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누가 박정용을 죽였나
‘후… 잔류사념이 너무 멀잖아.’
나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이자나미의 심장을 발동시켰다.
방향은 케른에서 수도로 향하는 평야 방향. 하지만 랜턴의 빛이 너무 미약하고 고동도 없다. 거리가 어지간히 떨어져 있다는 소리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추측해보건대, 수복하러 가는데만 한 나절은 걸릴 거리다.
‘… 급하게 수도로 향했나? 아니면 시간이 오래 지나고 죽은 건가?’
적어도 내가 죽은 이유가 케른에서 돌발적으로 발생한 위협 때문이라면. 긴 시간이 지나서 죽었을 가능성은 적다.
내가 고민에 빠져 있자니. 옆에서 슬금슬금 다가온 마왕이 내 옷깃을 잡아당겼다.
“여봐라 용사. 지금 또 회귀가 일어난 게지? 무슨 일이냐 대체.”
나는 마왕을 쳐다봤다. 자기가 왜 다시 케른으로 돌아와있는지, 이해를 못하는 얼굴이었다.
그래. 생각해보니 얘가 있었군. 나는 그제야 루시를 떠올리고는 그녀에게 물었다.
“야 루시.”
“뭐냐.”
“저번 생에서 지금까지 며칠이나 버텼냐?”
“하루. 하룻밤 사이에 자고 일어나니 다시 돌아와 있었다.”
“고, 고작 하루…?”
결론이 나왔다.
나는 급하게 이 케른을 탈출하다 죽은 게 맞았다.
“뭐, 일단 알겠다. 생각중이니까 잠깐 혼자 놀고 있어봐.”
“이런 싸가지 없는… 흐흠. 아무튼! 이번엔 또 뭔 일이냐! 난 자느라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도 몰랐단 말이다!”
“너 나 놀리냐?”
지금 그게 세상에서 제일 궁금한 게 나란 말이다.
나는 언제나 그렇듯이 마왕의 볼을 쭈욱 늘려줬고.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다 생각난 게 있어 퍼뜩 물었다.
“그러고 보니 너는 알겠네. 전생에 내가 마지막으로 갔던 곳이 어디냐?”
“아흐아! 이허 노호 마해라!”
“뭐래는 거야.”
“아프다고! 나! 노으라고!!”
이런. 볼을 잡은 채로 물어버렸군. 숨 쉬듯이 자연스러운 행위라서 잡고 있는지도 몰랐다.
나는 루시의 볼을 놔줬고. 그녀는 새빨개진 볼을 쓰다듬으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어디까지냐 물어도, 그냥 평야 한복판이었다. 정확히 어디인지 내가 어떻게 아느냐!”
“음… 그럼 얼마나 걸었는지는 기억하냐?”
“당연하지. 하루 종일 걸어서 기절하듯이 잠들었으니까!”
“하, 하루 종일…?”
어지간히도 급하게 출발했나보군.
정말 여기서 뭐가 일어나긴 일어나는 모양이다.
근데 그게 뭔지를 모르니 대처도 못하겠다. 미치고 팔짝 뛰겠네 진짜.
“위협이라….”
그러면 위협이 될 만한 일이 뭐가 있을까.
지금의 내 시점에서 곰곰이 생각해본 결과, 이런 결론에 이르렀다.
‘회귀점이 변경된 시점에서 일어난 일들.’
3번.
무려 이 도시에 들어오고 나서만 3번이나 회귀점이 갱신됐다.
첫 번째는 ‘카사스’라는 알 수 없는 단체의 미행자 제르미 발킨과 조우할 때.
두 번째는 설백이 ‘이스그라드의 전조’라는 알 수 없는 반지를 가챠로 뽑아왔을 때.
그리고 세 번째는 바로 지금. 붉은 머리의 부랑자와 마주쳤을 때다.
회귀점 갱신이 그렇게 손꼽을 정도로 드문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루에 세 번이나 갱신될 정도로 빈발하는 일은 또 아니다.
이 빈도는 확실히 이상하다. 적어도 셋 중 하나 이상은 위험의 증거다.
‘하지만 미행자는 죽어버렸고… 설백의 반지는 뭐 정보를 알 수 없는 상황이고… 붉은 머리 부랑자는 도망쳐 버렸고….’
그게 문제다.
