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GOTCHA
“정용님! 정용님 듣고 계세요?”
나는 설백의 외침에 상념에서 간신히 벗어났다.
퍼뜩 정신을 차리자 설백이 내 눈앞에서 손을 휙휙 흔들고 있었다.
“아까부터 정신이 완전 콩밭에 가 계신데요.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나요?”
“음… 뭐, 아니. 그냥….”
순간 설백에게 말할까 말까 속으로 고민했다.
무수한 갈등이 오갔다. 찬반이 스무 번쯤 대립하다 결국 반대가 승리했다.
괜히 설백까지 말려들게 하고 싶지 않다. 그게 가장 큰 이유였다.
“뭐 그건 그렇고. 아까 샀던 장신구는 뭐야?”
뇌내 회의 결과가 그렇게 되었으니, 일단 말을 돌리기로 했다.
나는 그녀가 손에 쥐고 있던 작은 상자를 가리키며 물었다. 약 2시간에 걸쳐 설백이 고른 장신구가 바로 저것이다.
정신이 없다 보니 일단 계산만 먼저 했는데. 생각해보니 뭔지 확인도 안 하고 덥석 사준 꼴이 되었다.
“이거 말인가요? 반지예요.”
설백은 상자를 내 앞으로 내밀며 자랑스레 말했다.
나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니 그러니까 무슨 반지냐고.”
“그게… 사실 저도 잘 몰라요. 헤헤.”
전혀 예상치도 못한 대답이 나온 나머지 눈썹을 튕겼다.
“뭐시기?”
“이 상자 안에 여러 반지 중에 무작위 반지가 하나 들어있대요. 값비싼 전설아이템부터 싸구려 일반아이템까지 같은 가격! 독특한 판매방식이지 않나요?”
“… 야. 그거….”
가챠 시스템이잖아.
벌써 이런 상술을 써먹는 상인이 등장했다고?
운빨X망겜이 지구를 정복하더니 이세계까지 역병처럼 퍼져나갔단 말인가?
이거 퍼트린 새끼는 지구에서 온 용사가 분명하다. 그런 확신을 가졌다.
흑우로 전락한 설백의 모습을 보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던 그 때.
“저는 희귀아이템 목록 중에 있었던 반지 하나가 마음에 들었거든요. 가운데 박힌 검은 보석이 너무 예뻐서, 그게 나왔으면 좋겠어요!”
그런 말을 하며 반짝반짝 눈을 빛내는 설백이 거기에 있었다.
당연히 그걸 지켜보는 나의 안타까움은, 가챠에서 쓰레기 뽑을 확률처럼 떡상했다.
“설백. 혹시 물욕센서라고 아냐?”
“물욕… 센서요?”
“최대한 그게 안 갖고 싶은 것처럼 마인드 컨트롤해. 호구 선배로서 해주는 마지막 조언이다.”
“???”
물욕센서 피하기. 전문용어로 기대 컨트롤.
당연히 실제로 효과가 있는 건 아니지만. 10번, 100번을 뽑아도 원하는 물건이 안 나오는 상황에서 멘탈 관리할 때 좋은 스킬이다.
“후후후. 과연 뭐가 나올까아…?”
그리고 말씀드리는 순간. 드디어 설백이 상자를 조심스럽게 열기 시작했다.
뽈칵. 상자가 열렸다. 아무 생각 없이 그걸 지켜보던 나는….
‘뭐야 X발…!’
어느 순간 퍼뜩 검에 손을 가져갔다.
상자 안에서 순간적으로 덮쳐오는 찌릿한 감각에 숨을 삼켰고. 퍼뜩 마왕을 쳐다봤다.
그리고 마왕 역시 같은 것을 느꼈음인가. 그녀도 긴장된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야 루시. 방금 느낌은…!”
“… 네 반응을 보니, 아무래도 내 착각이 아닌 모양이로구나?”
루시가 불쾌하다는 듯이 설백의 손에 들려있는 작은 반지에 시선을 박았다.
그리고 한 마디 얹었다.
“마왕의 냄새. 그것도 나 정도로 강력한 마왕의 냄새가 난다.”
“…!”
“정확히 어떤 놈이 남긴 냄새인지는 나도 모르겠다만… 아무튼 보통 위험한 느낌이 아니구나.”
그 말대로였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듯한 전율. 이 정도는 돼야 진짜 사천왕이지 싶은 압도적인 무력감.
그것이 느껴졌다.
“아이 뭐야. 엄청 낡은 걸 보니 꽝인가 보네요… 아쉬워라.”
아무래도 설백은 아무 감흥이 없는 것을 보니 그것을 느끼지 못한 듯했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곧장 미미르의 눈을 발동시켰다. 갑자기 등장한 저 미친 존재감의 아이템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스르륵. 언제나처럼 패널이 떠올랐다.
[아이템 정보]
[명칭: 이스그라드의 전조]
[보정치: ???가 ???하며 남긴 ???. ???의 개조로 ???는 대신, 주인에게 ???다.]
[상세: ???]
[강화 가능 회수: 0]
온통 물음표 투성이다.
지금 내 미미르의 눈 레벨로는 확인할 수 없는 수준이라는 건가.
내가 입맛을 다시는 그 순간.
[불사의 회귀점이 갱신되었다.]
[일시 - 대륙력 1108년, 1월 12일, 오전 11시 12분]
[장소 - 마르크트레스. 약속의 평원 상부지역, 소도시 케른 상가 1지구]
회귀점이 또 한 번 갱신되었다. 오늘만 두 번째였다.
