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x같은 코미디였네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대치했다.
미네르바는 시종일관 웃고 있었고. 나는 그녀를 삿대질한 채 어버버 거렸다.
“너, 너… 너! 너어! 너!!”
너무 당황한 나머지 ‘너’무새가 되었다.
아닌 밤중에 뻑치기도 유분수지. 아무리 만나고 싶었다지만, 지금 타이밍은 너무 갑작스럽잖아.
가뜩이나 머리도 복잡한데 간신히 잊고 살았던 똥털이 이제야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대체 또 뭔 소리로 나를 시험에 빠지게 하려고?
“좀 더 기뻐하지 그래요? 내가 굳이 당신이랑 대화하려고 그 여자 재우고, 이 세상에 현현했는데. 당신 하나 도와주겠다고 없는 힘을 쥐어짰다구요.”
“기뻐하긴 얼어죽을….”
역시. 너무 뜬금없이 설백이 잠들었다 싶었더니. 똥털 짓이었군.
미네르바가 이내 손사래를 치며 표정을 고쳤다.
“뭐, 서로 시간 없는 상황이니 말장난은 그만하죠. 바로 본론으로 넘어갈게요.”
기분 탓인가.
유난히 똥털의 눈동자가 가라앉아 있는 느낌이다.
“불사의 마왕과는 어떻게, 좀 친해지셨나요?”
“… 뭐, 그래. 서로 농담 따먹을 수준은 되지.”
“오호.”
내 대답에 미네르바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저 탄성에는 무슨 의미가 담겨있는 걸까. 알고 싶으면서도 알고 싶지 않은 복잡한 기분이다.
그리고 역시, 내 예상대로군. 지금 저 물음으로 확신했다.
‘이 새끼들 전부 알고 있었어.’
아신들은 엘더리치와 불사의 마왕이 상호작용을 할 거라는 것도.
불사의 마왕이 이미 부화한 것도.
심지어는 마왕이 마력을 모으지 못하는 상태가 될 것까지.
전부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저런 물음을 던지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놈들은 일부러 루시의 부화를 촉진시켰다고 보는 게 맞다.
‘X벌… 기분 나쁘네.’
더 이상 남의 꿍꿍이대로 놀아나는 건 사절이다.
나는 생각에 잠긴 미네르바에게 기습적으로 물었다.
“루시를 일찍 부화시켜서. 나랑 붙여놓는 이유가 뭐지?”
“… 루시? 어머. 그 사이에 불사의 마왕한테 애칭까지 붙였어요? 곧 신혼집 차리겠네.”
“농담할 시간 없던 새끼는 그새 뒤졌나?”
내 말에 미네르바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여전히 방글방글 웃는 얼굴로 말했다.
“네. 그럴 시간은 없지요. 오해하지 마세요. 마냥 농담은 아니니까.”
“… 뭐. 진짜 저 흰둥이랑 결혼해? 상견례 잡을까?”
“결혼까진 아니더라도… 당신이 그녀를 어느 정도 억제해주길 바란 건 사실이거든요.”
“…….”
“그리고 당신은 지금 그 역할을 충분히 소화해주고 있지요. 아니, 정확히 말하면 저희 기대 이상으로 잘 해주고 있어요. 장해요. 칭찬해줄게요.”
미네르바는 대견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같잖다. 나는 곧장 가운데손가락을 올렸다. 엿이나 까잡수라지.
내가 아니꼬운 눈빛을 지속적으로 쏘아보내자니. 그녀가 문득 곤란하다는 양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음… 다 계획대로 흘러가는데. 한 가지 불순물이 끼어버려서 이거… 솔직히 좀 곤란해졌어요. 변수는 웬만하면 줄이고 싶어서요.”
“불순물이라고?”
“네. 거기 그 여자요.”
미네르바가 냉큼 고개를 끄덕이며 어딘가를 가리켰다. 나는 곧장 시선을 그리로 돌렸다.
거기엔 세상모르게 자고 있는 설백이 있었다.
순간 표정관리가 안 됐다. 그래도 꼴에 동료라고, 발끈해버린 것이다.
“불순물이라니. 무슨 의미냐?”
“어머 눈빛 좀 봐.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왜 그렇게 화가 났어요?”
“화 안 났어. 아가리로 똥 싸길래 면상에 엉덩이 달렸나 살펴본 거지.”
“… 이게 듣자듣자 하니까…. 하아.”
내가 태연하게 받아치자 오히려 미네르바가 발끈했지만. 이내 꾹꾹 눌러담더니 한숨을 쉬었다. 화내길 바랬던 나로선 아쉬운 반응이다.
