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비극인 줄 알았더니
“정용님. 정말 아무 말도 안 해주실 거예요?”
마르크트레스의 수도를 향해서 얼마나 걸었을까. 설백이 그런 말을 하며 나를 불러세웠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그 자리에서 멈춰섰다.
“뭐… 무슨 얘기를 해?”
“왜 이렇게 급하게 출발하시는 거예요. 너무 부자연스럽잖아요.”
“아니 그냥 뭐… 그렇게 넓은 나라도 아니니까 기왕 쉴 거면 수도까지 도착해서 쉬는 게 좋겠다 싶어서….”
“…….”
의심의 시선이 무척 따갑군. 얘 지금 하나도 안 믿는다.
그래 믿지 마라. 사실 내가 생각해도 너무 궁색한 변명이긴 해.
근데 어쩌냐. 대가리가 복잡해서 저거 보다 나은 변명이 생각나질 않는다.
머릿속이 온통 새하얗다.
정확히는 내 전생에서 봤던 그 새하얀 폭발로 한가득이었다.
그래서 나는 설백이 걸음을 멈춰버린 것도 한참 뒤에야 깨달았다.
“또, 혼자 생각에 잠겨 계시네요.”
“응?”
나는 설백의 말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설백은 형언할 수 없는 슬픈 표정으로 나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왜 저런 얼굴로 나를 보는 거지. 혼란에 휩싸인 내게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제가… 의지가 되지 않나요?”
“뭐시기?”
“그래서 아무것도 말씀해주시지 않는 건가요? 저는 정용님한테… 걸림돌인가요?”
“아니, 야. 갑자기 왜 급발진이야? 이니셜B야?”
오해는 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내가 설백을 믿지 못해서 말하지 않는 게 아니다. 오히려 설백을 믿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 것이다.
‘너도 인류의 공적 되고 싶냐?’
내가 사실을 밝히는 순간. 설백의 타이틀도 그것으로 바뀌게 된다.
시공회귀를 설명하려면 필연적으로 마왕 루시와 내 관계를 먼저 밝혀야 하고. 그것을 알게 되면 알기 전으로는 절대 돌아갈 수 없다.
나는 그녀가 굳이 이런 무거운 짐을 지는 걸 원하지 않는다.
그냥 야영할 때 요리만 잘 해주고. 어디 까지거나 하면 치료만 잘 해주면 된다.
“아니 설백. 그런 게 아니고….”
“아니면요? 대체 뭘 숨기고 계신 건가요 정용님.”
“… 엄….”
어찌한다.
갑자기 쟤가 왜 이렇게 집요하게 구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나는 대책을 강구했다.
곧 그럴싸한 대처법이 하나 떠올랐다.
“그러는 너도 뭐 하나 숨기고 있지 않아?”
“네, 네? 저…요?”
눈에는 눈. 비밀에는 비밀. 팩트에는 우기기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리고 설백의 당황하는 얼굴을 척, 가리켰다.
“그래. 내가 모르고 있을 줄 알았어?”
“제, 제가 무슨….”
설백은 눈에 띄게 당황하며 시선을 피했다.
방금까지의 당당하던 모습은 어디가고 안절부절 못하고 있다. 내 지레짐작이 잘 먹혀든 모습이다. 왠지는 몰라도 얼굴이 좀 붉어진 것 같다.
… 잠깐만. 효과가 좋은 건 괜찮은데… 이러면 진짜 뭐 숨기고 있다는 소리 아냐?
‘뒷맛은 좀 찜찜하지만….’
뭐 아무렴 어때. 세상에 털어서 먼지 하나 안 나오는 놈은 없다는 게 내 지론이다.
비밀이 요리 실력을 낮추지만 않으면 딱히 무슨 비밀이든 상관없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하고, 다시 걸음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빨리 따라와. 최대한 멀리 가야 되니까.”
“… 으으… 네에.”
설백은 여전히 어딘가 답답한 행색이었지만. 더 이상 뭐라 반박은 못하고 내 뒤를 따라왔다.
“어렵게들 사는구먼. 인간놈들. 듣고 싶은 말이 있으면 말할 때까지 패면 될 것을.”
우리 하는 꼴을 가만히 쳐다보던 마왕이 그런 말을 한다. 한심하다는 듯이 한숨을 쉬며 실실 웃는다.
그래. 내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한테는 꼭 그렇게 해주마.
속으로 다짐한 나는 걸음에 박차를 가했다.
