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나는 어디인가
제법 호화로운 여관의 방.
나는 벽난로 앞에 앉아 추위에 떨고 있었다.
“흐으드드드. 씨이벌. 존나게 춥네.”
케른에 도착한 뒤, 회귀점만 세 번을 갈아치우고.
나는 곧장 근처에서 가장 호화로운 여관에 설백과 마왕을 데리고 틀어박혔다.
작전명 ‘이불 밖은 위험해.’
나는 자칭 평화주의자요, 안전주의자다. 또한 존버는 언제나 승리한다고 믿고 있다.
그러니까 한동안 위험 요소가 종식될 때까지 이곳에서 존버를 탈 생각이었다.
‘위험은 어디서 어떤 형식으로 닥쳐올지 몰라.’
잘 때라고 예외는 아니다.
그러니 당연히 불침번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마왕은 아무래도 못 미덥고. 설백에겐 설명할 거리가 궁색하다.
뭐라 변명하면 경비도 삼엄한 초호화 여관에서 불침번을 서게 만들 수 있냐. 나는 잘 모르겠다.
결국 불침번은 온전히 내 몫이 될 수밖에 없었다.
“후우… 해는 언제 뜨나.”
나는 주머니를 뒤져 성녀의 문장을 꺼냈다.
야간 전투능력을 향상시켜주는 특전 아이템. 이 문장은 밤이 깊을수록 더 밝게 빛나고, 아침이 밝아올수록 빛이 사그러든다. 그래서 대략적인 시간 가늠이 가능하다.
시계가 없는 내게는 이것만한 꿀템도 없다.
‘으음… 이 정도 밝기면….’
대충 가늠해보니 한 4시쯤 됐다. 앞으로 해 뜨려면 최소 2시간은 남은 듯하다. 십창 남았군.
한숨을 내쉬었다. 은은한 달빛을 내뿜는 엠블럼을 손으로 빙글빙글 돌리고 있자니.
“… 와아. 그게 뭔가요 정용님?”
문득, 침대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설백이 흥미만만한 얼굴로 내 손에 들린 성녀의 문장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그녀의 까만 눈을 쳐다보다가, 툭 물었다.
“안 자냐? 불침번 하고 싶어?”
“… 잠이 안 와요.”
설백이 이불 안에서 몸을 배배 꼬며 말했다.
처음에 같은 방에서 잔다고 내가 고집부릴 땐,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여선 나를 두들겨 패더니. 이젠 그걸로 뭐라 하진 않을 생각인가 보다. 그나마 다행이군.
나는 기가 막혀서 피식 웃었다.
“새벽되니까 소녀감성 살아나고 그러냐?”
“아뇨. 그게 아니고… 너무 추워서 잠이 안 와요.”
“…….”
그건 좀 인정이다. 몸을 배배 꼬는 것도 추워서 그런 거였냐?
이 세상이 아무래도 난방 방식이 미개하다 보니 잘 때 추운 게 생각보다 큰 문제긴 하다. 나름 초호화 여관에서도 이러면 다른 데는 어떻다는 거야. 노숙이랑 사실 별 차이 없는 거 아닐까?
나는 여전히 몸을 바싹 웅크리고 있는 설백에게 내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
“일단 몸 좀 녹이고 자.”
“어, 네? 아, 아아. 네, 네에….”
설백은 내 제안에 갑자기 몸을 뻣뻣하게 굳히더니, 눈에 띄게 당황했다.
한동안 허둥지둥하던 그녀는, 이내 후다닥 내 옆으로 와서 난로의 불을 쬔다.
“…….”
“…….”
불꽃에 비친 그녀의 얼굴이 발갛게 익어 있었다. 조명 때문인가? 나는 대수롭잖게 넘겼다.
타닥. 불티가 한껏 튀어오른다. 나와 설백은 멍하니 그 광경을 눈에 담았다.
문득 설백이 슬며시 미소를 머금었다.
“따듯하네요.”
“그러게.”
그리고 다시 침묵. 나는 말없이 불쏘시개로 모닥불을 뒤적였다.
딱히 어색하진 않았다. 비록 함께한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설백과는 마치 오랜 시간을 함께해온 것 같은 친근감이 든다.
“…….”
“…….”
아마 할센베르크부터 여기까지. 몇 번이나 사선을 함께 넘어온 전우이기 때문이겠지.
그렇다. 우리는 어느새 굳이 말을 섞지 않아도 마음이 편해지는 그런 사이가….
“저, 정용님. 무슨 말씀이라도 해보세요. 어색해서 미칠 것 같아요.”
“…… 어. 그래.”
아니었군. 나만 착각하고 있었구나. X발 뻘쭘해라.
… 근데 이럴 땐 뭔 얘기를 해야 하지. 군대 얘기 해줄까? 극혐할 것 같은데. 내가 아무리 모쏠동정이라지만 그 정돈 안다.
애꿎은 머리만 만지작거리고 있자니, 문득 설백이 옆에서 꿍얼거렸다.
“앞으로… 저희는 어떻게 되는 걸까요.”
“음?”
“그냥,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일단은 정용님의 지인을 찾는다는 목표가 있지만… 그 다음은요?”
“그 다음이라니. 그 다음이 필요해?”
“정용님은 뭔가… 정해놓은 목표가 있으세요?”
설백이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퍽이나 진지하다.
갑자기 왜 이런 진지토크지. 새벽감성이 폭발했나.
‘하긴. 그럴 법도 한가?’
