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번외?1 ― 하얀 눈
불타는 마을 위로 눈이 내렸다.
때 아닌 폭설이었다. 눈은 세상을 하얗게 뒤덮었고. 불타는 마을은 하얀 도화지에 찍힌 붉은 점 같았다.
“…….”
여인은 그런 붉은 점의 한 가운데 서 있었다.
멍하니 불타는 민가와, 전소된 관아의 건물을 눈으로 훑는다.
크진 않아도 아름다웠던 설(雪)가문의 거주촌. 가문의 자랑이었던 멋들어진 기와집도, 살림 냄새가 물씬 나던 초가집도 없다.
그곳엔 다 타고 남은 잿더미와 부서진 살림살이뿐이었다.
“아… 아아….”
여인은 힘없는 신음과 함께 비척비척 걸어갔다. 이윽고 활활 불타고 있는 으리으리한 집을 눈에 담은 그녀는, 천천히 그곳을 향했다.
열기가 후끈 올라오는 대문을 지나, 널찍한 마당에 들어섰다.
마당 도처에 시체가 쓰레기처럼 널려있었다.
뱃가죽이 뚫린 중년의 남자. 목이 잘린 채 따로 뒹구는 중년 부인.
그녀 또래의 여인들이 난도질당한 채 죽어있는가 하면. 아직 젖도 떼지 못한 갓난아이가 포대기에 싸인 채 피로 물들어있다.
“아버지… 어머니….”
여인의 입에서는 공허한 호칭이 맴돌았다. 발밑에 널브러진 시체들을 칭하던 말이었다.
여인은 주저앉았다. 그리고 잘린 중년 부인의 머리를 감싸안고 흐느꼈다.
그녀는 엉금엉금 기어 처참하게 살해된 여인들에게 다가갔다.
“설화야… 설희야….”
여인은 하릴없이 그 이름을 입에 담으며 눈물을 떨궜다.
그리고 고통으로 일그러진 그녀들의 눈을 천천히 감겨줬다. 한 결 편한 표정이 되었다.
“아… 아아아!”
여인은 머리를 쥐어싸매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어디를 둘러봐도 시체였다. 그녀와 웃고 울고 함께 살아온 모두가 차가운 주검이 되어 눈발을 맞고 있었다.
살아 움직이는 거라곤 오직 자신뿐이다.
―그루루루!
문득 여인의 몸에서 투명한 기운이 일렁이더니. 이내 어깨 주변에서 투명한 용의 형상으로 합쳐졌다.
기룡(氣龍) 아란(牙蘭). 그녀가 어렸을 때부터 함께해온 기공령(氣功靈)이었다.
―그루루루….
아란은 여인의 볼을 자기 볼에 맞대고 비볐다. 주인이 슬퍼하는 모습을 보고 나름의 위로를 하는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냥 위로한다.
‘너만… 너만 아니었어도…!’
문득 여인의 갈 곳 없는 분노와 증오가 아란에게 쏟아졌다.
이것만 아니었어도, 이들과 같이 죽을 수 있었다. 단장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도 느끼지 않아도 되고. 슬픔도 느끼지 않아도 됐을 텐데.
아란 때문에 살아버렸다. 또 자기 혼자 살아남았다.
아란만 없었으면. 이것만 아니었으면….
“… 하아.”
하지만 여인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한숨을 쉬었다.
주인이 상처 입으면 회복시키고, 최선을 다해 지킨다.
그게 기공령의 사명이다. 아란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 그녀도 사실 알고 있었다.
‘그래. 잘못은….’
잘못은 자신에게 있다. 아무것도 지키지 못한 자신에게.
나약한 자신이야말로 진짜 죄인이다.
우드드득. 문득 요란한 소리와 함께 설가문의 본채가 주저앉았다.
잿더미가 되어가는 건물 위로 불티가 눈발과 섞여 하늘에서 흩날린다. 잿가루가 눈발에 섞여 회색 눈이 내렸다.
“…….”
여인… 설백은 그 광경을 멍하니 지켜봤다.
그녀의 추억들과 즐거운 기억이 무너진 본채와 함께 주저앉는 듯했다.
타들어간다. 새빨갛게 타서 잿더미만 남아간다. 그 위로 차가운 눈발이 흩날린다.
“음? 아직 잔당이 남아있었나.”
그리고 그녀가 막대한 자괴감에 빠져있던 그 때. 문득 그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인은 등을 돌렸다. 그리고 멀찍이 서 있는 남자를 눈에 담고 눈을 부릅떴다.
“당신은….”
거대한 체구에 참마도를 쥔 초로의 남자였다.
흉터가 가득한 얼굴 위로는 하얀 수염이 덥수룩하고, 가운데만 일자로 길게 기른 특이한 머리 모양을 하고 있다.
