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힘숨찐
처음에 하기로 결정된 일은 바로 ‘붉은 머리 부랑자’의 행방을 찾는 것이다.
세 번에 걸친 회귀점의 갱신. 내 생각엔 이것들이 바로 돌파구다.
물론 여기까지는 전생의 나들도 당연히 생각이 닿았겠지. 하지만 동시에 포기했을 것이다.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니 리스크가 너무 크지.’
당황해서 그 부랑자의 스테이터스를 바로 띄우지 않은 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랬다면 좀 더 쉽게 찾을 수 있었을 텐데.
망자의 함을 이용해 다음 생에 메시지를 남겨볼까도 생각했지만. 회귀를 깨닫고 망자의 함을 열어보는 텀이 있으니,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어쨌든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이다.
나는 지금 닥쳐온 상황에서 어떻게든 살 궁리를… 아니. 최대한 덜 죽을 궁리를 해야 한다.
‘사실 시간 여유를 생각하면. 당장 도망치는 게 가장 생존 확률이 높지.’
내가 무엇 때문에 죽는지도 모른다. 대처법도 확실하지 않다. 설상가상으로 조사할만한 시간조차 없다.
그러면 당연히 최대한 멀리 도망쳐야 한다. 나름 최적의 판단이다.
하지만. 그건 내가 살고 싶을 때나 통용되는 말이다. 지금의 나는 다르다.
살아남을 생각이 없는 나는 조급할 이유가 없다.
‘나의 오늘은 끝나지 않아.’
그러면 나는 이 끝나지 않는 오늘을 최대한 이용해야 한다.
어이없게 반복되는 이 사망유희를 끝내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오. 맞게 찾아왔네.”
그렇게 내가 찾아온 곳은 부랑자들이 모여있는 뒷골목의 판자촌이었다.
나무판자로 얼기설기 엮어놓은 네모난 집들이 음습한 골목 도처에 테트리스 블록마냥 다닥다닥 붙어있다.
그 앞에는 낡고 해진 넝마를 입은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다.
‘자리 잡은 본새가 꽤 본격적인데.’
솔직히 이렇게 대규모 부랑자 촌락이 구성돼있을 줄은 몰라서 좀 놀랐다.
겉으로는 밝아 보이는 이 케른도 안으로는 썩어 들어가고 있었군. 마왕이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서, 실향민과 기아난민이 도처에서 폭주하니 사실 이게 정상이긴 하다.
“…….”
“…….”
퀭하니 죽어 부릅뜬 눈 수십 개가 나를 훑는다.
낯선 사람을 경계하는 긴장감이 도처에 감돌았다. 제들끼리 수군거리나 싶더니 분주하게 자리를 피하는 사람도 보인다.
나는 그 경계어린 눈들을 하나씩 마주보며 속으로 영창했다.
‘미미르의 눈 발동.’
차라리 모여 있어서 잘 됐다. 이러면 골목 구석구석을 직접 뒤지는 수고도 덜 수 있으니까.
여기에 있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어깨빵 치고 갔던 빨간머리.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연신 떠오르는 스탯 창을 빠르게 훑었다.
[명칭: 사라 한슨]
[별칭: 없음]
[LV. 21]
[명칭: 진유]
[별칭: 케른의 망나니]
[LV. 8]
[명칭: 이멘 레번트]
[별칭: 없음]
[LV. 11]
‘딱히 눈에 띄는 놈이 없네.’
내가 주목한 건 레벨이나 명칭보다는 별칭 항목이었다.
미미르의 눈으로 보이는 ‘별칭’ 항목은 그 사람의 직책이나, 본명보다도 많이 불리는 별명이 표기된다. 그런 게 없는 평범한 인물은 당연히 표기되지 않는다.
그 붉은 머리 부랑자가 내 죽음에 관련이 있다면. 특별한 별칭을 달고 있는 사람일 게 분명하다.
제르미 발킨이 ‘카사스의 사도’라는 별칭을 달고 있었던 것처럼.
‘흐음? 이건 또 뭐야.’
나는 어느 순간 입꼬리를 슬쩍 말아 올렸다.
이렇다 할 수확을 얻지 못하고 허탕만 치던 순간. 특색없는 노인 하나에게서 흥미로운 별칭을 발견한 것이다.
[명칭: 히크 토시오르]
[별칭: 케른의 밤주인, 정보상 케른 상연회의 마스터, 아이작 타이슨, 무사]
[LV. 122]
[체력: 1140/1540 마력: 630/630 신체상태: 가벼운 공복, 노쇠]
[힘: 125 민첩: 188 지능: 76]
‘케른의 밤주인이라.’
정보상의 마스터. ‘케른 상연회’라는 조직의 수장이라는 모양이다.
