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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417413번째 소울라이크 용사-57화 (33/280)

57화 마왕 출현!

마르크트레스 변경의 작은 도시 케른. 그곳의 서부관문에서 멀지 않은 음습한 골목길의 한복판.

길게 참았던 숨이 터져나왔다.

나는 길바닥에 대자로 누워서 하늘을 멍하니 쳐다보는 중이었다.

“푸하아.”

동시에 스르릉. 서늘한 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돌려보니 루시가 힘겹게 시커먼 칼을 들고 뒤뚱뒤뚱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루시는 내 검, 베스타크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물었다.

“설백이라는 그 계집과 오래 알고 지낸 사이냐?”

“아니.”

“이렇게까지 회귀해가면서 살려야할 정도로 소중한 존재인가?”

“아니.”

“죽음 이상의 고통을 감수하면 네가 얻는 것이 있느냐?”

“아니 천하의 불사의 마왕 혓바닥이 뭐 이리 기냐. 죽이기나 하쇼.”

내가 대수롭잖게 대답하자, 루시는 더욱 알 수 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그녀는 짜증 부리듯 검을 내 목에 까딱거렸다.

“목숨을 좀 더 귀하게 쓰거라. 내 너의 계약자로서 충고하는 것이니라.”

나는 다시금 밤하늘을 봤다. 일행의 위기를 알리는 신호탄의 불꽃이 밤하늘을 연신 수놓는다.

형형색색으로 물드는 시야 속에서 문득 설백의 발그레한 미소가 떠오른다.

―네. 꼭이에요. 무신제 끝나고 불꽃놀이 하는 날… 꼭 같이 봐요!

그 목소리가 떠오르자 일말의 망설임마저 사라졌다.

역시 돌아가야 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 난 이 자리에 설백과 같이 살아남아야 한다.

왜냐하면….

“걔랑 데이트하기로 약속했거든.”

“… 허?”

“X발 내가 말이다. 24년 모쏠동정으로 살다가 이제 인생 좀 펴보려는데. 온 세계가 손에 손잡고 전력을 다해서 방해하잖아. 해준 것도 없는 이 줫같은 이세계가. 어?”

“… 허어어?”

“딱 두고 봐라. 내가 꼭 데이트 해야겠어. 드럽고 치사해서라도 내가 설백이랑 같이 불꽃놀이 보고 만다. 씨이벌창.”

그리고 그걸 위해서라면. 그래.

한 100번까지는 기쁜 마음으로 트라이해주겠다.

“앞으로 13번 정도는 거뜬하지. 덤벼봐라 세상아!!”

나는 호구일지언정, 의지박약은 아니다.

카사스인지 카직스인지 카서스인지. 정체도 모를 개띠꺼운 음해세력들아.

너희는 나를 너무 만만하게 봤다.

내가 모쏠 딱지 뗄 기회를 그렇게 쉽게 버릴 줄 알았냐?

어림도 없다 이 X팔럼들아.

“그래 좋다. 어디 끝까지 발버둥 쳐보거라. 나는 끝까지 지켜봐 주겠느니라.”

딱히 내 반응을 바란 건 아니었는지. 그녀는 말을 마친 직후 힘껏 검을 내리쳤다.

단두대처럼 내려오는 검날을 망연히 지켜봤다.

아득해지는 순간 의식을 지배한 것은, 루시의 유쾌한 웃음소리였다.

“약속대로 사지를 절단내 줄테니 정신 똑바로 차려라 용사! 카하하핫!”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아니.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될 운명이었던 걸까.

적어도 하나는 확실하다.

모든 것의 시작은 이주일 전. 이름 모를 마을에서 마왕을 때려잡은 바로 그 시점.

거기부터 이미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어두워지는 의식이 천천히 과거로 빨려 들어가려는 그 순간.

―음. 이 정도면 충분히 퍼질러 잔 거 같은데. 슬슬 일어나도 될까?

문득, 그런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온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금세 아득해졌다.

마왕이 내리친 검이 내 목에 닿은 것이다.

* * *

할센베르크 성을 떠난지 약 한 달 정도가 흘렀다.

미텔란트를 횡단하면서 나름 이 세상에 적응이 됐는데. 그동안 느낀 게 좀 있다. 크게 다섯 가지 정도다.

우선 첫째.