나는 불길한 압박감을 뿜는 시커먼 반지를 부릅뜬 눈으로 주시했다.
* * *
“이스그라드? 태고룡의 반지란 말인가?”
내가 반지의 이름을 루시에게 말했더니 그런 반응이 나왔다.
가만히 생각에 잠겨 무슨 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한 루시. 나는 설백 몰래 그녀에게 얼굴을 갖다대고 귓속말을 날렸다.
“그게 뭔데. 태고룡이면 드래곤이냐?”
“그렇다. 이스그라드는 최후의 드래곤의 이름이다.”
“최후의 드래곤?”
“내가 마녀한테 만들어지기도 전에 용은 이미 멸종했다만. 그 중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던 용이 바로 이스그라드다. 그래서 최후의 드래곤이라 불리지.”
최후의 드래곤이라. 굉장히 간지나는 타이틀의 소유자군.
나는 혼자 고개를 끄덕이는 루시에게 계속 물었다.
“이 반지는 뭐 짐작가는 거 있냐?”
“음….”
루시는 설백이 끼운 반지를 유심히 쳐다보며 침음을 흘렸다.
한참을 그렇게 쳐다보던 그녀는 결국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저었다.
항복표시였다.
“모르겠구나. 일단 내 기억에 없는 걸 보면 아마 제작된지 30년이 채 안 된 물건일 가능성이 높다. 부활 이전에 저런 물건을 본 기억은 없어.”
“네 기억이 잘못됐을 가능성은 왜 생각도 안 하냐?”
“떽. 내 기억력을 무시하지 말거라!”
기억력엔 그렇게 자부심이 있으면서 지능은 왜 그 모양이냐. 한 마디 해주려다 참았다.
내가 석연찮은 마음으로 설백의 반지 끼운 손을 쳐다보고 있자니.
“용사. 일단 저 계집한테서 반지 빼앗아라.”
문득, 루시가 내게 툭 말했다.
전후사정 앞뒤맥락이 없는 돌발발언. 나는 눈썹을 곧장 튕겼다.
“뭐? 왜.”
“저런 엄청난 힘을 가진 반지를 저 계집이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으냐?”
“… 그, 그건 그렇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정보가 적으니 네놈이 관리해야 하지 않겠느냐. 여벌 목숨도 있는 놈이니까.”
“…….”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루시의 입에서 의외로 정상적인 소리가 튀어나와서 그랬다.
“… 왜 갑자기 대견하게 쳐다보냐 용사. 왠지 불쾌하다.”
내 표정에서 뭔가 느꼈는지 루시가 괜히 내 종아리를 툭툭 걷어찼다.
사실대로 말하면 또 자존심에 스크래치 나겠지. 그녀가 또 풀죽는 것도 귀찮으니, 대충 얼버무려주려고 입을 열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
하지만 거기서 툭, 무언가 나와 설백 사이로 재빨리 지나쳤다.
사람이었다. 거적을 두른 사람. 붉은 머리가 후드 안에서 찰랑이는 게 순간적으로 보였다.
불식간에 어깨빵을 당한 설백은 곧장 앞으로 기울어졌다.
“꺗…!”
물론 넘어지기 직전에 내가 잡아냈다.
이것이 바로 피지컬. 민첩성의 차이다. 설백은 지능캐라서 민첩이 낮다 보니 돌발 상황의 반응속도가 좀 늦다.
“아, 그… 고, 고마워요 정용님.”
“별걸.”
나는 설백을 일으켜준 뒤 달려나가는 거적때기의 인물을 가만히 주시했다.
사과도 안 하고 빤스런이라니. 괘씸해서 따라가 한 대 패줄까 생각도 했지만. 이내 퍼뜩 먼저 생각이 든 것은 바로 가방이었다.
‘설마 소매치기…?’
나는 황급히 배낭과 파우치를 더듬었다.
하지만 딱히 열린 흔적도 없었고. 혹시나 싶어 내용물을 봤지만 돈은 그대로 가방 안에 있었다.
진짜 급해서 뛰어가던 사람이었나. 나는 머리를 긁적였고.
[불사의 회귀점이 갱신되었다.]
[일시 - 대륙력 1108년, 1월 12일, 오전 11시 30분]
[장소 - 마르크트레스. 약속의 평원 상부지역, 소도시 케른 거주 지구]
그 패널이 뒤늦게 등장하고 나서야, 나는 눈을 부릅뜨며 부랑자를 쫓았다.
“잠깐! 거기 서!!”
나는 고함을 외치며 총알처럼 달려나갔다. 부랑자는 내쪽을 슬쩍 돌아보나 싶더니, 이내 으슥한 골목 쪽으로 진입했다.
나는 혀를 차며 곧장 놈의 뒤를 따라가려 했다.
“저, 정용님? 갑자기 왜 그러세요!”
하지만 그 순간. 설백이 내 소매를 잡았다.
순간 초조함에 소리를 지를 뻔했지만. 걱정스럽게 나를 올려다보는 설백의 눈을 보니 그럴 생각도 쑥 들어가 버렸다.
“… 후우.”
대신 내 입에서 나온 건 한숨이었다.
뒤늦게 부랑자가 사라진 골목쪽으로 진입해봤지만. 거적때기의 부랑자는 이미 시야에서 말끔히 사라진 뒤였다.
나는 음습하게 뻗은 골목의 어둠을 노려보며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 세 번째.’
이건 더 이상 웃어넘길 수 없는 수준이었다.
나는 마른 침을 삼키며 한 동안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