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여긴 누구인가
“저… 저는요. 정용님한테 갚지 못할 은혜를 입었지요.”
“음? 아. 아아.”
그 소리였군.
아무래도 설백은 할센베르크 성에서 나한테 구원받은 걸 굉장히 감사하는 모양이다.
나는 낯이 간지러워져서 곧장 손사래를 쳤다.
“아니. 나도 나 좋으라고 한 거니까 그렇게 생각하지 마라.”
이거 순도 100%짜리 팩트다.
내가 낯이 간지러운 건,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양심이 찔려서다.
“하, 하지만 저희 고향에선 은혜를 입으면 어떻게든 갚아야만 해요. 사람 된 도리니까요.”
귀찮은 고향 풍습이다. 당사자가 싫어도 갚아야 하다니. 강박증이냐?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대충 대답했다.
“뭐, 갚고 싶으면 갚던가.”
“예에. 그래서… 저….”
설백은 말을 얼버무리더니 내쪽으로 성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비좁은 내 소파 쪽으로 다가오더니. 이내 다소곳이 밀착해 앉는다.
‘미친?’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체취에 순간 숨을 멈췄다.
설백은 한참을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이내 내쪽으로 얼굴을 가까이하며 말했다.
“… 답례를, 드리고 싶어요. 제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요.”
그렇게 말하는 설백의 눈가는 촉촉했고, 얼굴은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새빨갰다.
이 정도로 가까워지니 확실히 알았다. 모닥불 때문에 빨간 게 아니다.
그녀는 절찬리에 부끄러워하는 중이었다.
“… 뭐든지?”
“네. 뭐든지.”
그녀의 확고한 대답을 듣고 나니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진정이 안 된다.
설백이 지금 하는 말의 의미를 모를 정도로 나는 병신이 아니다. 만화 주인공도 아니고 무슨. 그녀도 만화 히로인 아니니까 내가 아는 그 의미로 말한 것 맞겠지.
“정용님… 무슨 소원이든, 말씀해주세요.”
설백이 어깨를 파르르 떨더니, 내게 몸을 맡기듯 기대왔다.
게임셋. 이젠 이 정도면 오해하는 게 더 힘든 지경이다.
“음… 그, 어….”
자 그럼. 검은 생머리의 아리따운 미녀께서 이렇게 멍석까지 깔아줬겠다.
길었던 동정생활을 졸업해볼까? 나쁘지 않지. 솔직히 24살이면 졸업할 때도 되긴 했어.
됐다마다, 오히려 몇 년 꿇은 수준이지. 요즘은 중고딩도 조기졸업 많이 하더만.
‘그래. 가자. 가즈아!’
이때 아니면 언제 나한테 이런 기회가 오냐. 이 정도의 미녀다.
미녀 아니라도 나 좋다고 저렇게 어필해주는 사람 찾기가 쉬울 거 같냐 박정용?
나는 오늘 여기서 루비콘 강을 넘는다.
“그러면 말이야.”
“아, 네…!”
내가 말을 꺼내자 화들짝 놀라며 눈을 질끈 감는 설백.
그 모습을 보고 나는 결심을 굳혔다. 나도 모르게 탄식 어린 웃음이 흘러나왔다.
호구가 왜 호구인지 아냐?
대가리로는 뭐가 이득인지 뻔히 아는 상황에서도, 겉멋에 미쳐서 입에 발린 소리가 튀어나가니 호구인 거다.
“일단 기억만 해둬.”
“아… 네?”
“나중에. 진짜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너한테 소원 요구할 거니까. 일단 달아두라고.”
“아… 아?”
설백이 아리송한 얼굴로 고개를 연신 갸웃거린다.
그러다 내가 완곡하게 거절한 것을 깨달았는지, 고개를 푹 수그린다. 그녀는 그렇게 침몰한 채 한동안 입을 꾹 닫았다.
“…….”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내가 매력이 없나?’ 같은 생각만 안 했으면 좋겠다.
지금이라도 번복하고 한따까리 하자고 할까?
아니, 그건 진짜 인간적으로 너무 추하지 않나?
지금도 사실 격렬하게 갈등하고 있다니까. 솔직히 아까워서 미칠 것 같다.
‘X발 인생 뭐 있냐. 나는 내 나름의 철학이 있다 이거야.’
하지만. 목숨값으로 몸 받아가는 게 비겁하게 느껴져서 이러는 거다.
나를 좋아하지도 않는 여자를 빚을 앞세워서 취하면. 내가 악당이지 다른 게 악당이냐.
안다. 호구짓인 거.
근데 어떡하냐. 나는 이런 내가 존나게 멋지다고 생각해.
“…… 후후. 푸후훗.”
스스로 한탄하고 있자니, 문득 옆에서 나직한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설백이 웃고 있었다. 눈물을 닦아내며 웃는 모습은 퍽이나 귀여웠고. 그만큼 처량했다.
설백은 시원섭섭한 얼굴로 나를 보며 말했다.
“뭐랄까. 제가 예상한 대답이었는데… 솔직히, 그래서 실망스럽네요.”
“냅둬라. 난 뼛속까지 이래 처먹어서.”
“그럼요. 그런 사람이니까… 제가 이런 짓도 하는 거죠.”
설백은 시선을 돌려 창밖을 쳐다봤다. 그녀의 볼에 흐르는 눈물에 별이 비친다.
설백이 별안간 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네. 그럼 전 기다릴게요. 그 결정적인 순간이 올 때까지요.”
“… 그래. 목 씻고 기다려라. 네가 상상도 못할 소원을 빌 거니까.”
“어머. 무서워라.”
그녀는 익살스럽게 웃어넘기고는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추운 날씨가 무색하도록 따스한 설백의 체온이 느껴진다. 거의 반자동으로 엄한 생각이 치고 들어와서, 속으로 애국가 완창하며 애국자 모드로 돌입했다.