셋 다 현재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영역에 있다. 뭘 어떻게 수습을 하고 싶어도, 수습할 건덕지가 없다.
아니. 애초에 뭘 수습해야할지조차 불명확한 상태다.
‘일단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설백이 뽑은 정체불명의 반지. 그것부터 뺏어야 한다.
다른 건 몰라도 당장 할 수 있는 조치는 해놓는 게 맞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곧장 설백을 쳐다봤다.
“설백. 아까 사준 반지 좀 다시 줄래?”
“… 네? 왜요?”
설백은 갑자기 반지를 요구하는 나를 굉장히 해괴한 눈으로 쳐다봤다.
슬쩍 손을 물려 내게서 왼손을 가린다. 장난감 뺏기기 싫어하는 어린아이처럼.
“음… 그게.”
나는 그 반응을 보고 조금 놀랐다.
생각보다 완강하게 거절하는군. 아깐 꽝이 나왔다고 실망하지 않았나?
이건 내 예상과 좀 다르다. 쉽게쉽게 갈 줄 알았더니 애로사항이 꽃필 냄새가 난다.
“그거 뭐 별로 좋은 것도 아니잖아. 나중에 새걸로 하나 사줄 테니까 일단 줘.”
“아, 그… 그건 좀.”
예상대로 설백은 내 손을 거부했다. 예상은 했다지만, 막상 이렇게 되니 답답하기 그지없군.
나는 눈썹을 튕기며 그녀를 회유하기 시작했다.
“아니 대체 왜? 그거 처음 뽑았을 때 너도 엄청 실망했잖아.”
“그, 그야 뭐….”
“일단 그건 내가 갖고 나중에 때깔 좋고 비싼 걸로다가 다시 사줄게. 약속한다니까.”
“그치만… 그치만!”
그녀는 연신 말끝을 흐리며 우물쭈물했다.
여기서 ‘킹치만’을 꺼내다니 반칙 아니냐? 그래, 이유나 들어보자. 대체 왜 그 반지를 나한테 못 넘기는지.
내가 설백을 뜨거운 눈길로 마주보자, 그녀는 시선을 슬쩍 피하며 대답을 이어나갔다.
“이, 이건 정용님이 저한테 준 첫 번째 선물인걸요.”
“… 뭐?”
“모양새나 가격은 아무래도 좋아요. 정용님이 주신 첫 번째 선물이니까… 제가 간직하고 싶어요.”
“… 아, 그래….”
그렇게 얼굴 붉히면서 소녀감성 콸콸 넘치는 멘트로 대답해버리면 인마.
내가 뭐라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잖아. 이런 망할.
뭐 쟤 나 좋아하기라도 하냐? 사람 당황스럽게 하고 있어. 나 같은 모쏠 동정은 착각한다고.
‘… 안돼. 아무리 그래도 내 목숨이 달린 일이다.’
나는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좀 더 완고하게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됐으니까 빨리 줘.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
“왜, 왜 그러시는 건데요 갑자기?”
“왜냐니… 이유가 중요하냐?”
“중요하죠! 이유를 듣고 타당하다 싶으면 드릴게요.”
순간 할 말이 없어져서 가만히 땅만 쳐다봤다.
저 단단한 눈빛. 단순히 선물을 줬다 뺏기는 게 싫어서 고집을 부리는 행색이 아니었다.
‘의심받고 있군.’
정확히는 걱정을 받고 있다고 해야겠다.
아까 전부터 내 행색이 아무래도 이상하니까. 이유를 듣고 싶어서 저러는 거다.
시공회귀에 대한 걸 말해버리고 싶다.
충동이 울컥 솟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괜히 사실을 밝혀서 그녀까지 이 귀찮은 관계에 말려들게 할 이유가 없다. 이 비밀은 나만 가지고 있어야 한다.
“정용님. 역시… 저는 못 미더우신가요?”
“음?”
그러자니, 갑자기 설백이 그런 말을 한다.
나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설백은 풀죽은 얼굴로 웅얼거렸다.
“아까부터 정말 이상하다구요. 처음엔 다른 나라에 처음 와서 정용님도 들뜬 건가 싶었지만… 뭘 그렇게 무서워하시는 건가요? 이 반지를 왜 갑자기 돌려달라는 거죠?”
“…….”
