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플랜 B와 좀B
“마, 말한다… 말한다고…. 나, 나는… 카, 카사스… 카사스의 사도. 위대한 카사스의 의지를 받드는… 사, 사도 중 하나다.”
아무것도 모르던 제르미 발킨이 ‘척척박사 제르미’로 스킨을 바꿔 끼우기까지. 그 뒤로 약 1시간 정도가 걸렸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흡족하게 미소를 띄웠다.
“척척박사 제르미는 뭐든지 안다. 궁금한 걸 질문하면 뭐든 다 알려주지.”
“…….”
“그렇지 척척박사?”
“…… 그, 그래. 그렇다.”
나는 제르미 들으라고 크게 혼잣말을 했고. 제르미는 긴장한 얼굴로 마른 침을 어렵게 삼켰다.
좋아. 스킨이 잘 적용됐군. 나는 곧장 척척박사 제르미 스킨을 시범기동 해보기로 했다.
“너. 목적은 뭐냐.”
“… 내 목적은… 네놈 일행의 감시와 보고다.”
대충 예상한 대답이 튀어나왔다. 문제는 지금부터지.
나는 공포에 질린 제르미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질문했다.
“왜.”
“… 뭐라고?”
“왜 감시하냐고. 우리가 뭘 잘못했길래.”
“그건… 나도 모른다.”
“…… 쯧.”
스킨 적용이 덜 됐군. 버그인가? 나는 곧장 대기하던 루시에게 턱짓을 했다.
그러자 먼저 턱짓의 의미를 간파한 제르미가 헐레벌떡 목청을 높였다.
“지, 진짜야! 나, 나, 나는 말단 사도야! 내가 명령받은 건 진짜 너를 감시하라는 것뿐이다! 그 외에는 정말로 아는 바가 없어!”
“흐음. 그래?”
“그래! 제발! 그러니 제발 B코스만은…!”
눈물콧물 질질 짜며 애걸하는 모습을 보니 거짓말은 아닌 듯하다. 저게 거짓말이면 쟤는 대종상영화제 남우조연상 받아야 된다.
나는 주먹을 틀어쥐어 마왕에게 정지 사인을 보냈다.
“루시. 스탑.”
“… 쳇.”
마왕은 아쉽다는 얼굴로 입맛을 다시더니. 이내 슬며시 웃으며 제르미의 뺨을 살짝 어루만졌다.
“운이 좋았구나 용사 나부랭이. 후후.”
“…….”
제르미는 공포가 가득 담긴 얼굴로 진저리를 쳤다.
어쨌든 이렇게 되면 질문의 방향성을 좀 바꿀 필요가 있다. 나는 어느 순간 툭 물었다.
“네가 있다는 카서스는 원래 뭐하는 데냐.”
“카서스가 아니고 카사스다.”
이젠 스킨이 말대답까지 하는군. 나는 곧장 쌍심지를 추켜세웠다.
“새꺄 그게 그거지. 꼬투리 잡을래?”
“미, 미안하다! 제발 B코스는 그만…!”
놈은 내 심기가 불편해 보이자 곧장 사과를 박았다.
… B코스의 트라우마가 어지간히 박힌 모양이군. B코스무새가 되었다. 거의 마왕에게 ‘진실의 방’을 언급할 때와 비슷한 수준이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탈선한 이야기를 바로잡았다.
“어쨌든 거기 원래는 뭐하는 데냐고. 나만 감시하려고 생긴 조직은 아닐 거 아냐.”
“우리는… 이 세상의 무너져가는 균형을 바로잡는 조직이다.”
“… 균형?”
뭔가 뜬구름 잡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참고로 난 저런 별나라 꿈동산 얘기를 제일 싫어한다. 말이란 자고로 쓸데없는 미사여구를 쳐내고 간단명료해야 되는 법이다.
나는 보란 듯이 에테르 병을 찰랑거리며 놈의 얼굴에 들이밀었다.
“10초 내로 뭔 소린지 알기 쉽게 정리해라. 주어 목적어 서술어.”
“뭐, 뭣이?”
“10. 9. 8….”
“자, 잠깐! 그, 그러니까…!”
노골적인 협박에 제르미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내가 손가락을 하나씩 접기 시작했고. 놈은 눈알을 팽팽 굴리다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
“요, 요컨대 마왕과 용사의 세력 균형을 수호한다는 말이다!”
“주어 목적어 서술어.”
“카사스는! 마왕과 용사를! 어느 한 쪽이 우세해지지 않도록 조율한다! 됐냐!”
제르미가 내 갑질을 못 참고 결국 빽 소리 질렀다.
일단 나올 정보는 다 나왔으니 딱히 신경쓰지 않았지만. 정리되고 보니 이건 좀 충격적인 소리다.
나도 모르게 입을 굳게 닫고 있다가, 이내 얼빠진 의문이 흘러나왔다.
“중재하다니. 넌 용사잖아. 그런데 용사 쪽도 못 이기게 막는다고?”
“… 그렇다.”
“아니. 대체 왜?”
“그건….”
제르미가 말을 꺼내기 위해 입을 연 순간.
“쿨럭.”
기침 소리가 터졌다. 제르미의 벌어진 입에선 말 대신 핏덩이가 분수처럼 쏟아졌다.
나도 제르미도, 그리고 마왕도. 갑작스런 사태에 멍하니 바닥의 피를 쳐다봤다.
“… 커, 헉?”
의문과 고통에 찌든 신음이 새어나오는가 싶더니.