별칭 항목 마지막의 아이작 타이슨이라는 이름은 아무래도 가명 같았다. 대외적으로는 저 이름을 쓰는 거겠지.
정보상. 이거다. 번지수는 조금 틀렸지만 길이 보였다.
‘겉보기에는 추레한 노인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데.’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면 안 되는 법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옛말치고 틀린 거 하나도 없다.
역시 판타지 세계. 뒷골목의 정보상은 은둔 고수 할아범이 나와야 국룰이지.
‘밤주인쯤 되면 뭐라도 알겠지.’
나는 그 시점에서 즉시 서칭을 중단했다. 그리고 거적을 두르고 잠을 청하는 노인… 히크에게 다가갔다.
내 발소리가 가까워져서인가. 히크는 천천히 눈을 떴다.
주름살이 자글자글한 시선이 가만히 나를 올려다본다.
“쇤네한테 무슨 용건이라도 있으신가 총각. 돈은 없으니 살려만 주시게….”
힘아리 없는 동작으로 히크가 내 앞에 엎드려 절했다. 손발을 바들바들 떨며 연신 고개를 조아린다. 저절로 측은지심이 들 정도로 비굴한 행색이었다.
물론 나는 대차게 비웃음을 흘려줬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숙여 노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연기 잘하시네요. 케른 상연회 히크 씨.”
“!!!!”
“케른의 밤주인쯤 되려면 남우주연상이 교양 필수인가?”
히크가 퍼뜩 고개를 들어올렸다. 나를 쳐다보는 눈이 터질 듯이 부풀어올라 있었다.
그의 입이 천천히 열리고 메마른 목소리가 띄엄띄엄 흘러나왔다.
“어, 어… 어떻게….”
“그건 알 거 없고. 잠깐 할 얘기가 있는데 괜찮죠? 괜찮을걸? 괜찮고 말고.”
“…….”
“갑시다. 좀 한적한 곳으로.”
히크 할아범은 여전히 뭔가에 홀린 듯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꼴에 정보상의 수장이어서 그런가. 그는 곧 평온한 표정으로 돌아오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내게 슬쩍 눈짓한 뒤 골목의 으슥한 그늘로 먼저 걸어갔다.
‘좋아. 이제 시작이다.’
나는 호기롭게 한 번 웃어준 뒤 히크 할아범의 뒤를 가만히 쫓아가기 시작했다.
* * *
“아직 멀었어요 어르신?”
“…….”
어둡고 구불구불한 케른의 뒷골목을 얼마나 걸었을까.
나는 연신 할아범을 독촉했고. 그럴 때마다 히크 할아범은 나를 슬쩍 한 번 보고 고개를 젓는 것으로 간단히 대답했다.
하지만 그것도 한 두 번이지. 나는 슬슬 뒷목이 싸하게 식는 걸 느끼고 있었다.
‘쯧. 함정인 것 같은데.’
하긴 대뜸 자기 정체가 뽀록났는데 저쪽이 나를 좋게 봐줄 리가 없다. 어떻게든 나를 생포하거나 최소한 죽이고 싶겠지.
아니나 다를까. 내 불길한 예감이 곧 현실로 드러났다.
“… 이곳까지 의심없이 따라오다니. 멍청한 놈이군.”
“뭐가 어쨌다고요?”
“아니지. 그만큼 실력에 자신이 있다는 소리인가.”
어느 순간. 살기와 박력을 담은 히크 할아범의 말이 들려온다.
히크 할아범이 나를 돌아봄과 동시에 스스슥. 주변으로 너댓 명의 시커먼 신형이 등장했다.
온몸을 흑장속으로 두른 복면의 남자들. 추측컨대 히크 할아범의 경호원쯤 되는 모양이다.
[명칭: 한스]
[별칭: 케른 상연회 소속 특등살수, 달인]
[LV. 95]
[체력: 980/980 마력: 320/320 신체상태: 정상]
[힘: 88 민첩: 139 지능: 30]
‘살수면… 경호원 사촌쯤 되네.’
시험 삼아 가장 왼쪽의 놈을 스캔해 봤더니 역시 히크와 한통속이었다.
나는 여유롭게 양쪽 허리의 쌍검을 뽑아들었다. 차아앙! 금속음이 울림과 동시에 복면 남자들의 살기가 짙어졌다.
“음?”
대치가 계속되던 어느 순간. 눈앞의 살수 하나가 품 안에서 스크롤을 꺼내더니 냉큼 찢었다.
화악, 빛줄기가 뿜어져 나오나 싶더니. 그것이 곧장 내게로 쏟아졌다.
‘뭐지?!’
채 저항할 틈도 없었다.
빛은 내 몸을 관통하더니 이내 그들의 앞으로 돌아가 반투명한 패널을 생성해냈다.
나는 어리둥절하게 내 복부를 만졌다. 아무런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다. 공격이 아니었던 건가?
