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3417413번째 소울라이크 용사-55화 (31/280)

55화 그들을 찾아서

그렇게 말하는 변경백의 얼굴엔 시원섭섭한 감정이 묻어나고 있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변경백에게 잔을 들이밀었다.

“아 예. 역시 변경백님. 눈치도 남다르시네요.”

“… 그래. 자네는 이계에서 찾아온 용사의 몸. 언제까지고 이곳에 머무를 순 없는 노릇이겠지.”

변경백도 마주 웃으며 포도주를 다시 따랐다.

우리는 잔을 부딪치고 한 번에 들이켰다.

“…….”

“…….”

침묵 속에서 멍하니 은잔만 바라보길 잠시.

문득 변경백이 먼저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며 말문을 텄다.

“특별히 행선지는 있나?”

“예 뭐. 갈 곳은 정해뒀습니다.”

“호오. 어디로 향할 생각인가.”

“운터란트. 망자의 계곡이라는 곳으로요.”

“망자의 계곡이라.”

변경백은 예상치 못한 대답이 나와서인지 눈을 부릅떴다.

하긴 그럴 법도 하다. 기억이 맞다면 운터란트의 망자의 계곡은 남쪽 끝에 있는 지역이다.

북쪽 끝에 있는 내가 남쪽 끝까지 대륙 국토대장정을 하는 이유가 궁금할 법도 하지.

“내 자세히 알지는 못하네만. 풍문을 듣기로는 이곳만큼이나 위험한 곳이라 하더군. 그곳 역시 4마왕 중 하나의 세력이 자리잡은 곳이니까.”

“4마왕… 이요? 불사의 마왕 같은?”

“그렇다네. ‘우상의 마왕’이라 불리는 자드키엘이 그곳에 있네.”

“자드키엘….”

이건 또 새로운 정보다. 역시 변경백과 같이 있다보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니까.

루시한테 물어볼 게 하나 생겼군. 나는 속으로 새로운 정보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런 위험천만한 곳에 자네가 간다 하니….”

변경백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이유를 묻는 시선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 뒤 덧붙였다.

“제 지인들이 아마 그 주변에 있을 거라서요. 일단 이 세상에 눌러 붙어야 하니, 제 편을 최대한 모을 생각입니다.”

“허허. 설백 처자를 구한 것처럼 말인가?”

“뭐, 그렇죠.”

시험의 장막에서 나만 빼고 모든 사람들이 게이트로 빨려 들어갔던 바로 그곳.

운터란트의 망자의 계곡. 나는 그 이름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내가 이 할센베르크 성에서 살면서 느낀 것은. 이 세상은 위험하다는 것.

혼자 털레털레 다녔다간 비명횡사하기 딱 좋다는 것이다.

‘동료. 일단 내가 믿고 맡길 수 있는 파티를 짜는 게 급선무다.’

내가 가장 먼저 운터란트에 가는 이유는 그것이다.

시험의 장막에서 친해졌던 알드콘, 스칼로. 그리고 세스나가 있을 확률이 높은 장소니까.

크라네이드는 용제국 케나인에 떨어졌으니 뭐, 그 다음에 찾으러 가면 되고.

본인이 떨었던 허풍이 반만 사실이어도 그리 쉽게 죽을 양반은 아니니 천천히 찾아도 되겠지.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그렇다면. 혹시 마르크트레스를 거쳐서 향할 생각인가? 아니면 용제국?”

변경백이 새 잔을 채우며 그렇게 묻는다.

나는 그 물음에 곧장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 직통으로 통하는 길은 없습니까?”

“본래 미텔란트와 운터란트는 하나의 국가였네만… 대륙 중앙이 마녀에게 오염된 뒤로는 두 나라를 거쳐 우회해야만 갈 수 있게 되었지. 물리적으로 완전히 단절되었네.”

“아… 하.”

미텔란트와 운터란트. 어쩐지 네이밍 센스가 비슷하다 싶었더니 원래 하나였다는 모양이다.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마르크트레스나 용제국 중 하나를 거쳐서 가야 한다고?

이건 좀 내 예상이랑 다른데. 여행이 쓸데없이 길어질 조짐이 보인다.

“음… 그럼 어쩌지….”

어느 쪽이든 정보가 없는 건 매한가지다.

유일한 정보가 있다면 용제국에는 내 지인인 크라네이드가 있다는 것 정도.

미미르의 눈으로 알아보며 다닌다 쳐도, 웬만하면 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는 경로로 가고 싶은데.

용제국과 마르크트레스. 둘 중 어디가 위험도가 낮지?

“혹 경로가 정해지지 않았다면 마르크트레스를 추천하지.”

