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니 지팡이 쩔더라
“루시. 이 주변이라면서. 왜 안 보이는데.”
“아니 분명 여기 맞다니깐! 못 믿을 거면 왜 데려왔냐 이놈아!”
“맞는데 왜 안 보이냐고. 맞고 싶냐?”
“포, 폭력 반대다! 용사씩이나 돼가지고 가녀린 아녀자에게 폭력을 쓰다니!”
“자기 입으로 그런 말하면 자괴감 안 드냐?”
“… 으이씨….”
언데드의 본거지였던 할센베르크 북쪽 영지, 눈의 평원까지 찾아온 루시와 나.
우리는 눈과 재가 수북히 쌓인 하얀 평원 한 가운데서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루시와 나의 말싸움은 국군 장병이 아침점호 하듯 일일행사 같은 거니 차치하고.
문제는 그 말싸움의 내용이다.
“이쯤에서 죽었으면 내 시체가 있어야 할 거 아냐.”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온통 수북이 쌓인 재투성이다. 거짓말 전혀 안 섞고 어디를 둘러봐도 회백색 잿더미 밖에 안 보인다.
당연히, 내 시체나 잔류사념도 잿더미에 묻혀서 코빼기도 안 보인다.
‘언데드가 진짜 많긴 많았구나.’
지금 우리가 서있는 곳만 해도 무릎까지 잿더미가 쌓여 있다. 많이 쌓인 곳은 가슴까지 올 정도다.
‘강원도 군생활 할 때도 이렇게 눈 쌓인 적이 드물었는데.’
어쨌든 마왕이 말해준 전생의 내가 죽은 장소에 와 봤는데, 시체가 어디 있는지 보이질 않는다.
이자나미의 심장 역시 대략적인 위치를 파악해줄 뿐이라서 정확한 위치를 특정하기는 어렵다.
하물며 바닥이 이런 상태면, 마왕의 기억이 아무리 정확해도 못 찾을만도 하다.
‘역시 포기해야 하나?’
사실 전투 중 급박한 와중에 스테이터스를 올렸을 리도 없으니, 사념을 수복한다고 능력치가 올라갈 확률이 거의 없다. 경험치와 레벨 계승은 '사신의 총애' 스킬 효과라 이자나미의 심장과는 아무 상관도 없고…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마왕한테 들어서 대충은 다 알고 있다.
굳이 사념을 회수할 필요는 없다. 다만 찝찝해서 왔을 뿐이지.
'그래. 포기하자.'
남자가 돼가지고 지난 일에 그렇게 집착하는 꼴도 추하긴 하지.
나는 깔끔하게 포기한 뒤 발길을 돌렸고.
“어크악?!”
툭. 직후 무언가 발등에 걸려 성대하게 자빠졌다.
순간 눈코입귀 할 것 없이 얼굴의 모든 구멍에 잿가루가 풀썩 쏟아졌다.
“아푸압! 쿨럭! 커헉!! 에윽X발!”
가까스로 일어나보니 온몸이 큼호타이어 마스코트마냥 허여멀겋게 변해 있었고.
마왕은 그런 나를 보더니 자지러지게 웃었다.
“푸하하하! 꼴좋다 용사놈아! 정의는 승리하는 법이다!”
아니, 마왕이 그런 말 하면 자괴감 안 드냐고. 딴지 걸까 하다가 말았다.
딴지 대신 마왕의 발을 걸어 그녀도 넘어뜨려 버렸다.
“아푸압! 케흑 컬럭! 이, 이 미친 용사카흡!”
잿더미에 파묻혀 허우적대는 마왕. 키가 쪼만해서 그런지 좀처럼 일어나지도 못했다.
좋아. 마음이 한 결 편안해졌다. 튀김옷이 골고루 묻었다 싶었을 때 나는 그녀를 꺼내줬다.
“브에….”
지친 얼굴의 마왕이 입을 벌리자 잿가루가 우수수 쏟아진다. 나도 모르게 질색하는 표정을 짓고 말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녀의 손에 들린 작은 지팡이에 눈길이 갔다.
“… 그건 뭐냐?”
“응? 뭐 말이냐?”
“네가 손에 든 그거.”
“내 손에 뭐가….”
