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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417413번째 소울라이크 용사-61화 (37/280)

61화

“엄… 서, 설백. 일단 너 시장 구경이나 좀 하고 있을래?”

사태를 파악한 뒤.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설백을 떨어뜨려 놓는 것이었다.

설백은 갑작스런 제안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했다.

“네? 저 혼자서… 말인가요?”

“어. 잠깐 할 일이 좀 생겨서.”

“할일이라니. 저한테 말 못할 일인가요?”

설백의 눈초리에 미약한 의심의 기색이 어렸다.

시선이 어디로 가나 가만히 쳐다보니 마왕, 루시 쪽으로 가 있었다.

뭔 생각하는지 대충 알 것 같군. 나는 곧장 손사래쳤다.

“네가 뭘 생각하고 있든 일단 그건 아니니까 오해하진 말고.”

“으, 에? 아, 아니! 제, 제가 무슨 생각을 했다고…!”

설백은 눈에 띄게 당황하며 말을 더듬거렸다. 빨개진 얼굴을 감싸며 황급시 시선을 돌린다.

나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잠깐 일 좀 보고 올 테니까 장신구라도 보고 있어.”

“장신구…요?”

나는 턱짓으로 설백의 뒤쪽을 가리켰다.

거기엔 다채로운 장신구들을 진열한 보따리 상인들이 한 데 모여 앉아 있었다. 전체적인 디자인이 판타지보단 무협에 가까웠다.

자세히 보니 비녀 같은 것도 보인다. 설백이 차면 굉장히 잘 어울릴 비주얼이다.

“와, 와아….”

설백은 단박에 시선을 빼앗겨 버렸다. 이미 나 따윈 안중에도 없는 눈치다.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치고 장신구 싫어하는 사람 드물다던가.’

글로 배운 지식을 이렇게 써먹을 데가 오는군. 오래 살고 볼 일이다.

나는 홀린 듯이 장신구 코너로 향하는 설백을 향해 말했다.

“나중에 사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적당한 가격이면 하나 정도는 사줄게.”

“엇?! 저, 저, 정말요?!”

설백은 엄청난 속도로 날 돌아보며 물었다. 눈이 반짝이다 못해 광선 나가겠다.

엄청난 기세에 식겁한 나머지 조금 몸을 물렸다.

“그래. 최대한 심사숙고해서 골라야 할 거다. 딱 하나만 사줄 거니까.”

“하, 하나…! 으, 뭘 봐도 다 예뻐 보이는데…!”

아무렴 이 정도 미끼는 있어줘야 오래 시간을 끌겠지.

아직 변경백한테 받은 여비가 넉넉하게 남았으니 장신구 하나 정도는 괜찮을 거다. 이런 변방 마을에서 눈 돌아가는 명품을 팔 리도 없고 말이야.

“살 거 정하고 나면 시장 입구에서 기다려! 나도 일 마치면 찾아갈 테니까.”

“네 알겠어요! 천천히 용무 마치고 오세요!”

아깐 안 데려간다고 삐지나 싶더니 온도차이 보소. 역시 자본주의 만만세다.

나는 이미 쇼핑 삼매경에 들어간 설백을 뒤로하고 마왕과 함께 저잣거리 깊은 곳으로 향했다.

“잠깐 따라와 봐 루시.”

“음? 그래. 알겠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마왕의 손목을 잡고 점점 시장의 골목으로 들어갔다. 시장의 활기찬 소음이 점점 멀어진다.

음습하고 햇빛이 잘 들지 않는 후미진 곳까지 온 나는, 그제야 마왕의 손을 놓았다.

“…….”

주위를 보니 거적때기 두른 부랑자 몇 빼고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나는 시커먼 어둠 속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이제 숨지 말고 나오지 그래. 다 알고 있으니까.”

촤아앙! 나는 허리에 멘 흑백의 검을 동시에 뽑았다. 그리고 눈앞의 어둠을 향해 겨누었다.

내 행동에 화들짝 놀란 마왕이 당황의 탄성을 터뜨렸다.

“으, 엉? 뭐, 뭐야. 용사, 설마 미행당하고 있었던 것이냐?”

마왕이 뒤통수 세게 맞은 표정으로 어둠 너머와 나를 번갈아 쳐다봤다. 그리고 이내 긴장한 행색으로 내 뒤로 숨는다.