‘이쪽 동네는 진짜 암울한 동네다. 헬조선도 여기에 비하면 파라다이스야.’

할센베르크만 그런 게 아니었다. 이 세상은 기본적으로 매운맛이다.

드문드문 들르는 작은 마을들은 십중팔구 파괴된 흔적이 남아 있었고.

사람들의 눈은 동태 마냥 죽어있었고.

때 마침 줄초상이 나서 비탄에 잠긴 마을도 있었다.

‘그나마 사람 사는 냄새 나는 건 수도 뿐이었지.’

내가 서남쪽으로 직진하며 미텔란트에서 마르크트레스에 갈 때까지.

약 30개 이상의 도시와 마을을 들렀는데, 그 중 평화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곳은 딱 하나. 미텔란트의 수도인 마도(魔都) 헬릭스 뿐이다.

아무래도 변경백이 말했던 ‘칠마존’이 지키는 곳이라 그런 듯한데. 그 비호를 받지 못하는 다른 마을은 처참했다.

심지어는 며칠 사이에 완전히 망해서 유령마을이 된 곳도 부지기수다.

그리고 그 이유가 바로 두 번째 느낀 점.

‘마왕이 시도 때도 없이, 아무데서나 등장한다.’

내가 착각한 것이 있었다.

마왕이라는 건 그리 희귀한 존재가 아니다. 이 세상에선 일종의 기상현상에 가까운 자연재해다.

굳이 비유하자면 국지성 폭우다.

갑자기, 시도 때도 없이. 강한 마력파장이 허공에서 일그러지나 싶으면, 어느새 그곳에는 마왕이 등장해 주위의 모든 것들을 파괴하기 시작한다.

게다가 그 빈도가 상당히 잦다.

그래. 예를 들자면.

“죽어… 죽어라! 쓰레기 같은 인간들아! 내게 접근하지 마!!”

고함을 질러대는 하얀 머리 소년과, 그를 호위하는 백발에 보랏빛 피부의 여인.

바로 지금 내 눈앞에서 그들이 벌이는 것처럼 말이다.

“오지 마! 저리 꺼지란 말이다!!”

문득 불타는 마을 한복판에서 절규가 울려퍼졌다.

노을로 물든 하늘이 찌르르 울릴 정도로 격렬한 노성. 직후 반투명한 진청색 기운이 소년의 몸에서 폭발했다.

파지지직! 방사형으로 빠르게 퍼진 기운이 순식간에 수많은 용사들을 스쳐지나갔다.

퍼억, 퍼걱, 퍼버벅! 사람들이 바늘 앞의 풍선처럼 무력하게 폭발했다.

뼛조각과 장기가 사방으로 비산했다.

“히이익… 이, 이런!”

“대열 유지해! 못 도망치게 막으라고!”

“너나 잘해 X발련아!”

우왕좌왕. 당나라 군대마냥 웅성거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잿더미가 된 마을에 빼곡히 들어차 있다.

그들은 방금 알 수 없는 파동을 발사한 인물들을 포위하고 있었다. 그들을 먼발치서 쳐다보던 나도 순간 눈을 번득였다.

‘저게 마왕이군.’

문제의 파동을 발사한 것은 하얀 머리칼의 미소년이었다. 낡고 해진 법의(法衣)를 입고 두 손이 구속구로 묶인 상태다.

'아니… 저게 마왕인가?'

그 옆에는 '나 마족이요'라고 온몸으로 광고하는 듯한 보라색 피부의 누님이 있다.

한 손에 검붉은색 검을 쥐고, 껍데기만 남은 갑주의 쪼가리들을 아슬아슬하게 걸치고 있다.

나는 소년부터 누님까지, 한 번에 스테이터스를 훑었다.

[몬스터 정보]

[명칭: 마왕 폴룩시우스]

[체력: 588/588 마력: 1020/1020]

[힘: 30 민첩: 79 지능: 266]

[상세: 한 때 고대 신성국 슈엘츠의 젊은 교황이었던 자. 마녀 살해 계획을 꿈꾸었으나, 도리어 기사 한의 계략에 당해 마왕의 육체로 거듭났다. 정신이 불안정하며, 모든 마(魔)를 부정하는 강력한 펄스를 내뿜는다.]

