 질색이다. 나는 바로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아니다. 우선 너 이름은 뭐야?”
“에… 이, 이름이요?”
“그래. 계속 최후의 16인이라고 부를 순 없잖아.”
“아.”
‘적발의 엘프 소녀’든 ‘최후의 16인 중 하나’든 너무 길다. 나는 짧은 이름을 원한다.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어느새 울음을 그쳐 있었고. 곧 조심스럽게 자기 이름을 밝혔다.
“… 제나. 갈란 숲의 일곱 번째 딸 제나예요.”
“뒤에 사족은 됐고. 제나는 접수.”
“네, 네에.”
그러고 보면, 시험의 장막에서 오빠 쪽이 제나라고 불렀던 것 같기도 하다.
길게 돌아갈 시간은 없다. 나는 시험의 장막 당시를 떠올리며 질문을 하나씩 골라나갔다.
“일단 몇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괜찮을까?”
“아, 네. 그럼요. 얼마든지 말씀하세요.”
제나는 배가 불러서 기분이 좋아졌는지,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엘프라 그런지 외모가 귀엽다. 웃으니 청초한 미색이 한층 살아나는 느낌이었다.
“그 시커먼 공간에서 나랑 같이 있었던 일행들. 다 기억하냐?”
“분명… 느긋한 개구리 아저씨랑 불같은 난쟁이 할아버지랑… 엄청 큰 거북이 아저씨. 그리고 물색 머리의 착한 언니였죠.”
“그래. 정확해.”
크라네이드를 제외하곤 외모뿐만이 아니라 성격까지 기억하고 있군.
하지만 시험의 장막에서 우리 일행이 제나와 대화하는 걸 본 기억은 없다. 그러니 이건, 파라이소로 넘어와서 대화해본 적이 있다는 증거다.
나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애써 억누르며 계속 물어봤다.
“그 사람들 지금 어디 있는지 알아?”
“그… 화, 확실하진 않지만.”
“않지만?”
“… 네. 아마도 알 것 같아요.”
애매하긴 해도 긍정이다.
나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