이내 풀썩. 제르미의 고개가 떨궈졌다. 동시에 온몸에서 힘이 축 늘어진다.
나는 얼떨떨하게 제르미에게 시선을 박고, 미미르의 눈을 발동시켰다.
[명칭: 제르미 발킨]
[별칭: 151668943번째 용사, 카사스의 사도, 달인]
[LV. 92]
[체력: 0/1100 ?마력: 0/750]
체력이 0을 가리키고 있다.
죽었다. 진짜 죽은 것이다.
― 혀가 긴 사도는 카사스에 필요없다. 제르미 발킨.
그리고 죽은 제르미 발킨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건 기괴하게 변조된 누군가의 음성.
나는 순간 피가 얼어붙는 느낌에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었다. 갑자기 내 앞에서 차가운 주검으로 변해버린 제르미 발킨 때문이었다.
방금까지 멀쩡하게 대화하고 있었던 사람이 갑자기 시체가 되었다.
이상하다. 나 자신도 수없이 죽어봤으면서. 그 사실이 상상 이상으로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주, 죽어서 시간을….’
거기까지 생각하고 이내 헛웃음을 삼켰다.
그건 개소리다. 돌아가서 뭐. ‘미행 의심자를 발견해도 아는 척하지 마라’라고 망자의 함에 넣기라도 할 건가?
제르미 발킨이 살아있으면, 우리를 어떻게 대할지도 모르면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건.’
생판 모르는 남이다. 나는 내 손에 있는 것들 지키기도 벅찬 사람이다.
나는 딱 잘라 말해서 영웅이 아니다. 모든 생명을 살릴 수는 없다.
“… 뭐냐고 대체.”
나는 복잡해지는 머리 때문에 괜히 시체에 대고 짜증을 부렸다.
그러자니 문득 움찔, 시체가 움직였다.
“오메 X발?!”
언데드 트라우마가 있는 나다 보니 생각보다도 몸이 먼저 움직였다.
촤아앙! 양쪽 허리에서 흑백의 쌍검을 뽑아든 나는 그대로 제르미의 시신에 칼을 겨누었다.
“방금 분명…!”
내 눈을 의심할 새도 없이, 시체는 천천히 꿈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시체는 초점없는 동공으로 가만히 나를 주시했다. 나 역시 바싹 굳은 채 가만히 응시했다.
그러더니 시체가 천천히 입을 열고 말한다.
―흐음. 엘더리치를 사냥한 거물 치곤 딱히 기백이 없군 그래.
언데드의 나무 긁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언데드 권위자인 내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저건 언데드가 아니다.
오히려… 시체의 목소리를 빌려 누군가가 대신 말하는 것 같았다. 일본의 모 명탐정 꼬마처럼.
‘아니. 그보다도.’
지금 저 새끼가 뭐라고 한 거냐.
엘더리치를 사냥한 사람. 당연히 나를 가리키는 말이다. 여기서 문제는….
“너. 어떻게 그걸 알고 있냐.”
―그건 알 거 없네. 용사 박정용 군. 아니, 엘더리치 슬레이어 박정용 군.
내 질문은 시작과 동시에 끊어졌다.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예상했다는 듯 시체 너머의 누군가가 먼저 말문을 텄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네가 할센베르크에 있을 때부터 주시하고 있었다네. 엘더리치가 사냥당한 그 순간부터 사냥꾼을 추적하기 시작했지.
“……!”
―많은 것을 알 수 있더군. 163417413번째 용사 박정용. 아신의 비호를 직접 받고, 알 수 없는 특전을 받아온 자. 그리고, 용사이면서도 부활한 불사의 마왕과 함께 행동하는 수상한 자. 허허. 이런 특이한 이력을 가진 용사는 카사스의 사도 창립 이래 처음일세.
“당신. 대체 누구야.”
나는 서슬퍼렇게 중얼거리며 천천히 시체에게 다가갔다.
파지지직! 한 검 당 7개씩, 총 14개의 마력검이 내 뒤로 날개처럼 주르륵 늘어졌다.
하지만 내 위협에도 시체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미하게 웃었다.
―놀랍나? 이 정도 정보는 웬만한 상위랭커 용사만 돼도 누구든 가지고 있는 정보일세.
“…!”
―엘더리치는 악명높은 불사의 마왕 휘하의 대마족일세. 수많은 용사들의 희생이 필요한 그 강대한 마족을, 변방의 백작과 둘이서 토벌했다는 수수께끼의 용사라니. 자네 같아도 궁금하지 않겠나?
“…….”
―자네는 자네 생각보다 유명인이야. 박정용 군.
제르미의 시체가 피투성이의 입매를 비틀어 클클거린다. 아니꼽게 그것을 쳐다보던 나는 어느 순간 눈을 부릅떴다.
주르륵. 놈의 얼굴이 녹아내리고 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놈을 다시 쳐다보니, 얼굴뿐만 아니라 놈의 형태 자체가 천천히 허물어지고 있었다.
―네놈 또한 지켜볼 것이다 불사의 마왕. 조만간, 다시 만나게 될 것이야….
살점이 녹아내리고 뼈만 남은 해골이 달그락거리며 마지막 한 마디를 마쳤다. 그리고 풀썩, 바닥에 쓰러져 분해된다.
나는 바닥에 흐르는 살점과 진물을 가만히 쳐다봤고.
치지직. 뒤로 정렬시켰던 마력검을 해지했다.
“… 느낌이 안 좋은데….”
아까부터 말이 없어진 불사의 마왕, 루시를 가만히 쳐다보며 나는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