어쨌든, 그녀는 화를 내는 대신 말을 이어나갔다.
“제가 여기 온 이유는 바로 그걸 부탁하러 온 거예요.”
“뭘.”
“저 여자. 설백이라고 했나요? 그녀를 피하라고 권고하려고요.”
“…… 왜.”
“그 여자는 천살성(天殺星)이거든요.”
천살성. 하늘이 살인귀의 팔자를 점해준 사람.
설마 내가 아는 그 천살성이 맞나. 갑자기 분위기 무협이라고?
… 아니지. 생각해보니 설백이 무협쪽 업계에서 온 여자지. 갑자기랄 건 없군.
“푸하, 옘병. 설백이 천살성이면 나는 혈교주 파천정용이다 새꺄.”
물론 나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웃었다. 허파에 바람 빠지는 헛웃음이었다.
하지만 그에 대하는 미네르바의 반응은 어느 때보다도 싸늘했다.
“뭐 어떤 식으로 오해를 하신 건지 모르겠는데. 천살성은 본인 의지로 살인하는 사람만 칭하는 게 아니에요.”
“뭐? 그럼 뭔데.”
“본인은 자각도 못하지만 주변인들을 하나씩 죽게 만들고. 끝내 몰살시켜버리는 진짜 천살의 업을 타고난 사람. 그게 저 여자예요.”
“…….”
“사실 난 인간들이 읽어내는 천기 같은 건 안 믿거든요? 근데 저 여자 보고 처음으로 믿었어요. 마냥 돌팔이는 아니구나 싶더라고요.”
“… 그 정도라고?”
설백이 그렇게까지 불행을 몰고 다닌다고? 나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키며 설백의 얼굴을 슬쩍 흘겨봤다.
그런 내 행색을 눈치챈 건지, 문득 미네르바가 키득거리며 내게 넌지시 묻는다.
“당신. 이번에 왜 죽었는지 감은 와요?”
“…….”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대신 눈을 들어 죽일 듯이 미네르바를 쳐다봤다. 알고 있으면 뭐라도 토해내라는 협박을 담은 시선이었다.
미네르바는 놀라는 시늉을 하더니 손사래를 쳤다.
“또 그 눈빛. 나한테 그러지 마요. 나도 정확한 이유는 모르니까.”
“장난 빠냐 지금?”
“내가 아는 건 당신의 죽음에 저 여자가 관련이 돼 있다… 그거밖에 없어요.”
“…….”
“그건 확실해요. 그러니까 내가 리스크를 감수하면서까지 당신에게 권고하는 거죠.”
시야를 가득 뒤덮는 새하얀 폭발. 그것이 설백과 연관이 있다고?
나는 무심결에 설백을 한 번 슬쩍 쳐다본 뒤, 곧장 미네르바에게 대꾸했다.
“… 얘를 버리고 가면 나는 확실히 살 수 있냐?”
“뭐 어느 정도는 재시도를 거쳐야 하겠지만. 적어도 지금처럼 사망 확정은 아니죠.”
다시 말하면 지금은 사망확정이라는 소리군.
어딜 어떻게 도망쳐도 반드시 죽는다는 소리인가?
그 도시를 벗어나면 되는 문제가 아니었단 말인가?
“자. 뭘 망설여요? 그 사이 정이라도 들었어요?”
복잡한 머리를 한 번에 정리시켜버리는 미네르바의 목소리. 나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미네르바의 눈빛이 유난히 싸늘하게 나를 찔러왔다.
나는 결국 시선을 슬쩍 피했다.
“그래. 들었다. 근 두 달을 부대꼈다. 당연히 정이 들지.”
“흐음.”
“그러니 거절한다. 어떻게든 데리고 살아남아 보겠어.”
사실 정 때문만은 아니다.
바로 오늘 밤. 원래 나는 그녀에게 이상한 제안을 받는다.
가칭 ‘벗으라면 벗겠어요’ 에피소드. 그녀가 나한테 마음의 빚이 있다는 걸 알게 된 이상, 이대로 손절치기엔 내 심성이 너무 호구스럽다.
내 대답에 미네르바는 어깨를 으쓱이며 눈을 빛냈다.
“그럼 뭐 어쩌시게요? 대책은 있나요?”
“지금부터 대책을 강구해야지.”
“지금 있는 인원들 가지고요?”
“…….”
“힘아리도 없는 무능마왕이 하나. 불행 몰고 오는 버프녀가 하나. 다시 봐도 파티 참 잘 꾸리셨네요.”