어둠 너머는 조용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나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

“…….”

수십 초. 1분. 그리고 3분이 지나도 감감무소식이다.

결국 나는 머쓱하게 입맛을 다셨다.

“안 나오네. ‘어떻게 눈치챈 거지?’하면서 나올 줄 알았더니.”

나는 머쓱하게 검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옷을 턴 뒤 등 돌려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를 가만히 쳐다보던 루시는, 황당하다는 듯이 물어왔다.

“… 설마 그냥 한 번 질러본 거였냐?”

“아니, 봐라. 시장 한복판에서 회귀점이 갱신됐잖아. 갑자기 위험이 닥칠만한 게 뭐가 있겠어. 미행자가 나오는 게 국룰이지.”

“어느 세상 법칙이냐 그건…?”

가오 한 번 잡아보려다 흑역사만 늘었군. 마왕의 한심스러운 시선이 유난히 폐부에 팍팍 꽂혀온다.

나는 괜히 혼자 씨근거리며 설백이 있던 곳으로 돌아가기 시작했고. 마왕이 한참을 한심한 눈초리를 보내다가 내 뒤를 따라붙었다.

그래. 바로 지금이다.

“세븐 소드 피어스.”

별안간 뒤를 돌며 스킬을 영창했다. 베스타크를 섬전처럼 뽑아 휘둘렀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심지어 우리 편인 마왕조차 깜짝 속아넘어갈 타이밍.

“크… 헉!”

퍼버버벅! 7개의 마력검은 쏜살같이 날아가 일제히 한 점을 향해 공격을 퍼부었다.

내 기습공격이 향한 곳은 다름 아닌 골목에 널브러져 있던 부랑자였다.

“대, 대체… 어떻게…!”

온몸에 바람구멍이 난 부랑자가 숨넘어가는 목소리를 토해냈다. 허겁지겁 도망치다 등 뒤를 무참하게 헤집힌 모습이 인상적이다.

마구잡이로 꿰뚫린 거적때기 사이로 피가 쏟아진다.

‘역시.’

한 번 페이크를 줘서 방심시킨 게 컸다. 7발 모두 정타로 꽂혔다.

나는 히죽 웃으며 천천히 부랑자에게 다가갔다.

“내 눈은 못 속인다. 제르미 발킨.”

내 입에서 자기 본명이 튀어나와서일까.

거적때기를 뒤집어쓴 부랑자는 눈을 부릅떴다. 대체 어떻게 알았냐고 묻는 듯한, 바들거리는 눈빛이 내게 쏟아졌다.

‘어떻게 알긴 새꺄. x무위키 켰지.’

이래서 정보가 중요하다는 거다.

내가 골목에 들어오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이 뭔지 아는가? 부랑자들의 스테이터스를 살피는 일이었다.

그리고 거기서 한 사람의 이름을 발견하고 눈을 부릅떴다.

[명칭: 제르미 발킨]

[별칭: 151668943번째 용사, 카사스의 사도, 달인]

아까 번화가에서 태연하게 우리와 지나쳤던 평범한 남자.

그 남자가 갑자기 골목에 들어선 순간 거적을 뒤집어쓴 부랑자가 되어있다?

이건 뭔가 좀 이상하잖아.

“네… 놈… 역시, 카사스의 말대로… 마녀의 사술을…!”

죽어가는 목소리로 무슨 말을 띄엄띄엄 내뱉는 부랑자. 아니, 제르미 발킨.

뭐라 그러는지는 솔직히 관심없고. 나는 놈의 코앞까지 다가가 그의 뒷목을 한 번 후려쳤다.

“크허어억!”

부랑자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경련하기 시작했다. 이내 뒷목을 부여잡은 제르미 발킨이 핏발 선 눈으로 죽일 듯이 나를 쳐다본다.

나는 당황했다. 내가 예상한 그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 판타지 소설에서는 이렇게 치면 기절하던데.’

역시 이세계 전생을 하고. 용사가 되고 힘이 세져도, 현실은 녹록하지 않군.

뭐 인생 별 거 있나. 나는 기절할 때까지 제르미의 뒷목을 후려치기로 했다.

“크억! 크악! 그, 그만! 차라리 죽여라!! 끄아아아악!”

