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갈수록 태산(太山)
“변경백님. 잠깐 부인 좀 빌려가도 되겠습니까.”
금발 태닝 양아치나 할법한 폭탄 발언.
하지만 내뱉는 나는 누구보다 진지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변경백의 온화했던 표정은 부인 얘기가 튀어나오자마자 급변했다.
싸늘하게 정색한 눈빛이 내게 쏟아진다. 그 압박감에 나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식은땀이 줄줄 흐른다.
나는 어떻게든 평정을 가장하고 계속 말했다.
“말 그대로요. 잠시 백작 부인의 시신에 용무가 있습니다.”
“무슨 짓을 하려는 겐가.”
“제 예상이 맞다면… 거기에 엘더리치의 라이프포스 베슬이 있을 겁니다.”
“…….”
변경백은 찌르는 듯한 압박감을 담아 나를 쳐다봤다.
지미럴. 오줌싸겠다. 진짜 방광에 힘풀리는 눈빛이다. 동물원 탈출한 맹수와 마주치면 이런 느낌일까 싶었다.
“후우.”
그러나 압박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변경백이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젓기 시작한 것이다.
“정용 공. 자네는 처음부터 참 수수께끼가 많은 친구였네.”
“… 그렇습니까.”
“그 의심많은 레이라를 속여 넘기고. 당돌하게 내게 찾아와 일을 시켜달라고 하지 않나. 이계에서 찾아온 용사라고는 해도 그 엄청난 성장속도 하며. 우리가 수많은 희생을 치르고도 어쩌지 못한 엘더리치를 죽이겠다고 단언하지 않나.”
이제와서 변경백이 하는 말을 듣고 보니. 내가 봐도 나란 새끼가 참 알쏭달쏭할 것 같긴 하다.
실없이 웃던 나는 어느 순간 흠칫, 어깨를 떨었다.
“그래.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네만… 자네는 여전히 알쏭달쏭한 인물이야.”
변경백이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에서 백작부인이 아, 아, 하고 공포에 질린 신음을 흘린다.
변경백에게서 느껴지는 숨막히는 살의를 감지한 것이다.
‘장난 아니네 진짜…!’
그리고 그 살의를 온몸으로 받고 있는 나 역시, 당장이라도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철그럭. 변경백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나는 자네가 엘더리치를 죽일 방법이 있다 했을 때 묻지 않고 따랐네. 어제 오늘의 어처구니없는 철군지시도 마찬가지일세. 왜 그랬다고 생각하나.”
“… 글쎄요. 변경백님 심원한 뜻을 저 같은 소인배가 어찌 알겠습니까.”
“이 저주받은 땅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짊어질 희망을 붙잡기 위해서였네. 나를 위해서. 그리고 억울하게 죽은 내 반려 이자벨을 위해서.”
“…….”
변경백은 의자 옆에 기대뒀던 검을 집어 들었다.
스르릉. 달빛을 받은 변경백의 장검이 싸늘한 백광을 뿜었다. 그는 그것을 그대로 내쪽으로 겨누었다.
“이번에도 내게 이유를 설명할 뜻이 없어 보이는군. 틀렸나?”
“아뇨. 제대로 보셨습니다.”
“그렇다면 비켜줄 수 없네. 확실치 않은 직감만 가지고 그녀를 해할 수는 없네.”
“변경백님. 해하긴요. 그건 그냥 썩어문드러진 언데드일 뿐입니다.”
내 말에 변경백이 눈을 부릅떴다.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가 확연한 압박감을 갖고 나를 짓눌렀다. 옆에 서있던 마왕조차 다리를 바들거릴 정도로 짜릿한 기운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랑곳않고, 비릿하게 웃으며 변경백을 도발했다.
“처음에 직접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썩어문드러진 언데드 주제에 미모는 무슨, 이라고요.”
“… 자네는 입을 조심하는 법을 좀 배워야겠군.”
“썩어빠진 시체 좀 헤집겠다는데 남자가 돼갖고 뭐 그리 쫑알쫑알 불만이십니까. 내일까지 말끔하게 풀로 붙여놓을 테니 잠깐만 빌려주시죠.”
직후, 변경백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는 본능적으로 검을 빼들고 힘껏 휘둘렀다.
“흡!”
차아앙! 섬뜩한 금속음이 지척에서 터졌다.
검을 잡았던 손이 찢어질 듯이 아려온다. 동시에 내 몸은 속절없이 튕겨나가 바닥을 굴렀다.
“크으윽!”
나는 곧장 낙법을 쳐서 벌떡 일어났다. 태세를 정돈하고 전방을 주시했다.
어느새 내가 서있던 곳에 나타난 변경백이 흉흉한 기세를 뿌리며 내게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그래. 그렇게 나와 줘야지!!’
나는 준비해뒀던 에테르병을 꺼내 모든 종류의 에테르를 하나씩 들이켰다.
몸이 오색으로 빛나며 감각이 확장된다. 감각이 확장되고 나니, 오히려 더 뼈저리게 느껴졌다.
엄청나다.
넘을 수 없는 벽. 아니… 태산.
변경백과 나의 차이는, 어떻게 재간과 재치로 비빌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면 자네와는 대련도 해줄 틈이 없었군. 그윈과는 많은 합을 나누었는데 말이야.”
“…….”
“이런 형태로 진심을 담아 첫대련을 하게 될줄은 몰랐네. 정용 공.”