* * *
밤이 되었다.
우리는 결국 길거리에서 야영을 하게 되었고. 설백의 기가 막힌 요리를 맛본 후에 모두 잠에 빠져든 상태였다.
물론 나는 이번에도 불침번이다. 아니, 사실상 혼자 거의 밤을 새다시피 하니 당직병인가.
“으흐드드 씨이벌. 존나게 춥네.”
나는 텐트 앞에 타오르는 모닥불 앞에서 벌벌 떨고 있었다.
그래. 집 안도 그렇게 추웠는데 바깥은 오죽하겠나. 면상이 쪼개지는 느낌이다.
‘이것도 이제 다 태워가네….’
참고로 이 드넓은 평야에는 딱히 태울 게 없어서, 변경백이 이별선물로 챙겨준 각종 교양서적이 땔감으로 불타는 중이다.
미안해요 변경백.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니 이해해주리라 믿습니다.
‘아니 X발. 근데 어지간히 추워야 말이지.’
나도 나였지만. 설백과 마왕의 열화와 같은 성원도 있었기에 변경백의 교양서적은 결국 야영 시작한지 한 시간 만에 화형대에 오르게 됐다.
“후우… 해는 언제 뜨나.”
나는 주머니를 뒤져 성녀의 문장을 꺼냈다.
한숨을 내쉬며, 이번에도 엠블럼을 손으로 빙글빙글 돌리고 있자니.
“… 와아. 그게 뭔가요 정용님?”
문득, 텐트 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설백이 흥미만만한 얼굴로 내 손에 들린 성녀의 문장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그녀의 까만 눈을 쳐다보다가, 툭 물었다.
“안 자냐? 불침번 하고 싶어?”
“… 잠이 안 와요.”
설백이 텐트 안에서 몸을 배배 꼬며 말했다. 나는 기가 막혀서 피식 웃었다.
“추워서?”
“어, 네에… 어떻게 아셨어요?”
“… 그야 뭐.”
당연히 전생에 들어서 알고 있는 거지만. 대충 얼버무렸다.
나는 여전히 몸을 바싹 웅크리고 있는 설백에게 내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
“일단 몸 좀 녹이고 자.”
“어, 네? 아, 아아. 네, 네에….”
설백은 내 제안에 갑자기 몸을 뻣뻣하게 굳히더니, 눈에 띄게 당황했다.
그녀는 한동안 허둥지둥하다 후다닥 내 옆으로 와서 불을 쬐었다.
타닥. 불티가 한껏 튀어오른다. 나와 설백은 멍하니 그 광경을 눈에 담았다.
문득 설백이 슬며시 미소를 머금었다.
“따듯하네요.”
“그러게.”
그리고 다시 침묵. 나는 말없이 불쏘시개로 모닥불을 뒤적였다.
딱히 어색하진 않았다. 비록 함께한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설백과는 마치 오랜 시간을 함께해온 것 같은 친근감이….
‘아니 잠깐. 이 상황 뭔가 익숙하다?’
나는 그제야 그것을 느끼고 퍼뜩 정신을 차렸다.
웬걸. 그냥 데자뷰가 아니었군. 이거 전생에 있었던 일이랑 거의 판박이로 흘러가잖아.
이 다음에 설백의 말이 분명 ‘어색해 숨지겠으니 재롱 좀 부려라 눈치 없는 새끼야’였던가.
… 그것보단 좀 순화됐던 것 같은데. 어쨌든 그런 느낌이었지.
‘필살기 장전 완료.’
애꿎은 머리만 만지작거리던 나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결단을 내렸다.
언제까지고 이런 식이면 모쏠 딱지 평생 못 뗀다. 가자 정용아. 너도 야부리 털 수 있는 남자라는 걸 보여주는 거다.
“설백. 계속 닥치고 있으려니 어색하다. 얘기나 좀 하자.”
“넷?! 아, 아! 네네! 그래요!”
설백은 화들짝 놀라며 그 말만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정말 오지게 어색했나 보군. 말 걸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좀 자신감을 얻어서 힘차게 말을 시작했다.
“이건 내가 군대에 있었을 때 얘긴데 말이야….”
“예? 군대? 정용님 군인이셨나요?”
“어. 한 2년 군인이었지. 그래… 때는 그러니까 3년 전이고. 내가 강원도라는 지역에 있었을 때야. 그 때도 이렇게 추웠어. 눈이 엄청 많이 내렸는데. 거기서 불꽃남자 김태선이라는 별명을 가진 상병새끼가 하나 있었….”