순간 할 말을 잃어서 머리만 긁적였다. 비겁하게 팩트를 들이대다니. 치사하다.
하지만 이대로 침몰할 수는 없지. 나는 곧장 그녀에게 반박했다.
“뭐 여차하면 설백한테 시공회귀를 밝히고 같이 대책을 강구하면 되지. 쟤는 그래도 나보다 똑똑하니까. 대가리 맞대면 뭐라도 나오겠지.”
“그 여자한테 말한다고요? 푸후후. 꿈도 크시네.”
미네르바는 대놓고 비웃었다. 지금까지 보여준 웃음 중에 가장 진실된 웃음이었다.
나는 쌍심지를 세우며 곧장 대들었다.
“왜. 설백은 내 말이면 껌뻑 죽어. 웬만한 말이면 다 믿어준다고.”
“아아. 그러세요? 네네. 뭐 그러시겠죠.”
“진짜라니까. 그러니까 시공회귀를 밝혀도 믿어줄….”
“그 믿음은 진심에서 나오는 신뢰와는 근본적으로 다를 거예요.”
기분 탓이었을까.
내 말을 끊고 들어온 미네르바의 말이 유난히 무겁다는 느낌을 받았다.
고개를 들어보니, 미네르바는 형언할 수 없는 슬픈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제가 장담하죠. 그런 맹목적인 믿음은… 당신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아요. 상처면 모를까.”
그건 비웃음도 걱정도 아니었다.
일종의 예언처럼 들렸다. 내가 그렇게 될 거라고 확신하는 듯한 목소리다.
나는 이를 악물었고. 혀를 차며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됐다. 됐으니까 꺼져. 할 말 없어.”
“네. 꺼져드리죠. 안 그래도….”
미네르바는 순순히 물러나며 시선을 어딘가로 돌렸다.
나도 반사적으로 그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고.
곧장 눈을 부릅떴다.
“꺼지기 싫어도 꺼질 시간이 와 버렸네요.”
미네르바의 얄미운 목소리와 함께, 지평선 저쪽이 환하게 밝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곧 깨닫는다. 빛이 몰려오는 방향이 동쪽이 아닌 서쪽이다.
저건 여명의 빛이 아니다.
“기껏 조언해줬는데 다 날아가겠네. 역시 좀 강압적으로 나갈 걸 그랬어.”
옆에서 미네르바의 안타까운 탄식이 확신을 심어줬다.
그 빛.
의문의 폭발이다.
“이런 썅팔! 설배애애액!!”
나는 곧장 설백을 깨웠고. 비몽사몽한 그녀에게 필사적으로 방어 스킬을 종용했고. 가까스로 마왕에게 기룡을 붙여 보호막을 씌웠다.
그 뒤로는 기억이 없다.
온통 새하얗다.
* * *
[불사의 회귀점이 갱신되었다.]
[일시 - 대륙력 1108년, 1월 12일, 오전 11시 30분]
[장소 - 마르크트레스. 약속의 평원 상부지역, 소도시 케른 거주 지구]
“잠깐! 거기 서!!”
패널이 뒤늦게 등장하고 나서야, 나는 눈을 부릅뜨며 붉은 머리의 부랑자를 쫓았다.
부랑자는 내쪽을 슬쩍 돌아보나 싶더니 이내 으슥한 골목 쪽으로 진입했다.
나는 혀를 차며 곧장 놈의 뒤를 따라가려 했다. 하지만.
[명칭: 망자의 함]
[알림: 아이템 갱신 - 전생에서 망자의 함 저장 아이템이 갱신되었다.]
그 패널이 내 눈앞을 가려서 따라갈 수가 없었다.
나는 순간 숨을 삼켰고. 홀린 듯이 망자의 함으로 손을 가져갔다.
뽈칵. 망자의 함을 열고 내용물을 가만히 쳐다봤다.
[오이오이 다음 생의 정용쿤. 믿고 있다구 젠장!]
“…….”
그런 쪽지가 하나 들어있었다.
나는 할 말을 잊은 채 쪽지를 한동안 홀린 듯이 주시했다.
“저, 정용님? 갑자기 왜 그러세요!”
“… 어, 어어?”
가까스로 따라붙은 설백이 내 옷깃을 잡으며 걱정스럽게 쳐다본다.
나는 한동안 영혼 빠진 사람마냥 멍청한 탄성만 내질렀고.
“이 시국에 뭔 한본어 드립이야 미친놈아….”
전생의 나에게 맥없는 타박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