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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417413번째 소울라이크 용사-53화 (29/280)

53화 그녀들의 엔딩

“갸아악! 구와아악!”

나는 비명을 지르며 눈을 떴다.

그리고 몸서리 쳐지는 악몽에서 깨어나 숨을 몰아쉬었다.

“허억… 허어….”

엄청난 꿈을 꿨다.

내가 글쎄 용사로 이세계에 소환됐는데. 죽지도 못하는 이상한 몸이 돼서 반푼이 은발미녀 마왕이랑 손 붙잡고 언데드의 왕을 때려잡는 꿈이었다.

깨어나 보니 꿈이 아니라는 게 더 악몽 같긴 했지만.

“저, 전생!”

나는 퍼뜩 어떤 사실을 깨닫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곧장 내 배낭을 뒤져 망자의 함을 꺼냈다.

“… 아.”

그러나 망자의 함은 조용하다.

빛을 뿜지도 않았고, 알림창이 뜨지도 않았다.

혹시나 해서 이자나미의 심장을 발동시켜봤지만. 역시나 불빛은 나오지 않는다.

‘이, 일단 안 죽은 거 같은데.’

나는 기억을 곰곰이 되짚어봤다.

내가 변경백과 대치한 끝에 엘더리치의 라이프 베슬을 부순 것까지는 분명히 기억이 난다. 그러니 죽어서 시간이 돌아온 건 아니리라.

그렇다면 직후에 정신을 잃었던 건 왜 그랬던 거지.

물의 에테르 덕분에 눈에 띄는 외상은 없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 깨어나셨군요!”

“오오. 용사. 드디어 깨어났군.”

가만히 생각에 잠겨있자, 곧 문이 열리며 두 사람이 반색하고 내게 다가왔다.

설백과 마왕이었다. 설백은 곧장 내 손을 감싸쥐더니 울먹이며 말했다.

“다행이에요 정용님. 정말… 정말이지! 전, 그대로 돌아가시는 줄 알고…! 흐으윽!”

설백은 그대로 내 손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얘 왜 또 오바하냐. 나는 그녀의 얼굴을 떼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달래주기 시작했다.

“죽긴 누가 죽어. 걱정도 팔자다. 나 죽고 싶어도 못 죽어.”

내뱉고 보니 좀 씁쓸한 나머지 혼자 쓴웃음을 머금었다.

하지만 내 대수롭잖은 반응에도 설백은 고개를 완강하게 저었다.

“하지만… 하지만! 정말 엄청난 탈진 증상이었는걸요! 정용님, 꼬박 사흘을 잠들었던 거 아세요?”

“뭐? 사흘?!”

나는 경악했다.

아니, 내가 쓰러진 뒤로 무려 사흘이나 지난 상태란 말인가?

내가 얼떨떨하게 마왕을 쳐다보자, 그녀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너 사흘 쳐잤다. 덕분에 심심해 죽는 줄 알았느니라.”

“그럴 수가….”

느낌상으론 반나절 정도 쌈박하게 낮잠 자고 일어난 것 같은데.

내가 머리를 긁적이며 어리둥절해 하자니. 설백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정용님의 신체에 치사량의 과부하가 걸린 상태였어요. 그 여파로 탈진하신 거구요. 대체 무슨 짓을 하셨던 거예요? 변경백님과 싸우셨다고 들었는데요.”

“아… 그거. 그거 때문이었군.”

나는 이마를 싸매고 고개를 끄덕였다.

에테르를 동시에 세 개나 빨아들여서 그랬나.

내가 봐도 위험하다 싶을 정도로 신체능력이 폭증하긴 했지만. 이렇게 심각한 후폭풍이 있을 줄이야.

앞으론 복용에 주의 좀 해야겠다.

“… 내 몸 상태는 둘째 치고.”

나는 상체를 일으키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극심한 현기증이 일었지만, 움직이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설백은 갑자기 움직이려는 나를 보더니 화들짝 놀라며 나를 만류했다.

“아, 아직 꺠어난 직후잖아요! 좀 쉬세요!”

“아냐. 괜찮아. 그것보다….”

지금 내 몸상태가 중요한 게 아니다.

내가 엘더리치를 죽이고. 그 뒤로 어떻게 됐나.

언데드는 모두 사라졌나? 저주는 끝났나? 그걸 알아야 한다.

워낙 리바이벌을 많이 해본 몸이다 보니 내 눈으로 보지 않고는 확신하질 못하겠다.