[명칭: 발키레아 단장 프리뮬러]

[체력: 1184/1184 마력: 770/770]

[힘: 182 민첩: 201 지능: 55]

[상세: 고대 신성국 슈엘츠의 잊혀진 정예군 익갑(翼甲)기사단의 단장. 오직 교황 폴룩시우스를 지킨다는 본능만이 각인되어있다. 발키레아의 위명이자 상징인 익갑은 사용하지 못하나, 무력은 여전히 강력하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두 사람 중 하나가 마왕이었다. 누님이 아니라 소년 쪽이 마왕이었다는 건 좀 의외였지만.

보라 피부의 누님쪽은… 추측컨대 엘더리치 같은 상위마족.

쉽게 말하면 마왕의 호위무사쯤 되는 듯하다.

그리고 마왕이 이렇게 등장할 때마다 같이 느끼게 되는 이 세상의 특징. 그 세 번째.

‘이 세상엔 정말… 용사가 존나게 득시글거린다.’

꼬맹이 마왕과 마족 누님을 둘러싸고 격한 숨을 몰아쉬는 수백 명의 인파가 모두 용사다.

용사, 용사, 용사, 그리고 또 용사. 어딜 둘러봐도 용사들 천지다. 토 나올 정도다.

새삼 내 용사 넘버가 ‘163417413번째’인 것이 실감되는 인구밀집도.

육군훈련소에 모인 빡빡이들도 이렇게 많지는 않았던 것 같다.

‘아오 씨, 징그럽다 징그러워.’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눈살을 바짝 찌푸렸고. 이내 주위에 있던 설백과 루시에게 고개를 돌렸다.

“야 설백. 진짜 우리 이번만 그냥 지나치면 안 되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어련히 알아서 잡겠지.”

“안 돼요. 곤란에 처한 사람들을 못본 척할 수는 없어요!!”

“에효.”

그리고 설백에 대해서도 알게 된 게 있다. 그게 바로 네 번째.

이 여자는 출연 욕심만 있는 줄 알았더니, 정의감도 활활 타는 열혈 소녀였다. 불의를 보거나 곤경에 빠진 사람들을 보면 그냥 넘어가질 못하는 것이다.

쓰읍. 그렇게 안 생겨가지고.

“흐아아악! 주, 죽고 싶지 않아!!”

“사, 살려줘!!”

예상대로의 사태에 혀를 차고 있자니. 사태가 급변하기 시작했다.

그 때까지 가만히 있던 보라 피부의 누님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아아악!”

“이, 이 년이… 막아!”

“안 돼! 또 진형이 무너지면… 크하악!”

서석, 파스슷!

누님의 보랏빛 잔상이 일렁이는 곳에는 어김없이 피분수가 일었다.

반으로 절단된 인간의 시체들이 바닥에 마구 나뒹굴기 시작했다. 사방으로 유혈이 낭자한다.

현실감이 증발할 정도로 거침없는 살육이었다.

“히이익!”

누군가 내 주변에서 숨을 삼키며 쓰러진다.

고개를 돌려보니 대물저격총을 든 여자 용사였다. 온몸에 착 달라붙는 바디슈트. 그리고 귀가 토끼처럼 쫑긋 서있는 게 인상적이다.

나는 속으로 짧게 혀를 차고 명복을 빌어줬다.

“아… 아아!”

그녀가 숨을 삼킨 이유는 당연히 누님이 그녀의 앞에 나타났기 때문이고.

홀연히 나타난 누님의 손속은 자비가 없었다.

“죽어라, 버러지.”

푸직. 현실감없는 소리와 함께 누님의 녹슨 대검이 여자 용사를 반으로 갈랐다.

정수리부터 사타구니까지. 얼떨결에 들어올린 저격총조차 속절없이 반으로 동강났다.

여자 용사는 단말마조차 지르지 못하고 절명했다.

쩌저적.

반쪽난 시신이 단면부터 지면에 떨어진다. 질척한 파육음이 섬짓하게 다가왔다.

“…….”

그 일방적인 살육을 본 사람들이 하나같이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이내 장내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다름 아닌 같은 용사들에 의해서.

“저, 저리 비켜 이 새끼야!”

“으아악! 살려줘!”

“젠장… 이렇게 죽을 순 없어!!”

나는 예상 그대로 흘러가는 사태에 웃음까지 흘렸다.