밤하늘에 별은 총총하고, 모닥불은 타오르고. 루시는 세상 모르게 쳐자는 와중에 남녀가 단둘이 난로불을 바라보는 상황. 없던 감성도 샘솟을 법하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면서도 순순히 대답해줬다.
“몰라. 지인들 다 찾고 나면 그냥 쉴 거야.”
“네에?”
“어디 한적한 데 짱박혀서 없는 듯이 살다 죽지 뭐.”
내 인생계획이 퍽이나 황당하게 들렸는지, 설백은 눈을 크게 뜨며 쳐다봤다.
‘농담이시죠?’라고 묻는 눈빛. 나는 ‘농담 같냐?’라는 진지한 눈빛으로 대답해줬다.
“지, 진심이시군요.”
“지, 진심이다 왜.”
“아이, 따라하지 마세요….”
그래, 마음껏 이상하게 여겨라. 난 내 인생 살 뿐이다.
어차피 현 시점에서 지인들 찾는 것 외에 내게 큰 목적은 없다.
애초에 지구에서 살 때도 그랬다. 대의도 없고 명분도 없고 목표도 없이, 덮어놓고 죽었다 살아난 채 내동댕이쳐진 인생이니까.
“설백. 사람 쉽게 바뀌는 게 아니야.”
그렇다.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죽었다 살아나도 똑같더라.
열심히 살 생각이 없는 놈은 죽다 살아나도 열심히 안 사는 법이다.
“까놓고 내가 최종적으로 바라는 건. 돈 두둑히 챙겨서 어디 한적한 촌동네 눌러앉아 띵가띵가 먹고사는 거야.”
“아. 그, 그렇군요….”
“돈은 이 기세면 조만간 띵가띵가에는 충분할 거 같고… 남은 건 좋은 터 잡는 것뿐이군.”
“아하하….”
어쩌다 보니 시험의 장막에서 친해진 내 동료들과 함께 놀고먹으면 더 좋고.
본인들이 싫다 그러면 거기서 끝인 거고. 나라도 꿀 빨 거다.
적어도 난 이 세상의 평화나 안위에 이바지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정말 요만큼도. 1도 없다.
마왕? 마족? 디아나? 불사의 마왕?
다 조까라 그래라. 죽어도 끝까지 꿀만 쪽쪽 빨다 죽을 테다.
언제나 누누이 다짐하지만, 더 이상 내 인생에 사서 호구짓하는 상황은 사절이야.
‘그걸 위해서라도. 루시를 지금부터 조교(?)시켜놓을 필요가 있지….’
세계정복이니 어쩌니 하는 헛짓거리 못하게 막아야 한다.
조기교육(?)으로 세뇌시킬 거다. 평화가 최고고 태평성대 만만세라고. 내 원대한 상팔자 플랜의 첫 걸음은 바로 거기서 시작한다.
나는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가, 문득 설백에게 물었다.
“그러는 너는.”
“어, 예?”
“넌 뭐가 하고 싶은데. 삽질하다 끌려온 나랑 다르게, 뭔가 목표라도 있으니까 아신이랑 계약을 했을 거 아냐.”
“아… 저, 저는요.”
생각해보면 설백도 이 세상에 전생했다는 건. 전에 살던 본래 세계에서 한 번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얘기다. 설백도 이렇게 보니 한 터프 하는구만.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한참 뜸을 들이던 설백이 이내 결심한 듯이 입을 열었다.
“저는… 말 그대로 용사다운 일을 하면서 살고 싶어요.”
“용사다운 일?”
“네. 어려운 사람을 돕고, 곤경에 빠진 사람들을 구해내는… 뭐, 그런 일이요. 저는….”
거기까지 말한 설백은 이내 슬픈 듯이 눈꼬리가 쳐졌다.
갑자기 말이 끊기자 내가 의아함을 담아 쳐다봤고. 이내 고개를 든 설백의 얼굴에는 슬픔을 삼킨 미소가 걸려 있었다.
“저는… 제가 반드시 지켜야 할 것들을 지키지 못하고 죽어버렸어요. 그게 너무 분해요. 그래서… 이번 생에는 최소한 제가 지켜야할 것들을 지키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백만 불짜리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설백.
그건 용사다운 일이라고 쓰고 호구 짓이라고 읽는다고. 한 마디 하려다 관뒀다.
‘뭔가 사연이 있나 보지.’
아무렴 내가 남의 인생모토에 왈가왈부할 자격은 없는 법이다. 깊게 파고들지 말자.
대신 호구 인생 선배로서 조언이나 한 마디 해주기로 했다.
“힘들걸. 괜히 이기적인 놈들이 잘 사는 게 아냐.”
“그렇기에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세상을 바꾸는 건 쉽게 사는 사람이 아니라 어렵게 사는 사람인 걸요.”
어디서 개돼지들 구워삶으려는 대기업 회장 자기계발서 같은 소리를 주워들었대. X팔.
뼛속 깊이 한탄하고 있자니, 문득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설백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그… 정용님.”
“엉.”
“좀 뜬금없을지도 모르겠지만요.”
“엉.”
“그… 감사해요. 정말로.”
“엉?”
“제가 이런 꿈을 가지게 된 것도… 이렇게 입에 담을 수 있게 된 것도. 다 정용님을 만난 덕분이니까요.”
“어엉?”
정말 뜬금없군. 본인 말마따나.
나는 해괴한 사람 보듯 설백에게 시선을 향했고. 설백은 그런 내 눈을 마주치더니 흠칫, 고개를 떨궜다.
기분 탓인가. 그녀의 귓가가 유난히 새빨갛게 빛나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