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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417413번째 소울라이크 용사-60화 (36/280)

60화 판타지 클리셰

“정식용사 박정용님과 견습용사 설백님. 이상 없습니다. 지나가셔도 좋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마르크트레스에 입국할 수 있게 되었고. 곧장 마르크트레스의 입국심사대로 향했다.

나와 설백의 주위를 둘러싼 마법진의 빛이 서서히 멎었다. 그러자 대기하고 있던 경비병이 부사수와 함께 경례를 올렸다.

나는 두 사람을 흘깃 쳐다보며 고개를 까딱였다.

“고생 많으십니다. 그럼.”

“당치 않습니다. 충성!”

용사는 기본적으로 출입국심사가 프리패스다.

아무래도 꼴에 세상을 구한답시고 불려온 사람이다 보니 그렇다. 특히 정식용사가 되면 몸수색이나 통행세조차도 받지 않는다.

그 외에도 체크카드 신규가입 특전처럼 자잘한 추가혜택이 있는데, 별로 중요한 건 아니다.

그래. 내가 관심있는 건 그런 자잘한 부분이 아니다.

“저, 근데 용사님.”

“예?”

“뒤에 계신 하얀 머리 여성분도 신원 확인을 좀 할 수 있을까요.”

“…….”

“뭐 용사님의 일행이니 위험인물일 리는 없습니다만… 형식과 절차라는 게 있으니까요.”

우라질.

얼렁뚱땅 루시를 뒤로 숨겨 빠져나가려던 작전은 그렇게 실패했다.

생각보다 직업의식이 투철한 경비병이군. 그렇게 안 생겨가지고.

내가 절찬리에 당황하고 있자니. 내 뒤에 로브를 두르고 있던 루시가 내 등을 쿡쿡 쑤시기 시작했다.

“야 용사. 이제 어쩔 거냐. 우리 지금 큰일난 거 아니냐?”

“큰일 난 거 맞으니까 닥치고 있어봐. 생각하는 데 방해되니까.”

“네놈은 어째 좀 도와줄래도 그리 주둥이가 지랄맞느냐.”

“너만하겠냐.”

“흥이다. 알아서 하거라. 수틀리면 곧장 회귀하도록 내가 뒤에서 칼침 정도는 박아주마.”

“소름 돋는 소리 하지 마라.”

우리가 귓속말로 아옹다옹하는 사이에도 경비병들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우우웅. 경비병 부사수가 천천히 마법 주문을 왼다. 마법진이 천천히 바닥을 미끄러져 루시 쪽으로 다가갔다.

‘어쩔 수 없지….’

내가 웬만하면 이런 추한 짓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이렇게 되면 비장의 수를 사용하는 수밖에 없겠군.

“잠깐.”

“음? 뭡니까.”

“사실 지금 이렇게 수색을 받을 만큼 한가한 상황이 아닙니다. 빨리 좀 지나가고 싶은데요.”

그 말에 순간 분위기가 싸해졌다.

한층 굳은 얼굴로 경비병들이 무기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그게 무슨… 검문을 거부하겠다는 말씀입니까?”

“일단 이걸 좀 보시죠.”

나는 다가오는 경비병들의 앞을 막아서며 곧장 서신을 하나 넘겼다.

낡은 서신을 바라본 경비병들은 처음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가. 그것을 펼쳐보고는 눈이 튀어나오도록 놀라더니 이내 고개를 조아렸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몰라 뵙고…!”

“흐흠. 알면 됐습니다. 그럼 지나가도 되죠?”

“무, 물론입니다! 충성!”

그렇게 우리는 무사히 검문을 지나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지나온 마을이나 도시에서도 이런 검문이 곧잘 있었다.

그러나 정식 용사 타이틀을 확인한 시점에서 검사가 느슨해진 경우가 잦았고. 이렇게 빡세게 하는 경우에도 비장의 무기만 꺼내면 곧장 수그러들었다.

“용사여.”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문득 옆에서 걷던 루시가 소매를 잡아당기며 날 불렀다.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봤다.

눈밭에 파묻힌 산딸기 같은 붉은 눈동자. 그것이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다.

“왜.”

“대체 뭘 보여주길래 저놈들이 꼼짝도 못하는 것이냐? 부모 욕이라도 적어놨느냐?”

“뭐냐면….”

나는 품에 고이 간직한 낡은 서신 한 장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거기에는 파라이소 공용어로 ‘할센베르크 백작이, 친애하는 적랑(赤狼)에게.’라고 적혀있다.