“저한테 알려주세요. 제가 알면 안 되는 건가요? 우린… 동료잖아요. 네?”
그렇게 불안한 티가 났나? 솔직히 좀 충격이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변명을 만드는 재주가 없다. 지능이 올라가도 마력만 늘었지 진짜 지능이 올라가는 게 아니니까.
내 머리가 빡통인 게 이렇게 짜증날 때가 있었나 싶다.
“… 그냥 뭔가 불길해서 그래.”
결국 내가 내뱉은 건 변명도 되지 못할 구질구질한 말뿐이었다.
설백은 한참을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이내 내쪽으로 얼굴을 가까이하며 말했다.
“물론, 저는 정용님처럼 대단한 사람이 아니에요. 정용님이 할센베르크성에서 엘더리치를 토벌하실 때처럼 통찰력이 뛰어나지도 않고요.”
“야. 그건….”
아니. 그건 내가 통찰력이 좋아서 잡을 수 있었던 게 아니다.
너도 한 스무번 뒤졌다 깨어나 봐라. 더 죽기 싫으면 어련히 열심히 하게 된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지만. 나는 그냥 입만 꾹 닫고 묵언수행을 계속했다.
“정용님의 짐을… 제가 덜어갈 순 없는 건가요…?”
간절하게 쳐다보는 설백의 눈이 마음을 뒤흔들었다.
결국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참았던 말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좋아. 잘 들어. 사실 나는….”
“거 신파극 그만 찍고. 내놓으라면 내놓지 말 한 번 드럽게 많구나 계집.”
끈끈한 유대의 무드를 개박살내는 한 마디가 난입했다.
나와 설백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거기엔 지금껏 입 닫고 있던 마왕이 인상을 잔뜩 쓴채로 서 있었다.
심히 아니꼽다는 표정으로 루시가 손가락을 까딱인다.
“잔말 말고 내놔라. 다 긴히 쓸 데가 있어서 그러는 것이니.”
“으읏…!”
설백은 건방진 루시의 태도에 순간 입술을 깨물었다.
평소엔 잘 지낸다고는 못해도 나름 루시를 배려해주고 있던 설백이었지만. 그녀로서는 드물게 루시에게 반발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흐, 흐응. 루시씨는 정용님이 이 반지를 왜 돌려받으려는지 아시나요?”
“당연하지. 난 안다. 그러니까 내놓으라는 게다.”
“뭐라구요…?”
설백의 치켜뜬 눈이 번득이며 내게 향했다.
돌겠네. 마왕은 성격상 얘기가 지리멸렬해지는 게 싫어서 난입한 모양이지만. 하필이면 최악의 타이밍이었다.
“저, 정용님! 왜 루시 씨는 알고 있는 거죠? 저분은 되고 왜 저는 안 되는데요? 네?”
설백은 반지를 내 앞으로 불쑥 들이밀며 언성을 높였다.
“후우.”
그래 됐다. 이제 나도 머리 아파서 더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나는 이마를 짚고 한숨을 흘렸다.
“그래 그래. 너 그냥 가져.”
내가 손사래치며 말하자 설백은 물론이고 마왕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 예?”
“뭐가 어째?”
나는 의문스럽게 쳐다보는 두 사람에게 손사래를 쳤다.
“그냥 가지라고. 확실하지도 않은 직감으로 다짜고짜 뺏는 것도 이상하긴 하지. 미안했다 설백. 내가 과민했어.”
“아니 용사! 그렇다고 그렇게 포기해 버리면…!”
내가 앞장서 걸어가자 뒤에서 마왕이 쫄래쫄래 따라붙는다.
그녀가 할 말 많은 얼굴로 나를 가만히 쏘아봤다. 한참 후에 마왕이 조용히 내게 속삭였다.
“괜찮겠느냐? 딱 봐도 평범한 반지가 아니다 저건. 내 친히 네게 충고했잖느냐!”
루시답지 않게 심각한 어조였다. 순간 나까지 쫄아버릴 정도로 눈매가 이글거린다.
나는 거기에 대고 그냥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회귀 원인이 확실해지면 그 때 뺏어도 늦지 않잖아.”
“… 어떻게든 말이냐?”
“그래. 지금까지도 어떻게든 잘 넘어왔잖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 하.”
루시가 가소롭다는 듯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한동안 나를 빤히 쳐다봤다.