마왕은 그제야 자기 손을 바라봤고.
눈을 부릅뜨며 스태프를 번쩍 들어올렸다.
“엥? 뭐냐 이거? 언제 쥐어놨냐 용사.”
“…….”
아무래도 바닥에서 허우적거릴 때 반사적으로 집지 않았나 싶다.
내가 걸려 넘어진 것도 바로 저 스태프일 테지. 나는 한숨을 슬쩍 내쉬고 마왕의 손에서 스태프를 넘겨받았다.
“이건….”
새빨갛고 거대한 보석이 인상적인 시커먼 스태프. 지금의 내 기억엔 없는 아이템이다.
다만 내가 죽은 장소 주변에 있었던 걸로 보아, 고위급 언데드 간부가 쓰던 놈이라는 건 유추할 수 있었다.
나는 가만히 주시해 미미르의 눈을 발동시켰다.
[명칭: 진혼(鎭魂)의 단장(短杖) (유물급)]
[보정치: 힘―5, 지능+35, 마법계 스킬 레벨 보조 +2]
[상세: 루스티카 아스모데우스의 가장 충직한 가신 엘더리치가 사용하는 단장. 엄선한 루비에 엘더리치의 강력한 마력이 깃들어 마법보조에 뛰어난 성능을 발휘한다.]
[강화 가능 회수: 1]
“와 X발 미쳤잖아…!”
내가 지금껏 많은 아이템을 봐왔지만, 스탯을 30포인트 이상 올려주는 아이템은 이게 처음이었다.
물론 힘이 5포인트 감소하지만. 어차피 ‘마법사(물리)’ 같은 미친짓 할 게 아니면 힘이 무슨 필요가 있냐. 간달프도 아니고.
‘아니. 그것도 그거지만….’
그리고 모든 마법계 스킬 레벨보조. 이게 진짜 사기적인 대목이다.
35스탯 증가는 약 12레벨의 보정치라고 친다면. 스킬 레벨보조는 마법계 스킬을 많이 익히고 있을수록 효율이 사기적으로 상승한다.
‘이런 게 바로 성장형 무기지.’
10개를 익히고 있으면 20레벨 증가 효과가, 그리고 20개를 익히고 있으면 40레벨 증가 효과가 들어오는 셈이다.
즉 저레벨부터 고레벨까지 실력에 따라 성능이 증감하니, 이거 하나 있으면 굳이 다른 장비를 찾을 이유가 없다.
‘오케이. 게임셋.’
더 이상 여기에 볼일이 없어졌다.
잔류사념? 알 게 뭐냐. 사람은 앞을 보고 살아야하는 법이다.
잔류사념보다 더 좋은 걸 발견했으니 수색이 헛되지도 않았다. 깔끔하게 포기하자.
“나중에 설백한테 줘야겠다.”
일단 설백은 지능캐다. 설백이 사용하는 기술이 ‘마법’으로 취급될지는 모르겠다만. 어쨌든 35스탯의 증가는 절대 적은 양이 아니니까.
나는 개운한 마음으로 잿더미 어딘가를 바라보며, 지팡이를 가방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히죽 웃으며, 얼굴도 모르는 지팡이의 주인에게 중얼거렸다.
“니 지팡이 쩔더라.”
갑자기 싱글벙글된 나를 보고 질색하던 마왕을 데리고, 성을 향해 걸어갔다.
이젠 진짜 마지막이다.
할센베르크와의 마지막 해후를 위해 성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 * *
“오오. 정용 공! 깨어났구려! 할센베르크의 영웅! 이렇게 사흘만에 다시 보니 참으로 기쁘오!”
오랜만에 본 할센베르크 변경백은 전과 꽤 성격이 달라져 있었다.
일단 나한테 존댓말을 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얼굴에서 웃음이 떠날 생각을 안 했다.
텐션이 하늘을 찌른다. 지금도 알현실의 인테리어를 손수 바꾸면서 나를 반기는데, 그 활기찬 오오라 때문에 나까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우욱 씹….”
마왕이 옆에서 질색한다. 헛구역질을 하나 싶더니 서둘러 알현실을 탈출했다.
근데 솔직히 나도 기분 나쁘다.
나는 보다 못해 한 마디했다.