“정용님. 모두 잘 끝났어요. 그러니까 우선 안정을 취하시는 게….”

“알아. 하지만 내 눈으로 봐야겠어.”

“아으, 정말이지….”

나는 방문을 열고 곧장 복도를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바깥은 해가 쨍쨍한 한낮이었다. 눈발 섞인 한파 때문에 여전히 춥긴 했지만.

설백은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나를 뒤쫓았고, 마왕은 그냥 무심하게 나를 따라왔다.

‘복도가… 깨끗한데.’

알현실로 향하던 나는 그것을 느꼈다.

복도가 유난히 깨끗했다. 아무렇게나 넝마처럼 굴러다니던 융단은 새것으로 바뀌었고. 벽에 걸려있던 을씨년스런 그림도 치웠다.

복도 전체에 흉터처럼 묻어있던 피가 닦여있고. 먼지도 얼마 없었다.

“아.”

“어.”

그리고 나는, 마침 복도 청소를 하던 레이라와 딱 눈이 마주쳤다.

순간 정적이 흐르나 싶더니. 이내 레이라는 내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뭐야. 왜 이리로 오냐.

아무래도 호되게 당한 전적이 있다 보니 자동적으로 움츠러드는 내 앞에서.

레이라는 별안간 훌쩍 고개를 숙였다.

“음?”

그 때까지만 해도 얘가 갑자기 무슨 장난을 치나 싶었다.

이어지는 감사의 말들이 쏟아져 나오기 까지는 말이다.

“…… 고마워요. 후배님.”

“어, 뭐?”

“정말이더군요. 엘더리치를 죽였다는 거.”

“아.”

나는 멍하니 탄성을 흘렸고.

나를 바라보는 레이라의 얼굴에는 지금껏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편안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언데드들이 모두 사라졌어요. 저주가… 할센베르크의 저주가 끝이 났어요. 잠시뿐이지만… 이 성에 드디어 평화가 찾아왔어요.”

레이라가 고개를 들고 나를 쳐다봤다.

전에는 숨겨도 저절로 드러났던 증오나 경멸 대신, 존경이 담긴 시선이었다.

나는 180도 변한 레이라의 태도에서 드디어 실감할 수 있었다.

‘진짜 끝났구나.’

나는 진짜 엘더리치를 죽인 것이다.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고. 그런 내 앞에서 레이라는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도 모르게 벙찔 정도로 티없고 밝은 웃음이었다.

“처음엔 그윈이었고. 이제는 당신… 나는, 어쩌면 용사라는 족속들을 조금 오해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어요.”

레이라는 바닥을 쓸던 빗자루를 빙글 돌렸다. 레이라의 빗자루 끝이 나를 향했다.

저거 칼날 숨어 있는 그거 아니던가. 나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는데. 그녀가 말했다.

“당신들도 그냥 사람이군요. 저희와 같은, 그냥 똑같은 사람.”

“…….”

“이제 알 것 같아요. 주인님이 왜 당신들을 원망하지 않았는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레이라는 혼자 납득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멈췄던 복도 청소를 재개했다.

나는 레이라를 잠시 쳐다보다가 이내 툭 내뱉었다.

“그윈의 상태는 좀 어때.”

직후 괜히 내뱉었다고 후회했다.

레이라의 웃는 얼굴에 얕은 그림자가 졌기 때문이다.

“뭐, 똑같죠. 그윈은 언데드였던 게 아니라 그냥 미쳐버린 거니까요.”

“… 그렇군.”

뒷맛이 좀 씁쓸하군. 괜히 물었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이 성의 우환은 해결됐지만 레이라의 불행은 아직 현재진행형이라 이거군.

내가 입맛을 다시며 머리를 긁적이자니. 레이라는 이내 다시 밝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괜찮아요. 어떤 방도도 없다고 생각했던 이 성도… 이렇게 평화가 찾아왔으니까. 그윈도 언젠가 분명히, 다시 제정신을 차릴 거예요.”

그렇게 말하는 레이라의 얼굴에는 공허함 대신 뚜렷한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나는 그녀의 밝은 미소를 보니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하긴. 어차피 내가 해줄 것도 없고. 본인들이 극복해야 할 문제지.’

고개를 끄덕여 긍정해주자, 레이라는 슬쩍 고개를 끄덕이더니 알현실 복도 끝을 가리켰다.

“주인님이 후배님 눈뜨는 걸 애타게 기다리셨어요. 어서 알현실로 가보세요.”