얼마나 그 상태로 굳어있었을까. 문득 설백이 내 팔을 세게 부둥켜 안으며 말했다.
“해가 뜨면요. 오늘 밤에 있었던 일은… 전부 잊어주세요.”
“그러지 뭐.”
“물론 힘드시겠지만… 이 일로 어색해지긴 싫어요. 그러니까… 네?”
“… 그러지 뭐.”
나는 앵무새 마냥 같은 말을 반복했고. 설백은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녀가 이불 속으로 들어가기 직전.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한 마디 내뱉는다.
“일어나면 웃는 얼굴로 맞아주세요. 저도 웃을 테니까.”
설백은 그 말만 남기고 후다닥 텐트 안으로 도망쳐 버렸다.
“… 그러지 뭐.”
나는 멍하니 창 밖을 쳐다보며 똑같은 말을 주워섬겼다. 설백은 슬쩍 웃더니 이내 몸을 누이고 낮은 숨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멍 때렸을까. 하얘진 머리를 정리하기 위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와 뭐야. 벌써 해 뜰 시간이냐?’
어느새 창문 너머로 눈부신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창밖을 바라보니, 멀리서 눈이 멀 것 같은 빛이 서서히 커지고 있었다.
대륙 서쪽에 가까운 나라인데 동트는 모습이 어째 미텔란트보다 선명한 느낌이다.
“나도 그럼 눈 좀 붙여볼까….”
찌뿌듯한 몸을 풀며 기지개를 켰다. 몸을 좀 풀고 주변을 정리했다.
마지막으로 손에 쥐고 있던 엠블럼을 배낭에 집어넣으려던 그 순간.
나는 눈을 부릅뜨고 엠블럼에 시선을 고정했다.
“어?”
엠블럼은 여전히 밝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의미하는 사실을 한참동안이나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해했을 때는, 언제나처럼 늦어있었다.
‘아직 아침이 아니야?’
그렇다면.
대체 밖에서 눈부시게 빛나는 저 거대한 빛 덩어리는….
대체 뭐란 말이지?
“이런 망할!”
이해와 동시에 위기감이 엄습했다.
아침이 밝은 것으로 착각할 정도의 엄청난 빛.
절대 정상적이지 않은 저 현상에서 나는 원인 모를 극심한 공포를 느꼈다.
“설백! 일어나!! 어서!”
“으어, 아? 저, 정용니임?”
나는 펄쩍 뛰어 설백을 흔들어 깨웠고. 단번에 판단했다.
이 상황에서 가장 먼저 지켜야할 것. 나는 비몽사몽한 설백에게 곧장 명령했다.
“방어스킬! 네가 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방어스킬을 루시한테 걸어! 지금 당장!!”
“네? 아, 그… 정용님. 갑자기 왜 그러시는지 이유나….”
“빨리! 시간이 없어!!”
“네, 네!”
설백은 여전히 영문을 알 수 없는 듯했지만. 내 진지한 얼굴을 보고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기백유화.”
파아앙! 설백이 짧게 중얼거리자 기룡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방어막을 형성했다.
방어막 안에서 안전하게 보호받는 마왕의 모습을 눈에 담자 마음이 좀 놓였다.
‘제길… 아무거나… 아무거나 좋으니까 넣을 만한 거…!’
나는 황급히 망자의 함을 꺼냈고. 주위를 샅샅이 뒤졌다.
하지만 마음이 초조해서 그런지, 망자의 함에 넣을만한 물건이 도통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이를 악물었고. 스르릉. 칼을 뽑았다.
곧 결단을 내렸다.
“끄윽…!”
엄청난 고통이 밀려왔지만 참았다.
망자의 함을 닫고 나서야 내 입에서는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쿠구구구.
그리고 그 순간. 문득 밖에서 그런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고.
경악한 나머지 입을 쩍 벌렸다.
“지미럴… 저게 대체…!”
구과과과!
장대한 폭발. 그리고 충격파와 함께 쏟아지는 새하얀 빛을 마지막으로 목격했다.
온통 새하얗다. 누군가의 비명이 희미하게 들리는 듯했다.
까마득해졌다.
* * *
[불사의 회귀점이 갱신되었다.]
[일시 - 대륙력 1108년, 1월 12일, 오전 11시 30분]
[장소 - 마르크트레스. 약속의 평원 상부지역, 소도시 케른 거주 지구]
“잠깐! 거기 서!!”
패널이 뒤늦게 등장하고 나서야, 나는 눈을 부릅뜨며 붉은 머리의 부랑자를 쫓았다. 부랑자는 내쪽을 슬쩍 돌아보나 싶더니, 이내 으슥한 골목 쪽으로 진입했다.
나는 혀를 차며 곧장 놈의 뒤를 따라가려 했다. 하지만.
[명칭: 망자의 함]
[알림: 아이템 갱신 - 전생에서 망자의 함 저장 아이템이 갱신되었다.]
그 패널이 내 눈앞을 가려서 따라갈 수가 없었다.
나는 순간 숨을 삼켰고. 무언가에 홀린 듯이 망자의 함으로 손을 가져갔다.
뽈칵. 망자의 함을 열고 내용물을 가만히 쳐다봤다.
“…….”
엄지 손가락.
손가락 하나가 덩그러니 들어있었다.
크기와 길이로 봤을 때… 아마 내 게 아닌가 싶다.
“저, 정용님? 갑자기 왜 그러세요!”
“… 어? 어어?”
가까스로 따라붙은 설백이 내 옷깃을 잡으며 걱정스럽게 쳐다본다.
나는 한동안 영혼 빠진 사람마냥 멍청한 탄성만 내질렀고.
망부석처럼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