무림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머리모양. 이방의 오랑캐가 분명하다.
“나찰수(羅刹獸) 유용연.”
설백의 입에서 남자의 이름이 나왔다.
그의 모든 것을 빼앗은 남자. 가족과 친구들을 모두 죽이고, 그녀의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든 장본인.
그가 지금 다시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네년은… 분명히 죽였을 터인데. 어떻게 살아있는 게냐.”
하지만 놀란 것은 유용연도 마찬가지다.
그는 무림맹주로부터 마교에 물든 마을을 완전히 멸절시키라는 명을 받았고. 충직한 번견인 그는 분부대로 행했다.
젖먹이부터 노인까지. 단 하나도 살려주지 않았다.
그것은 설백 역시 마찬가지였다. 배를 참마도로 관통했는데 어떻게 그녀가 살아서 움직이고 있는가.
“호오… 설마 내 눈으로 직접 목격하게 될 줄이야.”
유용연은 귀신에 홀린 느낌으로 천천히 설백에게 다가갔다. 입가엔 위험한 미소가 걸려있다.
뽀드득. 그의 걸음걸이에 맞춰 바닥의 눈이 비명을 질렀다.
“… 마교의 사술을 쓴 것인가. 역시 소문대로다. 맹주님의 말씀은 틀리는 법이 없군.”
소문. 그 말에 설백은 눈을 크게 떴다.
설백은 한이 맺힌 눈으로 유용연을 쳐다봤다. 그 필사적인 행색에 순간 유용연마저 걸음을 움찔할 정도였다.
“소문이라니. 대체 어떤 소문을 듣고, 무림맹이 이런 끔찍한 짓을…?”
“설가문의 차녀가 마교의 사술을 사용해 불사 연구를 한다는 소문이지.”
“……!”
“차녀 설백. 그게 네년이었군. 언제까지 소문을 숨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미련하게 아직도 본가에 머무르다니.”
설백은 심장이 멎는 듯한 느낌에 숨을 삼켰다.
겉잡을 수 없이 떨리는 손이 유용연을 향했다.
“그, 그렇다면! 저를 처벌하면 될 것을 어찌 저희 가문을…!”
“악즉참. 무림맹은 마교에 관한 사안만큼은 일말의 자비도 없다는 것을 모른다고는 하지 않겠지. 네년도 강호인이었을 테니.”
“…….”
“흑룡마탑의 변 이후 100년. 무수한 피를 흘려 얻은 이 평화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할 것이다.”
아. 아아.
설백은 순간 몸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엎어졌다.
새삼스레 주위를 살펴본다. 끔찍한 참상을 눈에 담자 엄청난 비참함이 몰려왔다.
‘전부… 나 때문에?’
기공령이라는 특수한 존재.
다양한 전투법과 비전이 전해 내려오는 무림에서조차 기공령은 생소하다. 문헌에서조차 찾기 힘든 그 존재를 설백은 우연하게 갖게 되었다.
마교의 사술. 그렇게 여겨져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바보 같이… 바보 같이 나는…!”
설백은 그 자리에 엎드려 통곡했다.
좀 더 빨리 무림맹에서 보내는 불온한 기척을 감지했다면. 저주처럼 따라다니는 기공령을 애초에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최소한 조금이라도 빨리 위험을 예지하고 출가를 결심했다면.
아니. 애초에 내가 이렇게 나약하지 않았다면.
이런 모든 위협을 견뎌낼 만한 힘과 지혜가 자신에게 있었다면.
그랬다면 지금 같은 비극은 없지 않았을까.
무수한 후회가 그녀의 뇌를 휘저었고.
철컹! 날카로운 금속음이 그것을 일순간에 갈라버렸다.
설백이 고개를 들자, 지척까지 다가온 유용연이 참마도를 번쩍 들고 있었다.
“마교의 사술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겠으나. 죽지 않는다면 나는 그저 죽을 때까지 네년을 벨뿐이다.”
“…….”
“파무선의 평화를 위해서.”
설백은 말없이 고개를 떨궜다. 죽음을 기다리는 사형수 같았다.
그 일체의 저항없는 행색에 유용연이 잠시 행동을 멈췄다.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보길 잠시.
이내 칼을 쥔 그의 손에서 망설임이 사라졌다.
“… 원망하지 말라고는 않겠다.”
퍼걱. 둔탁한 소음이 들린 것 같았다.
설백의 시야에 마지막으로 비치는 것은 피로 물드는 새하얀 눈이었다.
무심결에 예쁘다고 생각하는 자신을 느끼고 설백은 입꼬리를 슬쩍 틀어올렸다.
* * *
―그루루… 끼잉… 그루루루!
