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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417413번째 소울라이크 용사-58화 (34/280)

58화

“… 저항은 무의미하다. 버러지.”

“지랄 나셨네.”

누님과 나는 한 마디씩 나누고 서로의 신형을 교차했다.

카가앙! 이번엔 확실히 반응했다. 검을 쥔 손이 찌르르 울리는 게 증거였다.

나는 곧장 누님을 향해 등을 돌렸고. 어느새 내 코앞까지 치고 들어온 그녀의 모습에 숨을 삼켰다.

‘생각보다 빠르잖아!’

나는 순식간에 내 심장을 노리고 쇄도하는 검붉은 대검을 가까스로 쳐냈다.

키이잉! 귀를 찌르는 금속음과 함께 베스타크가 저만치 날아간다. 순식간에 무방비상태가 된다. 누님의 표정에 일순 회심의 미소가 어렸다.

쇄애애액! 섬뜩한 파공성과 함께 내 미간으로 대검이 단두대처럼 날아온다.

“어딜!”

카아앙!

하지만 이번에도 누님의 대검은 보기좋게 튕겨나갔다.

내가 내지른 두 번째 검. 에스파다가 하얀 궤적을 그리며 대검을 쳐낸 것이다.

‘지금!’

위기 후에는 기회가 찾아온다.

나는 누님이 채 자세를 회복하기 전에, 그녀에게 곧장 달라붙었다. 누님의 표정에 일순 당황이 스친다.

“죽어어!”

파슷! 손맛이 일었다.

누님의 갑주 사이로 가슴 언저리가 갈라지며 창백한 피가 솟구친다. 하지만 나는 곧장 혀를 차며 뒷걸음질 쳤다.

‘얕았어!’

내가 내지른 회심의 일격은 치명상을 주지 못했다.

누님은 얕게 베인 가슴의 상처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이내 다시 내게 진격해온다. 나 역시 곧장 누님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이익!”

“흐음!”

카카카캉!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연격이 오가길 잠시.

그야말로 찰나였다. 누님의 빈틈이 보였다고 생각한 순간, 찔러 들어갔다.

생각보단 본능에 따른 공격이었다.

“크으윽!”

스슷. 그녀의 몸이 일렁거리더니 사라진다. 내지른 검은 허공을 휘적인다.

곧 멀찍이서 누님의 모습이 다시 등장했다. 누님은 옆구리에 깊은 검상을 입은 상태였다.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좋아. 내가 유리하다!’

그제야 안심이 든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뿜었다.

하지만 여유도 잠시. 누님이 나를 노려보며 손에 힘을 주자, 새카만 기운이 온몸에서 솟아올랐다.

“귀찮게 하는구나.”

누님이 철컹, 검을 수평으로 들어올렸다.

그녀의 몸을 둘러싸듯 새카만 기운이 이글이글 타오른다. 눈빛이 한층 붉은 빛을 띄며 일렁거린다.

척 봐도 심상치 않은 게 아무래도 2차 변신을 하려는 모양이다.

‘X발, 가만히 기다려줄 것 같냐?!’

이건 만화가 아니다.

변신 매너 X이나 까잡숴. 공격하려면 바로 지금이다!

나는 에스파다를 곧게 세우고 외쳤다.

“설백, 기룡으로 지원해줘!”

“네!”

설백은 내 앞으로 퍼뜩 튀어나와 손을 유려하게 움직였다.

기룡이 그 손짓에 따라 하늘을 유영하더니, 이내 처음 보는 문자열을 그려낸다.

“아란! 설화연무(雪華演舞)!”

파앙!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사위가 확 밝아진다.

눈꺼풀을 찌르고 들어오는 그 엄청난 광량에 나는 곧장 눈을 떴다. 그리고 목격했다.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정용님을 노리다니… 용서하지 않겠어!”

내 옆으로 설백이 다가온다.