안타까운 어조로 변경백이 말한다. 동시에 그의 신형은 또 한 번 홀연히 사라졌다.
그야말로 귀신같은 움직임. 나는 거의 본능 반, 감각 반에 의지해 되는대로 검을 휘둘렀다.
“크아악!”
하지만 압도적인 힘과 속도의 차이 때문인지 몸에 점점 생채기가 늘었다.
옆구리를 베인다.
허리를 베인다.
그리고 허벅지와 어깨를 동시에 베였다.
“이 X팔 거!”
전후좌우, 도처에서 변경백의 모습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그리고 눈치챘을 땐 이미 내 몸에 상처가 하나씩 늘어갔다.
그 동안 내가 변경백의 모습을 포착한 것은 단 세 번.
그나마도 제대로 막지 못해 자세가 무너졌고, 손목이 나가 끊어질 듯이 당겨왔다.
“세븐 소드 피어스!!”
나는 발악하듯 스킬을 외쳤다.
일곱 개의 검이 생성되어 변경백의 잔상을 헤집는다. 하지만 모두 빗나간다. 단 하나의 검도 닿을 수 없었다.
입술을 깨물고 있자니, 어느새 멀찍이 떨어져 모습을 드러낸 변경백이 검을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이런…!’
파지지직! 그의 검 주위로 엄청난 마력이 모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가 하려는 일을 깨닫고 아찔해졌다.
위험하다. 내가 배낀 짝퉁 스킬의 진짜가 날아온다!
“헌드레드 소드….”
“지뢰진!!”
나는 변경백의 영창이 끝나기 전에 재빨리 검을 바닥에 꽂았다.
쿠구구구! 굉음과 함께 알현실의 지축이 쩍쩍 갈라진다. 변경백은 균형을 잃었고, 주변으로 모여들던 마력이 흩어졌다.
일단 한 숨 돌렸다고 안도하는 찰나.
정신차렸을 땐 이미 변경백의 모습은 사라진 뒤였다.
“훌륭하군. 그래. 그런 식으로 자신이 가진 것을 상황에 따라 응용하는 걸세.”
목소리가 들린 것은 뒤였다.
뒤를 돌아보며 재빨리 검을 휘두르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변경백의 검이 바닥을 내리쳤다. 그 검에는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 위험천만한 마력이 도사리고 있었다.
“대폭진(大暴震).”
쿠과과과!
내가 썼던 지뢰진과는 차원이 다른 진동이 사방에서 쏟아졌다.
충격파가 주변을 휩쓸었다. 바닥에 널브러졌던 언데드들이 흔적도 없이 터져나간다.
“크하아악!”
콰앙! 충격파로 튕겨나간 나는 알현실 벽에 처박혔다.
갈비뼈가 부서지는 통증이 인다. 숨을 쉴 수가 없어 잠시 꺽꺽댔다.
“… 이렇게 되면…!”
나는 가까스로 에테르병을 입에 갖다댔다.
물의 에테르를 하나 들이마시는 한 편. 남아 있던 모든 불, 바람, 그리고 땅의 에테르를 한꺼번에 집어삼켰다.
6개의 에테르가 한꺼번에 온몸의 혈관을 타고 치달렸다.
“그으으으!!”
푸쉬이익!
내 몸에서 오색의 증기가 뿜어져 나온다. 감각이 확장되다 못해 터져나갈 것 같았다.
깨진 창으로 불어오는 한파. 변경백의 압도적인 마력과 압박감. 그리고 시야 구석에서 멍하니 사태를 관망하는 마왕까지,
모든 것이 일순간에 뇌리에 입력되었다.
“… 무슨 짓을 한 겐가 자네. 기백이 몰라보게 달라졌군.”
변경백이 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놀랍겠지. 풀도핑 상태의 나는 아마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를 것이다.
‘제한시간은 고작 5분. 속전속결이다!’
시간이 없다. 나는 가만히 서있는 변경백에게 일순간에 달려들었다.
“음!”
채애앵! 변경백은 가까스로 검을 들어올려 내 공격을 막았다.
여전히 변경백의 반응은 빠르다. 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해볼 만하다!!
“으아아아!”
나는 파죽지세로 변경백을 몰아붙였다.
변경백은 수비일변도로 변해 효율적으로 내 공격을 막아냈다. 밀리고 있긴 했지만, 절대 큰 틈을 보여주지 않았다.
‘아직 아니야. 아직은…!’
생채기가 늘어가는 건 분명 변경백 쪽이었다.
하지만, 담담한 변경백과 달리 조바심이 나는 건 내쪽이었다.
치명타를 넣어야 한다. 5분 안에! 나는 이를 악물고 미친 듯이 노도처럼 검을 휘둘렀다.
그러던 어느 순간.
“속도는 몰라보게 달라졌으나. 몰라보게 단조롭군. 지혜롭게 싸우는 자네답지 않네.”
“…… 어?”
채애앵!
수비일변도였던 변경백이 어느 순간 반격을 가한다.
당황해서 받아치려 했다. 그러나 뱀처럼 파고든 변경백이 한 수 앞서 손목을 후려친다.
나는 검을 놓치고 말았다.
‘이럴, 수가.’
오히려 틈을 내주는 건 내가 되었다.
무기를 놓친 내 등 뒤로, 싸늘한 눈빛을 빛내는 변경백이 검을 치켜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