“그, 그만. 그만요. 거기까지 하죠!”
다급한 설백의 목소리가 내 말을 막았다.
‘777포병부대 불꽃남자 김태선의 전설’은 시작도 못한 채 끝을 맺었다.
나는 꿀먹은 벙어리가 되어 의문 섞인 눈빛을 보냈고. 그녀는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왜, 왠지 지금 안 끊으면 동틀 때까지 계속될 것 같아서….”
“…….”
촉이 좋군. 그 말대로 동틀 때까지 안 끝날 장대한 서사시였긴 하다.
그리고 그녀의 질색하는 반응을 보니, 역시 여자한테 군대얘기는 하면 안 되는 모양이다.
지식이 늘었군. 나는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용님.”
“엉.”
“좀 뜬금없을지도 모르겠지만요.”
“엉.”
“그… 감사해요. 정말로.”
“… 아?”
“지금 이렇게 제가 잡담을 할 수 있게 된 것도… 다 정용님을 만난 덕분이니까요.”
“…….”
이런 젠장. 이럴까봐 미리 선수를 친 거였는데. 결국 이쪽으로 흘러가냐?
나는 떨떠름한 시선을 설백에게 시선을 향했고. 설백은 그런 내 눈을 마주치더니 흠칫, 고개를 떨궜다.
“저는요. 정용님한테 갚지 못할 은혜를 입었지요.”
“앗… 아아.”
각 나왔다. 이거 딱 보니 전생의 그 ‘벗으라면 벗겠어요’ 패턴이 틀림없다.
‘아니 썅. 그 오글거리는 거절멘트를 재방송하라고?’
처음이야 아무 생각 없이 했지만 두 번째로 의식하고 하려니까 역겨운데.
아니 좀 많이 역겨운데. 토악질 나오는데?
‘아오 X발. 그냥 시원하게 한 따까리 해버려?’
그런 생각이 무심코 치고 올라왔다.
그 멘트를 두 번 다시 입에 담고 싶지 않아서 그런가, 생각보다 타당하게 느껴진다.
애초에 본인이 허락했는데 그거 거절하는 것도 좀 자존심 상할 수 있잖아?
그래. 하자. 이번 생에야말로 나는 진짜 루비콘강을 넘는다.
“설백!”
나는 패기발랄하게 설백의 양 어깨를 붙잡았다.
설백은 퍼뜩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넷! 말씀하세요!”
“하자!”
“… 네??”
이런. 마음이 너무 앞서갔군. 좀 추했다.
나는 눈을 감고 헛기침을 한 뒤, 머릿속으로 멘트를 한 번 정리했다.
그리고 청산유수처럼 말했다.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돼. 네 마음은 내가 이미 다 알고 있어. 그러니까 네가 원하는대로 하면 돼. 난 거부하지 않을 거니까….”
거기까지 말하고 나는 슬며시 눈을 떴고.
통나무에 몸을 기댄 채 세상모르게 자고 있는 설백을 시야에 담았다.
“…… 설백?”
“… 으으음.”
“…….”
숙면 중이군. 불러도 안 깨고 잠꼬대를 하고 있다.
지금껏 허공에 대고 한 따까리 해보자고 개추하게 입을 털었던 나.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엄청난 자괴감이 엄습했다.
“끄, 오오오….”
나는 그 자리에서 떼떼굴 구르며 머리를 박박 긁었다.
신이 있다면 나를 죽이거나 이 대륙을 터뜨려라. 지금 당장.
그래 죽자. 기억을 잃어버리자. 망자의 함에는 ‘절대 기억 되찾지 마라’라고 남겨놓는 거야. 그럼 지금의 흑역사는 없었던 일로….
“못 본 사이에 개그맨 다 됐네요 당신?”
혼자 머리를 쥐어싸매고 바닥을 구르는 와중. 그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모르게 모든 행동이 정지했다.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이, 목소리….”
전혀 그립진 않지만 꼭 다시 한 번 듣고 싶었던 목소리.
기왕이면 내 손으로 두들겨 패서 우는 목소리를 듣고 싶었던, 망할 여자의 목소리.
나는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퍼뜩 돌렸고.
“안녕, 1억 6341만 7413번째 용사님. 오랜만이네요.”
거기엔 똥털의 개년… 아니, 어두운 금발의 아신.
미네르바가 홀연히 나타나 방글방글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