나는 사특하게 웃었고. 이세계에서도 통하는 차가운 현실을 들이밀었다.

“혈연 지연 학연의 무서움을 보여줬지.”

* * *

참고로 우리의 여행은 굉장히 쾌적했는데. 거기에 크게 공헌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설백의 요리실력이었다.

“맡겨주세요. 정용님께는 주변에서 식재료 조달을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본인 입으로 ‘요리 좀 한다’라고 했던 것이 무색하지 않게 그녀는 정말 요리를 잘했다.

덕분에 호화로운 음식을 야영하며 먹을 수 있었고. 어떨 때는 웬만한 마을에서 사먹는 것보다도 나아서, 야영이 기다려지기까지 했다.

“아이, 그 정도는 아니에요….”

내가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자 그녀가 얼굴을 붉히며 좋아 죽던 기억이 난다.

입으로는 겸손을 떨었지만 그 날의 저녁밥에는 유난히 힘이 들어갔던 것 같다. 그 날부턴 각종 미사여구로 설백의 요리를 칭찬해 최고의 아웃풋(?)을 뽑아내는 게 일과가 되었다.

역시 사람이 다른 건 몰라도, 먹는 건 잘 먹어줘야 살맛이 난다니까.

그렇게 며칠이 지났을까.

마르크트레스에 입국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

우리는 국경 인근의 케른이라는 작은 도시에 도착할 수 있었다.

“와아. 오랜만에 제대로 된 도시라는 느낌이네요.”

“그러게.”

“흥. 쥐똥만한 동네로구나.”

마왕 말대로 케른은 규모만 보면 할센베르크 영지보다 작았다.

하지만 마르크트레스는 면적 자체가 타국보다 4배 이상 작다. 이 국경도시 케른에서 수도까지 가는데 걸어서 일주일이면 갈 수 있을 정도다.

그래서 정확히 말하면, 마르크트레스의 도시치곤 작은 편은 아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변경백이 ‘나라마다 문화차이가 심하다’라고 했던 말이, 곧바로 이해되는 장소이기도 했다.

“와아. 여기는 건물 양식이 제 고향이랑 비슷해요! 그리워라!”

설백이 주위를 연신 둘러보며 반가운 어조로 그런 말을 했다.

그 말대로였다. 마르크트레스에는 판타지와 동양풍이 섞인 건물 양식과 복식이 펼쳐져 있었다. 완전히 정통 판타지에 가까웠던 할센베르크의 모습과는 그야말로 천양지차다.

활보하는 사람들은 머리가 알록달록한 코쟁이들인데, 거기에 강제로 무협을 끼얹은 느낌이다.

‘뭔가 신기하네.’

나도 감탄하며 사람들의 모습을 하나하나 탐욕적으로 눈에 새겨넣었다.

‘미미르의 눈, 발동.’

당연히 내가 눈에 새겨놓는 건 겉으로 보이는 것들뿐만이 아니었다.

이것은 내가 지금까지 마을을 들를 때마다 빼먹지 않고 하는 일 중 하나로, 바로 마을의 정보를 탐색하는 것이었다.

정보는 중요하다.

내가 하수도의 레이라를 뚫고, 엘더리치를 토벌하고. 할센베르크를 빠져나올 수 있었던 건. 모두 전생의 정보를 토대로 상대보다 정보력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정보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게 바로 나다.’

특히 우리 일행은 마르크트레스라는 나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아는 거라곤 대륙 서쪽에 붙어있는 나라라는 것 정도지.

그러니 우선은 이 나라 자체에 대해 정확히 알 필요가 있다.

내가 강렬하게 바라자 곧 이 나라 자체에 대한 상세정보 패널이 연신 떠올랐다.

이짓도 오래 해먹으니 꽤 감각에 익는 듯하다.

[상세정보 ― 마르크트레스]

[1. 마지막 거인족 크로스페이드가 세운 기사의 나라. 국가 전체가 무(武)를 숭상하며, 마력을 신체력으로 승화하는 기공술(氣空術)이 발달했다.]

[2. 국가의 핵심은 100인으로 이루어진 기사 중의 기사, ‘카발리어(kavalier)’다. 카발리어 개인은 일당만의 무력을 지니고 있다. 카발리어의 구성원은 4년마다 열리는 범국민 무투대회, ‘무신제(武神祭)’의 성적에 따라 유동적으로 변화한다. 카발리어는 마르크트레스 무력의 심장일 뿐 아니라, 선거후의 권한을 갖는 정치인이다.]