이곳에 모인 수백 명의 사람들은, 대부분 방금까지 일면식도 없던 오합지졸이다.

그럼에도 이렇게나 많은 용사들이 이곳에서 북적이는 이유는 간단하다.

[퀘스트 발생 (에픽)]

[명칭: 마왕 출현! - 타락한 성좌, 마왕 폴룩시우스]

[상세: 강제 퀘스트. 해당 퀘스트를 받은 용사는 메인 타깃을 토벌하기 전까지 모든 행동이 제한되며, 1시간 이내로 타깃의 영향권에 강제전송 된다. 어떤 수단을 사용해도 상관없다. 메인 타깃을 사살하라.]

[보상: 전 스탯 +5. 금화1000냥(기여도 순위에 따른 추가 지급). 히어로 센스 +2]

[특수보상: 여신의 축복이 깃든 무작위 상자 ― 기여도 10위 이상의 용사에 한함]

그렇다.

퀘스트. 바로 저 퀘스트 때문에 모두 강제로 이곳에 전송된 상황이다.

이놈들 중에는 원치 않게 이곳으로 불려나온 놈들이 8할이고. 보상을 노리고 수저나 얹어볼 생각인 어중이떠중이가 나머지 2할이다.

나는 패닉에 빠져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이세계까지 와서 동원 소집을 받게 되다니. 인생사 X발.’

이놈들에게 동료애나 전우애가 있을 리 없다.

전황이 유리하면 상관없지만, 불리하면 당연히 이렇게 되는 것이다.

“흐아아악!”

“사, 살려! 살려줘!!”

스크럼은 속절없이 무너졌고. 용사고 나발이고 다들 무기도 팽개친 채 빤스런하기 바빴다.

그 와중에 밟혀죽거나 타인을 방패삼아 공격을 피하려는 사람도 부지기수다.

그야말로 아비규환. 개판 오분 전이다.

“크아악!”

“아아아악!”

그리고 이기심의 대가는 혹독했다.

“아신의 장난감들아…. 한 놈도 남김없이… 몰살해주마.”

스크럼의 붕괴는 누님의 동선을 더욱 활성화시켰다. 결과적으로 무력화된 용사들이 척살당하는 속도는 오히려 가속도가 붙었다.

그들은 자기 명줄을 재촉하는 행위를 한 것이다.

“… 윽!”

그리고 어느 순간. 전장을 종횡하던 누님의 날선 시선이 내쪽으로 닿았다.

내가 어깨를 움찔하는 찰나, 그녀의 신형이 사라졌다.

안 좋은 예감에 허리가 곤두섰다. 나는 곧장 상체를 숙였다.

“이런 썅!”

직후 후웅, 하는 파공성이 내 머리 위를 갈랐다. 누님이 어느새 내 앞으로 다가와 대검을 휘두른 것이다.

놀랄 시간도 없다. 나는 재빨리 설백과 마왕을 데리고 그녀에게서 거리를 벌렸다.

“감이 좋군. 버러지.”

히죽. 그녀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는가 싶더니.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는 본능적으로 베스타크를 꺼내 휘둘렀다.

카아아앙!

눈앞에서 불꽃이 터진다. 검과 검이 맞붙었다.

격돌한 우리는 한동안 서로를 노려보며 소리없는 싸움을 이어나갔다.

“내 검을… 막아냈는가.”

마족 누님은 조금 놀란 듯한 모습이었다. 나는 그 반응에 히죽 웃는 걸로 대답해줬다.

이쯤에서 밝히는 내가 깨달은 사실 마지막, 다섯 번째.

“다른 놈들이랑 같은 취급하면 피똥 쌀 거다.”

변경백은 상상 이상의 괴물이다. 넓은 세상을 겪고 나니 그게 확실해졌다.

그리고 그 괴물 아래 있었던 나는… 지금껏 비교대상이 없어서 몰랐을 뿐.

나도 모르는 새 반 괴물이 된 상태였다.

쉽게 말하면.

나는 지금, 현역 용사들 중에서도 중상위권은 되는 실력자다.

“나, 강림.”

나는 이죽거리면서 천천히, 검을 쥔 손에 힘을 더하기 시작했다.

키기기긱. 힘에서 밀리는 마족누님이 점점 뒷걸음질 쳤고.

그녀의 당황한 눈동자에는 의기양양한 내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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