죽은 눈으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는 설백. 그 주변으로 투명한 새끼용이 연신 맴돌고 있었다.
설백의 기공령. 기룡 아란이었다.
―그루루루루!
아란은 연신 설백의 몸으로 연녹빛 기운을 흘려넣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 설백의 주위에서 맴돌뿐, 금세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다. 설백의 얼굴에서 잠깐씩 돌던 혈기는 기운과 함께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러고 나면 거기엔 피가 잔뜩 고인 웅덩이와, 그 위에 놓인 차가운 시신만이 남는다.
―그루루루….
아란은 슬픈 눈빛으로 주인의 뺨을 계속 부볐다. 눈발이 쌓이기 시작한 얼굴을 핥아낸다.
그러자 산들거리는 바람이 불어와 그녀에게 쌓인 눈을 치워나갔다.
눈이 쌓이고, 아란이 치운다. 그것을 한동안 끝없이 반복했다.
―그우우우!!
어느 순간, 아란이 하늘을 향해 높은 울음소리를 냈다.
드디어 인정했다. 주인이 죽어버렸다. 자신은 주인을 지키지 못한 것이다.
―끼잉… 그루루….
주변엔 아무것도 없었다.
전소된 잿더미에선 뭉게뭉게 연기가 흘러나왔다. 시체 타는 냄새가 사방에 자욱하다.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묘지처럼 무겁게 적막하다.
그런 참상의 한복판에 어느 순간.
“천살의 업이라… 이 정도면 진짜 뭐가 있긴 한가보네?”
무림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어두운 금발을 가진 미녀가 나타났다.
새하얀 전통복을 입고 비녀를 꽂은 그녀에게선 알 수 없는 매력이 흘러나왔고. 동시에 깊이를 알 수 없는 음험함이 숨어있었다.
―그루루루! 키이이익!
여자의 존재를 알아챈 아란이 바짝 비늘을 세우고 위협의 포효를 내질렀다.
그러나 여자는 아무렇지 않게 히죽 웃더니. 이내 설백의 시신을 향해 걸어갔다.
“천살성을 타고난 계집이 하필이면 기공령도 타고 나다니. 백정한테 의료용 침을 쥐어준 꼴이네.”
푸화아악!
어느 순간, 아란이 입을 쩍 벌리고 무언가 토해냈다.
엄청난 기의 폭류가 금발 여인을 덮쳤다. 충격파가 일어나며 눈발이 매섭게 흩날렸다.
그러나 그 거친 풍파가 그치고 나자, 여전히 상처하나 없는 금발 여인이 드러났다.
―그루루?
아란은 당황한 듯 연신 울음소리를 냈다.
그러는 사이 이미 여인은 설백의 앞까지 도달한 상태였다.
“이미 죽었으면 계약 절차가 좀 까다로워지는데… 이럴 경우엔….”
설백의 뺨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리던 여인. 그녀의 눈동자가 아란에게 쏠렸다.
아란은 입을 크게 벌리고 위협적인 자세를 취했다.
―키이익! 그우우우!
하지만 기룡은 영리한 영물이다.
이미 눈앞의 존재가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존재라는 건 깨달은 상태다. 때문에 위협에는 맥아리가 없었다.
여인도 그것을 눈치챈 것일까. 아란을 향해 한발짝 다가가며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보호자의 허가가 좀 필요할 것 같은데 말이야.”
―… 그루루?
“네 주인 살리고 싶지 않아?”
―그루루루!
“난 네 주인을 살려줄 수 있어. 나를 한 번 믿어보겠어? 아님 이대로 주인이 죽는 걸 방치할 거니?”
다시금 말하지만 기룡은 현명하고 영리하다.
지금 금발의 여인이 하는 말을 분명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도 확실히 알고 있다.
흥미로 번쩍이는 아란의 눈을 가만히 쳐다보던 금발의 여인은….
“자. 읽어보고 지장 찍으렴. 이세계의 귀여운 엘리멘트 드래곤.”
고혹적인 미소와 함께 아란에게 계약서 한 장을 내밀었다.
* * *
설백의 기룡이 어떤 선택을 했냐고?
그건 똥털… 아니, 금발여인과 아란만이 알지만. 그 기룡이 선택한 결과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자명하다.
설백이 가이알란트라는 이세계에서 전생했고.
하필이면 미친 메이드의 초보 용사 학살이 한창이던 할센베르크령에 떨어졌고.
그녀를 제외한 모든 용사가 살해당했으며.
주인을 한 번 잃고 절치부심한 아란 덕에 설백은 목숨을 건졌지만, 감금을 당했다.
그리고.
몇 년 후, 불사의 마왕을 지키는 163417413번째 용사와 만나게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