“어… 그래.”

“그럼. 저는 청소를 마저 해야 해서.”

레이라는 내게 진심을 담아 꾸벅 고개를 숙인 뒤, 다시 청소를 재개했다.

창틀의 먼지를 닦아내는 그녀의 얼굴에는 전처럼 시커먼 그림자가 느껴지지 않았다.

“아. 그러고 보니.”

문득 달려가던 레이라가 멈춰선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한 번 더 꾸벅 숙인다.

이번엔 내가 아니라 설백 쪽이었다.

“용서를 바라진 않아요. 하지만 죄송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네요.”

“아….”

“복수를 하고 싶으시다면 지금 절 따라오세요. 고문실로 안내해드리죠.”

“고, 고문이요?!”

“죽이고 싶다면 말씀하세요. 사형장으로 데려가 드릴게요.”

“…….”

레이라가 다시금 복도 너머로 걸어갔다. 내뱉은 말은 쌀벌했지만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평온했다.

나는 시선을 흘깃 돌렸다. 설백 쪽을 쳐다보니 실로 복잡한 표정이었다.

나는 알현실로 걸어가다 말고 툭 내뱉었다.

“복수할 거냐? 좀 기다려줄 수도 있어.”

“…… 잘, 모르겠어요.”

설백은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러더니 흔들리는 눈으로 나를 가만히 쳐다본다.

“정용님 같으면 어쩌셨을 것 같아요?”

“나였으면 반쯤 죽여놓고 발가벗긴 채로 말 대신 타고 다녔지.”

“히엑….”

“공짜 탈것 개꿀.”

물론 내 사전엔 용서 같은 게 없다.

내가 레이라에게 전생에 당한 걸 복수하지 않는 이유는, 어디까지나 그게 모두 ‘없었던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뭐, 내 입장에선 억울해 미치지만….’

하지만 사실이 그런 걸 나보고 어쩌라고.

이번 생의 그녀는 정말로 내게 아무런 죄도 없다. 그래서 복수할 명분도 없는 것이다.

화풀이 식으로 복수를 감행했다간 변경백과의 관계가 틀어질 가능성이 너무 높다.

“내가 설 자리가 없구만. 그냥 네가 마왕 해라.”

내가 워낙 단호하게 말하자 루시도 질렸다는 듯이 비꼬았다.

나는 마왕의 볼을 잡아당기는 것으로 응수했다.

“아갸갸갹! 놔라! 이 무례한 용사 나부랭아!”

“진실의 방에서 사흘 동안 밀린 토크나 해볼까? 응?”

“아, 아히… 그, 그거마흔…!”

내가 마왕과 유치하게 티격태격하자니.

옆에서 설백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역시, 관둘래요.”

“… 괜찮겠어?”

“복수는 복수를 낳는 법이지요. 증오의 연쇄를 끊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저도 모처럼 이 세상에 용사로 소환됐으니까요. 용사다운 일을 해보고 싶어요.”

그렇게 말하는 설백의 얼굴은 평온함이 깃들어 있었다.

살아있는 지장보살이군. 소인배인 나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발상이다. 나는 멋쩍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어쨌든 나로서는 좋지. 여기에 체류할 시간이 더 줄어든다는 소리니까.

“그럼 가자. 변경백과 대화가 끝나면, 바로 이곳을 뜰 거야.”

“네. 드디어… 떠나는군요.”

“그럼. 이 지긋지긋한 성에서 슬슬 탈출할 때가 됐지.”

퀘스트 완료가 코앞이다.

나는 마지막 문안을 올리기 위해 변경백이 있을 알현실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금세 내 발걸음은 멈췄다.

“아.”

난리통에 잊고 있었던 일 하나가 떠올랐다. 탄성을 흘린 나는 조심스럽게 마왕에게 다가갔다.

루시는 빨개진 볼을 쓰다듬다가, 문득 내가 다가오자 퍼뜩 시선을 올렸다.

“… 뭐냐?”

굳이 대답해주진 않았다.

대신 그녀의 손목을 잡고, 천천히 할센베르크 성의 북문을 향해 걸어갔다.

“아니, 뭐냐고 용사! 어디 가는 건데!”

“잠깐 갈 데가 있어. 따라와봐.”

그렇게 우리는 할센베르크 성을 나와 북쪽으로.

하얗게 눈과 재가 뒤섞인 눈의 평원. 소멸한 언데드의 본거지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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