천천히 걸어오는 그녀의 주변으로 하얗게 흐드러지는 무정형의 기운들이 눈에 띈다.

마치 눈발이 흩날리는 듯한 광경이다.

“괘, 괜찮으세요 정용님?”

푸화악! 세찬 바람이 몰아닥치며 일행을 둘러싸는 새하얀 장막이 생성되었다.

쉬쉿, 쉬쉿 하며 흉포한 바람을 날름거리는 장막. 손대는 것만으로도 위험해 보인다.

“칫.”

보라 피부의 누님은 그 광경을 보더니 혀를 낮게 찼다. 그녀의 시선이 순간 흘깃 돌아가는 걸 나는 놓치지 않았다.

순간 안 좋은 예감이 스친다.

‘설마…!’

아니나 다를까. 누님은 이내 고개를 팩 돌려버리더니, 나를 등지고 질주했다.

나는 누님의 의도를 읽고 퍼뜩 입을 열었다.

“야 떨거지들! 모두 도망…!”

하지만 이미 늦었다. 누님은 아수라장이 된 다른 용사들의 앞에 도착해 있었다.

무력화된 용사는 어차피 널리고 널렸다. 누님은 지금 나를 상대하는 게 비효율적이라는 것을 깨달아버린 것이다.

파직, 퍼걱, 푸지직!

그녀의 대검이 다시금 피보라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절규가 끊임없이 울려퍼진다.

“크아아악!”

“아아악!”

“살려줘어어!”

그야말로 일방적인 학살쇼다.

이런 제길. 이 세상 끌려오고 나름 수라장을 헤쳐왔다고 생각했는데, 살아있는 인간의 일방적인 살육은 또 느낌이 다르군.

보고 있기 힘들다. 나는 어깨를 잘게 떠는 설백의 눈을 가리고 누님을 주시했다.

“저, 정용님…!”

“… 일단 타이밍을 재자. 지금 들어가는 건 너무 위험해.”

“네, 네….”

그러는 와중에도 학살은 오히려 박차를 가해지고 있었다.

용사들은 그저 두려움에 떨고. 도망치다가. 누님이 자기 앞에 나타나면 죽어나갈 뿐이다.

“프리뮬러… 어디 있느냐… 나의 시종아….”

그런 와중에 마왕 폴룩시우스는 미친 사람처럼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나를… 나를 지켜줘… 어둡다… 안 돼… 나를 혼자두지 말거라… 어디야! 어디 있느냐 프리뮬러!!”

걷잡을 수 없이 떨리는 눈으로 사방을 둘러본다. 허공에 손을 연신 휘적이고 있었다. 누님을 찾아내려는 듯이.

바로 눈앞에서 용사들을 학살하고 있는 누님이 안 보이는 듯하다.

“…… 하아.”

애타게 찾는 목소리를 무시하기 힘들었는지, 이내 누님이 한숨을 슬쩍 흘린다.

그리고 순식간에 신형이 사라졌다가, 마왕의 곁에서 나타났다.

“… 지, 지금이다!”

“도망! 도망쳐!!”

보라색 사신이 사라지자 살아남은 용사들은 다시 허겁지겁 전장을 이탈하기 시작했다.

반면 폴룩시우스 앞에 나타난 누님은, 자기 손을 마왕의 가슴에 슬며시 갖다대며 중얼거린다.

“여기 있습니다 성하. 저는 당신만의 방패. 어디로도 도망가지 않습니다.”

누님의 쇠긁는 목소리가 유난히 따스하게 새어나왔다.

그제야 폴룩시우스는 안심한 표정으로 누님의 손에 한껏 엉겨붙었다.

“아아… 그래… 이리로 오거라… 프리뮬러… 나의 기사여….”

누님… 프리뮬러는 그런 마왕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마왕은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며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내게는 이제 너 밖에 없다… 그 망할 마녀도… 아니꼬운 용사 놈도… 그리고 빌어먹을 성녀… 저주받을 루나년도… 모두 사라졌다….”