내 고민을 타파해주는 변경백의 믿음직한 목소리.

내가 퍼뜩 고개를 들자, 그는 포도주를 홀짝이며 믿음직한 눈빛으로 말했다.

“내 오랜 지인이 마르크트레스에 하나 있네. 기별을 보내 자네를 알릴 테니, 그의 도움을 받도록 하게.”

“아뇨 변경백님, 거기까지 신세질 수는….”

“적어도 무투에 관해선 나조차 이길 수 없는 강자일세. 서로 많은 것을 배운 사이지.”

“예. 꼭 좀 도와달라고 부탁드리겠습니다.”

그걸 먼저 말해주셨어야죠 변경백님. 썩은물 팬티맨 인맥은 언제든 환영입니다.

나의 번개 같은 태세변환에 잠시 벙쪘던 변경백. 그가 이내 너털웃음과 함께 자기 자리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알겠네. 마지막으로 이 할센베르크의 영웅인 자네를 빈손으로 보내기도 뭐하니, 내 작은 성의를 받아주게나.”

“아유. 성의라뇨. 뭐 그런 걸 다….”

나는 만류하는 척을 했다.

어디까지나 척이다. 이건 그냥 받겠다는 소리다. 국룰이지.

당장 성 바깥에 뭐가 있을지 알 수 없는 나로서는 뭐 준다면 사양할 이유가 없다.

“이걸 가져가게나. 분명히 자네에게 도움이 될 걸세.”

그렇게 말하며 변경백이 내민 건, 다름 아닌 변경백이 사용하던 애검이었다.

탁하고 새하얀 검신이 섬뜩한 장검. 달빛을 받았을 때 유난히 서늘하게 빛나던 것을 똑똑히 기억한다.

나는 그것을 받아들고 가만히 살펴봤다. 곧 상태창이 떠올랐다.

[아이템 정보]

[명칭: 마검 에스파다 (유물급)]

[보정치: 힘 +20, 민첩 +15]

[상세: 마녀의 기사 ‘한’이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순백의 골검(骨劍). 무엇의 뼈인지는 불명이나 강도가 상당하다. 인위적 강화는 불가능하며, 사용자의 힘에 따라 스스로 강해진다.]

[강화 가능 회수: 0]

‘… 마녀의 기사 한?’

설명을 읽은 나는 순간 벙쪘다. 허리춤에 걸린 베스타크에 퍼뜩 시선을 박았다.

이 검이 사실 베스타크와 페어였다고? 마녀의 기사라는 놈은 쌍검 사용자였나?

그게 이렇게 기막힌 우연으로 만나다니. 뭔 운명의 장난이냐.

‘… 쌍수무기 사용자는 제명에 못 사는데.’

나는 곧 심각한 얼굴로 두 검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래. 운명의 장난이 아니고, 어쩌면 필연일지도 모른다. 내가 이곳에 소환된 것부터가 아신들에게 의도된 것이었으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한 편, 변경백을 쳐다보며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변경백님이 직접 사용하던 검인데… 게다가 이거 좀 범상치 않은 물건 같은데요.”

“범상치 않은 자네에게 어울리는 물건이지.”

의미심장하게 웃는 변경백의 눈빛이 유난히 찌르는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것은 옛날, 어떤 고대마족의 수장이 가지고 있던 것을 내가 빼앗은 물건이네. 모두들 흉한 기운이 서려 있으니 버리라 했지만… 글쎄. 난 그러고 싶지가 않더군.”

“…!”

“그 마족 역시 불사의 마왕 휘하에 있던 마족이었네.”

어쩌면, 변경백은 내 정체를 어렴풋이 짐작했는지도 모르겠다. 변경백의 의미심장한 표정을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조심스레 쳐다보자,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난 아무것도 묻지 않겠네. 자네는 그저 할센베르크를 위기에서 구한 영웅일세. 그렇게 기억하겠네.”

“… 감사합니다. 변경백님.”

“그러나 그 검은 확실히, 나보단 자네가 가지는 게 더 어울리는군. 확신이 드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나는 검을 반대편 허리춤에 차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래. 어차피 내겐 한동안 쓸 일도 없는 물건이니 말이야.”

“평화로운 시대에 총칼은 무게만 많이 나가는 짐이죠.”

“하하. 그래. 맞는 말일세.”

호탕하게 웃어넘긴 변경백은 마지막으로 잔에 포도주를 따랐다. 그리고 내게 슬쩍 내밀었다.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전서를 날리게. 모든 것을 뒤로하고 자네를 돕겠네.”

나는 피식 웃었다. 여기는 멋진 건배사 한 번 날려줄 대목이군.