예상치 못한 상황에 혼란스러워하는 찰나.
“하핫. 시험도 받지 않은 외지의 어중이떠중이였나.”
“과연. 회주님 앞에서 하늘 높은지 모르고 설친다 싶더니.”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 오늘 네놈에게 케른 상연회의 수준을 깨닫게 해주지. 크크큭.”
곧장 그들의 눈가에 비웃음이 어렸다. 나를 쳐다보는 눈빛이 명백히 하대가 되었다.
나는 그 행색에서 방금 당한 일이 어떤 것이었는지 대충 짐작했다.
‘저 스크롤로 계급을 알 수 있는 모양이지?’
내 몸을 관통한 빛이 만들어낸 패널. 거기에 내 정보가 적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다만 정확한 능력치까지는 모르고. 평가시험의 계급만 판단이 가능한 듯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 좁밥 새끼들이 미쳤다고 저런 멘트를 날리겠냐.
“그래. 깨닫게 되겠네. 너희들의 수준.”
모 축구만화처럼 시시해서 죽고 싶어질 정도만 아니었으면 좋겠다.
나는 허리춤의 두 자루 검을 뽑아들었고. 곧장 마력검 14개를 허공에 전개했다.
빠지지직! 유려하게 춤추며 날개처럼 뻗어나가는 새파란 마력검. 그것을 눈에 담은 살수들의 미간이 꿈틀, 춤을 췄다.
“…… 음?”
아주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을 ‘음?’이었다.
이건 뭔가 예상과 다르다 싶은 느낌이겠지만. 원래 그런 느낌이 들었을 때는 이미 늦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세븐 소드 피어스. 더블.’
나는 양손을 한번에 흩뿌렸고. 허공에서 진동하던 마력 칼날은 기다렸다는 듯이 앞으로 튕겨나갔다.
쇄애애액! 공기를 찢어발기며 마력검이 전방향으로 날아간다.
“이런 제길! 피해라!”
살수들보다 히크 할아범이 먼저 외치며 몸을 물렸다.
살수들은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골목의 벽을 차올리며 날아오는 검들을 피해나갔다.
“크헉!”
하지만 이 좁은 길목에서 14개나 되는 마력 칼날을 피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마력 칼날이 일대를 휩쓸고 지나가자, 비명과 함께 살수 두 사람이 바닥에 쓰러졌다.
“곤! 찰리! 3번 대형이다!”
남은 살수들은 순간 당황했지만, 잠깐이었다.
가장 앞에 서있던 살수가 외친다. 동시에 뒤에 대기하던 살수 두 사람의 신형이 녹아내리듯 사라졌다.
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 힐끗 입꼬리를 올렸다.
“너희도 그런 거 하냐? 나도 좀 할 줄 알거든.”
나는 곧장 잠입 스킬을 사용했다.
푸스스. 시커먼 안개가 흩날리며 내 신형이 그림자에 녹아들었다. 어두운 골목이다 보니 그들에겐 깜빡거리는 유령처럼도 보일 테다.
‘연화.’
그리고 나는 놈들이 당황한 틈을 타 곧장 스킬을 사용했다.
일순간 시야가 요동쳤다. 정신 차렸을 땐 이미 살수 한 명의 등 뒤를 점한 상태였다.
나는 곧장 에스파다를 밀어 넣었고. 푸지직! 끔찍한 손맛과 함께 에스파다는 두부 썰듯 살수의 배를 관통했다.
“크… 헉… 끄으!”
사람을 찔렀다. 내장을 헤집는 감각이 손끝으로 느껴진다.
부들부들 떠는 근육의 수축. 흐르는 피. 죽어가는 생명의 기운. 모든 것이 느껴진다.
처음으로 살아있는 사람을 찔렀다.
그걸 자각한 순간, 참기 힘든 역함이 가슴 깊숙한 곳에서 치고 올라왔다.
‘… 동요하면 안 돼!!’
구역질이 몰려오려는 걸 애써 진정시키는 한 편. 아직 사람을 찌르는 데에 거부감이 있는 내 모습에서 안심했다.
나는 루시가 할센베르크에서 남겼던 경고를 잊지 않았으니까.
“… 내가 지금 좀 바쁘다.”
파스슷! 검을 뽑자 피가 분수처럼 쏟아진다.
나는 그 피를 뒤집어쓴 채 입을 열었다. 나 자신을 속이기 위해서라도 아가리를 멈추면 안 된다.
“그래서 지금 덤비면 손속에 자비가 없을 거다. 알아두라고.”
방금 대사는 힘숨찐 주인공 같았어. 쩔었다 박정용.
자아도취와 함께 나는 그들에게 천천히 다가가기 시작했다.
키이잉! 내 뒤로는 어느새 다시 생성된 14개의 마력 칼날이 천천히 선회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