“… 예. 성하. 하지만 저만은 여기에 있습니다.”

그야말로 미친 사람의 행색이다.

무슨 말을 중얼거리는지 모르겠다. 서로 대화도 안 통하는 듯하다.

그러나 누님은 그런 마왕의 말에 대답을 했고. 마왕 역시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내게 남은 게 아무것도 없다… 이곳은 나만의 마계다… 차가운… 그러나 불 같이 뜨거운… 지옥. 그래. 세상은 지옥이다.”

“성하….”

“프리뮬러… 나의 마지막 기사… 발키레아의 마지막 검이여….”

누님은 마왕 폴룩시우스를 슬픈 얼굴로 잠시 쳐다보다가, 이내 둘러싼 좌중들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얼음장처럼 차갑게 벼린 시선이 용사들에게 쏟아졌다.

“마를 거부해주십시오 교황 성하. 언제나 하던 것처럼.”

철컹. 누님이 검을 수직으로 들어올린다.

일견 신성해보이기까지 하는 자세로, 그녀는 말했다.

“제가 모두 정화하겠습니다. 언제나 하던 것처럼.”

그 말에 폴룩시우스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무도 없는 곳으로… 진짜 마계로 가자… 이제는 나와 너만. 단 둘만의 세계로….”

폴룩시우스가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린다. 그의 주변으로 예의 반투명한 에너지가 속속들이 집결했다.

나는 그 압도적인 팽창 속도에 혀를 내둘렀다.

“이런 미친…!”

힘이 모이는 속도가 상상을 초월했다.

내가 채 일행들에게 경고하기도 전에, 위태롭게 이글거리던 마력 파동이 그대로 전방위를 향해 방사되었다.

파지지직! 파동에 얻어맞은 나는 가슴이 시큰거리는 느낌에 숨을 삼켰다.

“크후욱!”

숨을 몰아쉬었다. 심장이 벌컹거린다.

전에 많은 용사들이 그랬듯이, 나도 가슴을 움켜잡고 주저앉았다. 기침이 절로 쏟아졌다.

“쿨럭! 커헉!”

이번 웨이브 때는 아까보다도 주저앉는 사람이 많았다. 피를 쏟는 사람은 물론이고, 그 자리에서 풍선처럼 터져버리는 사람도 있었다.

설백과 마왕이 주저앉는 나를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꺄악! 정용님! 괘, 괜찮으세요? 주, 죽으면 안 돼요!!”

“… 어 그래. 안 죽으니까 소리 좀 지르지 마라. 울려서 더 아프니까.”

“기, 기다리세요! 지금 당장 아란에게 회복을…!”

옆에서 설백이 호들갑을 떨며 기룡을 내게 붙였다. 몸에 편안한 기운이 감돌며 숨쉬기가 한결 편해졌다.

그러든 말든. 나는 내 몸에서 일어난 이상사태를 파악하느라 바빴다.

아까는 이렇지 않았는데, 왜 이번엔 충격이 온 것인가. 의문을 느끼는 찰나.

[상태이상: 마력 고갈]

[한계 이상으로 마력이 저하되었다. 즉시 마력을 회복하지 않으면 생명력이 점차 감소한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알림창이 등장해 내 의문을 해소했다.

쉽게 말해 더 이상 깎일 마력이 없어서 체력이 대신 깎인다는 소리 같다.

이 상태이상이 한계까지 쌓이면 저렇게 터진 토마토가 된다는 거군. 이해했다.

‘전략을 바꾼다.’

애초에 1대1 정정당당한 승부는 내 전공이 아니다.

모략과 협잡. 암습과 기습. 졸렬한 히트 앤 런.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싸움을 할 때도 머리를 쓸 줄 알아야 한다.

“이제 사람답게 싸워볼까!”

나는 호기롭게 외치며 누님을 향해 달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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