[3. 마르크트레스엔 공식적으로 카발리어를 제외한 계급이 존재하지 않으나, 무력의 계급에 따라 사람을 구분하는 풍조가 있다. 이 계급을 구분하는 평가시험을 보지 않은 자는 마르크트레스에서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한다.]

[4. 무력의 계급은 어떤 무기를 사용하든 다음의 단계를 따른다. 하위부터 상위로 투사, 무사, 달인, 지존, 무성(武聖), 무선(武仙), 무신(武神)이다.]

‘쌍남자 국가네.’

4년에 한 번 선거를 하는 게 아니고, 정치할 놈들을 쌈박질로 정하는 나라라니.

아니. 생각해보니 헬조선도 별로 다를 거 없나? 뽑아 놓으니 쳐싸울 바엔 쳐싸우고 이긴놈 뽑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군.

‘… 조금 더 정보를 모아볼까.’

국가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은 이 정도면 됐다. 이젠 좀 세부적인 정보를 모을 차례다.

나는 주위에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을 일일이 뚫어져라 쳐다보며 상태창을 띄웠다.

[인물 정보]

[명칭: 칼렉]

[별칭: 떠돌이 창술사, 무사.]

[LV. 31]

[명칭: 트릭시 윈터가드]

[별칭: 127815932번째 용사, 변경의 마녀, 지존]

[LV. 113]

[명칭: 아울 세드릭]

[별칭: 숙련된 기공사, 달인]

[LV. 77]

[명칭: 제르미 발킨]

[별칭: 151668943번째 용사, 카사스의 사도, 달인]

[LV. 92]

행인 중에는 용사도 있고 일반 시민도 있다. 레벨도 천차만별이었다.

다만 특징이 있다면. 일반인들의 레벨이 타지역에 비해 월등히 높다. 나라 전체가 무를 숭상한다 그러더니 빈말은 아니었지 싶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중요한 특징은 바로.

‘진짜네. 다들 계급이 붙어있다.’

별칭 항목 마지막에 계급이 새겨져 있다.

아무래도 이곳에 사는 일반인은 물론이고. 거점을 박은 용사들은 모두 평가시험을 본 모양이다.

‘하긴 안 받으면 사람 취급을 안 해준다고 하니….’

일단 여기서 얼마나 머무를지 모른다. 여행용품만 산 다음 바로 그 시험을 받으러 가야겠다.

나는 그렇게 일단 당장의 목표를 정했고. 고개를 끄덕인 뒤 설백과 마왕을 데리고 케른의 거리를 질러나갔다.

“쌉니다 싸요!”

“수도에서 방금 내려온 질 좋은 비단이 있습니다요!”

우리는 곧장 시장으로 향했다. 소모한 여행용품들을 챙기기 위해서였다.

요 한 달 간의 여행으로 나름 여행이 익숙해진 증거라고 할까. 마을을 들르면 가장 먼저 소모품부터 보충하는 게 습관처럼 굳어져 버렸다.

그리고 무협지의 저잣거리에서나 볼법한 비주얼의 시장에 들어선 순간.

[불사의 회귀점이 갱신되었다.]

[일시 - 대륙력 1108년, 1월 12일, 오전 10시 10분]

[장소 - 마르크트레스. 약속의 평원 상부지역, 소도시 케른 상가 1지구]

“…….”

내 눈앞에 갑자기 그런 패널이 떠올랐다.

순간 머리가 하얘진 나머지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서고 말았다.

“어. 음….”

나는 우선 현실 부정을 해보기로 했다.

눈을 비볐다가 다시 떴다. 하지만 여전히 패널이 보인다, 볼을 꼬집어봤다. 아프다.

현실이군. 틀림없는 현실이다.

“왜 갑자기 멀뚱히 서 있느냐 용사.”

내가 넋놓고 있어서 그런지 뒤따라오던 루시가 물어왔다.

나는 혹시나 싶어서 마지막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기로 했다.

“야 루시. 혹시 여기 들어오고 회귀점 재설정 했냐?”

“마력은 땅파면 나온다냐?”

“…….”

그것도 그렇네.

그렇다는 건 지금 회귀점이 갱신된 건 마왕의 의지가 아니라는 소리고.

그 소리는 다시 말하면….

‘… 위험이 닥쳐왔다?’

나는 마왕과 설백의 어리둥절한 얼굴을 한 번씩 쓸어본 뒤.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왁자지껄한 시장의 풍경을 가만히 주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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