잔을 힘차게 부딪친 나는 포도주를 쭉 들이키며 말했다.

“앞으로 번영할 할센베르크와, 어진 지도자 할센베르크 변경백을 위하여.”

“… 위하여.”

그렇게, 변경백과의 해후는 거기서 끝이 났다.

마지막으로 변경백이 여행에 필요한 경비와 여행용품 등을 좀 챙겨줬고.

동시에 이런 말을 남겼다.

“조심하게 정용 공.”

“예? 뭘요?”

“내 최대한 함구는 하겠네만. 미텔란트의 오랜 역질이었던 엘더리치를, 소환된지 두 달 만에 토벌해버린 자네의 소문은… 아마 내 상상 이상으로 삽시간에 퍼질 걸세.”

“…….”

생각지도 못한 부분이었다.

나는 입을 다물었고. 변경백은 내 안색을 살피며 계속 말했다.

“대부분은 자네의 업적을 기뻐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무리들도 분명히 있네.”

“그렇지 않은 무리…?”

“…… 모쪼록 행동거지를 조심하시게.”

뭐, 대충 그런 말이었다.

결국 변경백은 ‘그렇지 않은 무리’에 대해서는 자세히 말해주지 않았다. 일부러 안 알려준다기 보다는, 본인도 확신하지 못할 존재들이기에 말을 아꼈지 싶다.

그렇게 나는 똥 싸다 만듯한 찝찝함과 함께 할센베르크 성의 본채를 나와야했다.

“아, 정용님! 여기에요!”

고개를 들어보니, 마왕과 설백이 채비를 끝내놓고 대기하고 있었다.

나는 성의 정문에 서있는 그들에게 다가갔고. 배낭을 어깨에 걸치며 발걸음을 옮겼다.

“얘기는 잘 끝내셨나요?”

“뭔 사내새끼들이 담소를 그리 길게 하느냐! 기다리다 목 빠지는 줄 알았느니라!”

한 마디씩 덧붙인 설백과 마왕은 곧장 내 뒤를 따라붙었다.

그리고 우리가 박살난 정문을 지나고. 내성(內城)의 무너진 담을 넘고. 폐허가 된 영지를 지나쳐, 마침내 외성(外城)의 이끼 낀 성벽을 넘어가는 순간.

내 앞에 드디어 띠링, 하는 소리와 함께 팡파레가 울렸다.

[퀘스트 완료!]

[명칭: 용사의 시험 - 폐성 탈출]

[상세: 정식 용사가 되기 위한 시험. 어떤 수단과 방법을 사용해도 좋다. 저주받은 폐성 할센베르크를 탈출하라.]

[보상: 정식 용사 칭호. ‘1급 랜덤상자 - 사신의 선물’. 전 스탯 +20. 히어로 센스 +5]

드디어.

답도 없어 보이던 퀘스트를 완료했다.

감격스런 마음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한파 속에서 어스름하게 빛나는 하늘도 유난히 맑아 보인다.

‘아임 프리덤!’

온몸에서 휘황찬란한 황금빛이 뿜어져 나온다. 나는 쇼생크 탈출 주인공마냥 두 팔을 벌리고 그 감각을 음미했다.

스탯이 일순간에 강화되어서인지 힘이 샘솟는다. 나는 주먹을 쥐었다 펴며 상태창을 띄웠다.

[명칭: 박정용]

[별칭: 163417413번째 정식 용사. 마왕의 알 수호자. 불사에 종속된 자]

[LV. 101]

[체력: 753/753 마력: 220/220 신체상태: 정상]

[힘: 123 민첩: 159 지능: 43 히어로 센스: 11]

[남은 능력치 포인트: 54]

“와 미친… 엘더리치 하나 잡아서 18렙이나 올랐네….”

지금까지 경황이 없어서 확인을 못하고 있었는데. 엘더리치가 거물이긴 거물이었나 보다.

수백에 달하는 일반 언데드를 때려잡아야 간신히 1레벨을 올리는 상황이었는데 단숨에 18레벨이 상승하다니.

막상 이렇게 되니 남은 능력치 포인트를 어디에 쓸지부터가 고민됐다.

‘뭐, 아무려면 어때.’

지금 기분이라면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지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나는 두 사람을 한 번씩 훑어본 뒤, 먼저 서남쪽을 향해 발을 옮겼다. 마왕과 설백도 고개를 끄덕이곤 내 뒤를 쫓았다.

“가자. 마르크트레스로.”

“네! 가요!”

“으하하! 드디어 이몸의 위대한 대업이 시작되는가!”

각오에 찬 한 마디를 마지막으로.

우리는 서남쪽을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