“저기요 변경백님.”
“음, 왜 그러시오. 할센베르크의 영웅!”
“일단 존댓말 하지 말아주시고요. 그 호칭도 제발 자제해주십쇼. 대화하고 싶은 마음이 싹 가시네요.”
“…… 흠. 아, 알겠네. 미안하네.”
“아뇨. 미안할 건 없고요.”
할센베르크는 머쓱하게 헛기침을 하더니 다시 평소처럼 돌아왔다.
다행이다. 온 오프가 가능한 수준이었군. 아니었으면 당장 짐 싸서 갈뻔했다.
‘으음. 여기도 꽤 많이 변했군.’
나는 주변을 한 번 살펴봤다.
다 쓰러져가던 알현실은 제법 엄숙한 분위기로 돌아와 있었다. 전체적으로 검은색으로 치장한 각종 제기들이 눈에 띄었다.
나는 벽에 걸린 태피스트리를 건드리며 물었다.
“뭐 하고 계셨습니까? 리모델링?”
“별 건 아니고. 이곳에서 죽어간 많은 이들을 위한 제례를 준비중이었네.”
“… 아하.”
어쩐지. 인테리어 치곤 시커멓고 우중충하다 싶더라니. 제사상 준비중이었군.
내가 엄숙하게 자세를 고쳐잡자, 변경백은 오히려 손사래를 치며 껄껄 웃었다.
“딱딱하게 생각할 것 없네. 전에는 위령제는커녕 부활하는 언데드를 진압하는 데만 해도 벅찼다네. 이렇게 제례를 할 수 있게 된 것도 모두 자네 덕분일세.”
“… 그렇군요.”
이 양반은 심각한 얘기를 웃으면서 하는 재주가 있다.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난감하니까 심각한 얘기는 심각한 얼굴로 해주십쇼 변경백님. 제발.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다행히 변경백의 입에서 희망적인 이야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계엄령을 철회했으니, 피난을 보냈던 영지민들이 곧 다시 이곳으로 송환될 걸세.”
“오오.”
“지나온 슬픔을 잊고… 새롭게 출발하기 위한 의식인 게지. 말하자면.”
그것은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이 넓은 성에 레이라와 변경백, 그리고 미쳐버린 그윈 셋뿐인 광경은 너무 인간미가 없다.
성이 사용인들과 영지민들로 북적이는 상상을 하자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얼어붙은 성의 온도가 후끈 달아오른 기분이다.
“좋네요. 사람들 많아지고 좀 살만해지시면, 언제 다시 한 번 초대해주십쇼. 제 눈으로 꼭 한 번 보고 싶습니다.”
“이런 망해버린 영지에 다시 돌아올 희망자가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그렇게 말하는 변경백의 입가엔 쓴웃음이 걸려 있었다.
미안한 마음과 걱적스런 마음이 뒤섞인 얼굴로 그는 말했다.
“자네의 활약 덕에 언데드들은 모두 사라졌지만… 이곳이 살기 척박한 땅인 건 여전하네. 매서운 한파도 그렇지만… 고대마족이 엘더리치만 있는 것도 아니니 말일세. 강맹했던 호랑이가 물러갔으니 다른 마족들이 호시탐탐 이 땅을 노리겠지.”
“그래도 제가 영지민이었으면 바로 돌아왔습니다. 변경백님 인덕을 봐서라도요.”
“하하하. 말이라도 고맙네.”
자조적으로 웃어넘긴 변경백은, 제례용 은잔에 포도주를 가득 따랐다. 그리고 한 잔을 내게 넘겼다.
“술은 좋아하나?”
“없어서 못 먹죠.”
나는 그것을 받아들고 쭉 들이켰다. 원샷이다.
변경백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기도 쭉 들이킨다. 역시나 원샷이었다.
… 저번에 불알 떼라고 했던 거 취소해야겠다.
“… 음. 과연. 그렇군.”
가만히 빈 잔을 바라보던 변경백이 어느 순간 제혼자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눈빛을 고치며 나를 쳐다봤다.
진지하게 치켜뜬 눈동자엔 안타까움이 서려 있었다.
“다시 초대해달라는 말은… 이제 자네는 이곳을 떠나겠다는 소리로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