이내 그녀는 고개를 팩 돌렸다. 그리고 혼자 투덜거렸다.
“뭐, 그래. 맘대로 해 보거라. 일단은 나도 지켜보마.”
“오케이. 그럼 우선 잔류사념이나 회수하러 가볼까….”
“그러든지 말든지. 흥.”
그렇게 나와 루시, 그리고 설백은 잔류사념이 있는 수도 방향을 향해 곧장 걸어가기 시작했다.
마왕도 설백도 어딘가 석연찮은 표정이었지만. 나는 대충 무시한 채 걸음만 옮겼다.
‘그래. 어떻게든 되겠지.’
그 답 없어 보이던 엘더리치도 어떻게든 됐잖아.
할센베르크의 그 때를 그 때를 떠올리며, 나는 막연하게 긍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다.
…….
….
… 그리고 지금 이 순간.
토악질 나오도록 나태하고. 안일하고. 무사태평한 이 순간 때문에.
수십 명의 ‘나’는 이 순간을 기억도 못한 채 억울하게 뼈를 묻지만.
뭐 어쩌겠는가.
전생은 전생이고 현생은 현생이고.
다음 생의 나는 기억도 못하는, 묻힌 시간 속의 해프닝인 것을.
* * *
[불사의 회귀점이 갱신되었다.]
[일시 - 대륙력 1108년, 1월 12일, 오전 11시 30분]
[장소 - 마르크트레스. 약속의 평원 상부지역, 소도시 케른 거주 지구]
“잠깐! 거기 서!!”
패널이 뒤늦게 등장하고 나서야, 나는 눈을 부릅뜨며 붉은 머리의 부랑자를 쫓았다.
부랑자는 내쪽을 슬쩍 돌아보나 싶더니 이내 으슥한 골목 쪽으로 진입했다.
나는 혀를 차며 곧장 놈의 뒤를 따라가려 했다. 하지만.
“멈춰라 용사! 아니, 박정용!!”
득달같이 달려와 내 앞을 가로막는 하얀 머리칼의 여자가 있었다. 나는 발을 멈춰야 했다.
순간 숨을 삼켰고. 홀린 듯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 루시? 갑자기 왜 그러냐.”
“왜 그러냐고? 그건 내가 할 말이다 이 머저리 놈아!!”
투학! 쏜살같이 달려온 루시가 하얀 머리칼을 휘날리며 내게 이단옆차기를 꽂았다.
“쿠헥.”
꼴 사나운 비명과 함께 난 그 자리에 엎어지고 말았다.
아니, 이년이 이렇게 힘이 셌나? 그런 생각이 들기도 잠시.
쓰러진 내 위로 루시가 올라타며 내 멱살을 쥐어챘다. 그리고 상하좌우로 미친 듯이 흔들기 시작했다.
“이 무능한 수호자 놈아! 이게 대체 몇 번째냐!”
“… 커흑. 쥐약 줏어 먹었냐? 그게 갑자기 무슨….”
“네놈이 지금 여기서만 몇 번째 부활했는지 아냔 말이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죽었다 살아나? 설마… 방금 시공회귀가 일어났었단 말인가?
나는 흔들리는 머리로 필사적으로 생각했고. 그녀의 구타를 막으며 반박했다.
“아니 사람이 좀 죽었다 살아날 수도 있지(?)! 왜 네가 지랄이야!”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이놈아! 당하는 내가 지겨워서 못 살겠단 말이다! 오늘만 몇 번째야 지금!”
“뭐, 몇 번이나 돌아왔길래!”
“33번이다 미친놈아!”
“… 뭐가 어째?”
나는 그 엄청난 숫자에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빠악, 퍼억. 루시의 솜주먹이 내 머리 두들기는 걸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저, 정용님 괜찮으세요?! 루, 루시씨! 이게 갑자기 뭐하는 짓이에요!”
“놔라 이년아! 저 새끼는 좀 더 얻어터져야 된다!! 정신머리를 고쳐야 해!”
가까스로 따라붙은 설백이 나와 루시의 사이를 중재하며 걱정스럽게 쳐다본다.
나는 한동안 영혼 빠진 사람마냥 멍청한 탄성만 내질렀고.
‘회귀 신기록 갱신이네….’
헛웃음과 함께 멍하니 그런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