결국 10번 이상을 때리고 나서야 제르미는 기절했다.

내가 때려서 기절시켰다기보다는, 고통 때문에 쇼크로 혼절한 느낌이다.

나는 주변에 굴러다니던 천쪼가리로 놈의 팔을 묶었다. 군대에서 배운 포박술을 이런 데에 써먹을 줄은 몰랐네.

“너한텐 묻고 싶은 게 많다. 진실의 방에서 면담이나 좀 하자꾸나.”

“흐익!”

‘진실의 방’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뒤에서 구경하던 마왕이 더 경기를 일으켰다. 나는 피식 웃고는 기절한 제르미를 들쳐업었다.

그리고 유유히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 * *

“모, 모른다… 나는 아무것도 몰라… 그냥 죽여라….”

소도시 케른의 시장. 아까와는 또 다른 어두운 골목.

나는 의문의 미행자 제르미를 절찬 심문하는 중이었고. 30분의 심문 끝에 남은 건 피떡이 된 채 골목 벽에 매달린 제르미.

그리고 앵무새처럼 반복되는 저 말뿐이었다.

“흐음. 그렇다는데? 어쩔 거냐 용사.”

침음을 흘리던 마왕이 이내 나를 쳐다본다.

어떡하긴 뭘 어떡해. 모르면 생각나도록 물심양면 케어를 해줘야지.

나는 마왕에게 슬쩍 턱짓했다.

“아가리 오픈.”

“오냐.”

마왕은 고개를 끄덕이고 익숙한 몸짓으로 제르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굳게 닫힌 놈의 입을 어거지로 벌리기 시작했다.

제르미는 지금까지 당한 게 있다 보니, 사색이 되어서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으그극…!”

“어헐씨구?”

이를 악문 채 고개를 돌리는 제르미. 마력이 없는 마왕은 일반 여자와 완력이 다를 게 없어서, 제르미의 입을 억지로 벌리지 못했다.

나는 마왕에게 다시 한번 눈짓을 줬다.

“플랜 B.”

“오냐.”

내 명령이 떨어지자 루시는 번개같이 움직였다.

퍼어억! 마왕의 힘차게 뻗은 발차기가 곧장 제르미의 사타구니로 빨려 들어갔다.

“음! 타격감 좋고!”

불끈. 희열에 찬 얼굴로 마왕이 주먹을 힘껏 쥔다. 명중한 모양이다.

참고로 플랜 B의 ‘B’는 ‘Bull all’의 약자다.

“끄, 오오오오오!!”

놈은 세상이 무너지는 절규를 내질렀다.

팔 다리가 묶인 와중에도 온몸을 아득바득 비틀었다. 솔직히 내가 시킨 일이지만 좀 미안하긴 했다.

어쨌든, 당연히 비명을 지르기 위해서는 입을 벌려야 한다.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나는 에테르 병을 놈의 입 안에 처넣었다.

“환자분 아가리 벌리세요. 에테르 들어갑니다.”

“크, 커읍!”

스스스스. 제르미의 몸이 새파랗게 물든다. 동시에 모진 고문으로 입었던 상처들이 치유되어 간다. 고통에 쩔어있던 얼굴도 편안하게 이완되었다.

물론 곧 자신의 상황을 깨닫고 다시 얼굴이 새파래졌지만.

“이제 박정용 스페셜을 처음부터 무한으로 즐겨볼까요?”

나는 손가락 관절을 풀며 천천히 제르미에게 다가갔고.

옆에서 마왕이 신난 얼굴로 한 마디씩 거들었다.

“으하하! 좋다 좋아! 이번엔 뭐부터 하면 되겠느냐 용사!”

“B코스로.”

“알겠느니라! 곧장 준비하지!”

탄생 이래 최고로 협조적인 마왕. 싱글벙글한 그녀와 나는 천천히 놈에게 다가갔다.

“크흐흐흐.”

“쿄효효효.”

사악하게 웃는 우리 얼굴이 제르미의 공포에 찬 눈동자 안에서 점점 커지고 있었다.

“우우웁! 우우우우웁!!”

마왕이 틀어막은 제르미의 입. 거기서 새어나는 애처로운 비명.

그것이 한 동안 시장골목 구석에서 끊임없이 울려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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