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3417413번째 소울라이크 용사-50화 (26/280)

50화 싱겁고도 무거운 승리, 그리고…

등줄기를 긁는 소름 돋는 목소리.

언데드 특유의 목소리인데 말음이 또박또박해서 오히려 괴리감이 느껴진다.

“허어. 엘더리치 그 치도 눈치채는 게 늦구나. 명색이 자기 약점이거늘.”

옆에서 마왕이 중얼거린다. 난 그제야 목소리의 주인공을 깨달았다.

양반은 못 되는 새끼일세. 자기 욕하는 거 어떻게 알고, 본인이 등판한 모양이다.

―어째서… 대체 어째서 나의 보주가 갑자기…!

“어 그래. 네가 엘더리치냐? 부모님은 안녕하시고?”

내가 전화하듯 붉은 보석에 대고 말했다. 그러자 반대편에서 잠깐 목소리가 사라졌다.

내 멘트가 너무 혁신적이었나?

아니면 언데드라 패드립을 이해 못하는 걸지도 모른다.

―네놈! 네놈은 대체 무엇이냐! 존엄한 이의 기운이 느껴진다… 검은 태양이시여… 그곳에 계시나이까! 나의 태양이여! 부름에 응해주소서!!

잠시 후 붉은 보석이 들썩거릴 정도로 목소리가 발광하기 시작했다. 나도 마왕도 그 쩌렁쩌렁한 노성에 잠깐 귀를 막았다.

나는 인상을 잔뜩 구긴 채 마왕에게 보석을 까딱거렸다.

“이거 부순다. 불만 있냐?”

“없느니라. 빨리 부숴라. 시끄러워 죽겠네.”

“좋아.”

전에 나도 배신했다 그러더니, 손절각이 칼같다.

귀찮다는 행색으로 손사래 치는 마왕을 보며 나는 원인 모를 오한을 느꼈다.

어쨌든 주인(?) 허락도 맡았겠다. 그럼 이제 진짜 부수는 일만 남았군.

“에잇.”

나는 잡념을 물리고 베슬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그리고 가볍게 발로 밟았다.

콰직. 안 부서진다. 생각보다 튼튼하다.

―크아아앗! 네, 네 이놈… 이노오옴! 용서치 않으리라… 지금 당장 전병력을 이끌고 네놈의 뼈를 씹어먹을…!

“에이잇.”

좀 더 세게 밟았다.

콰지직. 여전히 안 부서진다.

―끄아아아악!! 이, 이것 뼛속까지 아프다!

보석과 목소리의 발광이 한층 심해졌다.

좋은 징조다. 나는 한층 박차를 가했다.

“에이이잇.”

이번엔 검을 꺼냈다. 힘껏 내리쳤다.

키이잉! 금속음이 길게 울렸다.

―크아아악! 그만! 그마아아안!! 안 된다 이놈아아아!!

하지만 여전히 안 부서졌다.

이쯤 되니 화가 난 나머지 냅다 스킬을 때려 박았다.

“이런 썅팔! 세븐 소드 피어스!”

최초 공격 판정이 들어가 ‘강맹한 기습’ 스킬이 터졌다.

쏜살같이 날아간 내 검격과 일곱 개의 마력검이 일제히 엘더리치의 베슬에 빨려 들어갔다.

―크아아아악!

콰자작!

귀를 찌르는 비명이 울리길 잠시. 드디어 베슬은 눈부신 적색광을 토해내더니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물리적인 건 안 먹히고 마력을 쏟아야 부서지는 구조였나 보군. 나는 어느새 산산조각이 난 방바닥을 보며 가만히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 바닥은 나중에 몰래 보수해놔야지. 레이라에게 쿠사리 먹기는 싫으니까.

그렇게 생각한 나는 곧장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자 그럼. 바로 출발하자.”

엘더리치가 전병력 끌고 온다던 말은 절대 빈말이 아닐 것이다.

만난 적도 없는 수수께끼의 괴한에게 베슬 하나를 뻑치기 당한 엘더리치.

놈의 입장에선 분노도 분노지만. 내 정체를 알고 싶어서라도 당장 나를 사로잡고 싶을 게 뻔하니까.

시간이 없다. 속전속결로 모든 일을 해결해야 한다.

아직, 마지막 엘더리치의 숨은 베슬 하나를 부술 때까지. 내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아니. 어떤 면에선… 오히려 이제 시작이라고 볼 수도 있겠군.

“후딱 나머지도 부수러 가자. 따라와 루시.”

“으응?”

나는 어리둥절한 루시를 데리고 방을 성큼성큼 나섰다.

* * *

나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고. 곧장 설백을 찾아갔다.

벌컥. 문을 열고 들어가자 설백이 이불을 들춰 내 얼굴을 쳐다본다.

한동안 아이컨택을 하던 그녀는 이내 홱, 고개를 젖혔다.

“… 뭔가요. 거기 여자분이랑 재미 계속 보시지 왜.”

“후우. 설백. 일단 좀 대화를 좀 해보자.”

“대화는 무슨… 흥.”

그녀는 아까부터 뭔가 단단히 화가 난 모양새였지만. 내가 진지하게 사과하자 이내 얼굴을 붉히며 화를 풀어줬다.

왜 화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착한 애라 다행이다.

“미안한데 설백. 혹시 단검이나 작은 칼 같은 거 있냐?”

“네? 칼이라면… 호, 호신용 단검이 있긴 한데….”

“그거 좀 잠깐 빌릴 수 있을까?”

“네에… 뭐….”

나는 화해한 설백에게 곧장 단검 하나를 빌렸다.

내심 용도가 궁금한 눈치였지만, 캐묻지 않고 흔쾌히 자신의 호신용 단검을 빌려줬다.

좋아. 이걸로 준비는 끝났다.

나는 설백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는 성큼성큼 알현실을 향해 걸어갔다.

“뭐냐 용사. 나머지 베슬이 어디 있는지 이미 아느냐?”

설백의 방에서 나오자마자 마왕이 쫄래쫄래 따라붙으며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엘더리치의 숙적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에 숨겼다면서.”

“그래. 본인의 말로는 분명히 그렇다 했느니라.”

“그러면 뻔하지 뭐.”

“뻔한 게냐?”

“뻔해.”

“어디냐?”

“백작 부인.”

“…… 아.”

마왕은 깨달음의 탄성을 흘렸다. 나는 고개를 가만히 주억거리며 생각을 정리해 나갔다.

“엘더리치의 숙적은 할센베르크 변경백. 그리고 변경백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건 백작 부인. 이자벨라 폰 할센베르크. 나머지 하나의 베슬은 그 여자의 시체 안에 있겠지.”

아마도 엘더리치가 베슬을 심은 건 선임 용사연합과의 거래에 응했을 때.

아군과의 전쟁도 불사하고 백작 부인을 되찾으려는 변경백의 모습에서 엘더리치는 직감한 것이다.

바로 여기다.

여기가 바로 가장 안전한 곳이다.

변경백이라는 최강의 적수가 사력을 다해 지키고, 절대로 해하지 않는 장소. 라이프포스 베슬을 숨기기에 최적의 장소.

자신의 약점을 상대의 약점에 숨기다니.

정말이지 기발하고. 그렇기에 악랄한 발상이 아닌가.

‘그리고. 내 예상이 맞다면….’

나 역시 변경백과의 전투를 피하기 어려울 가능성이 높다.

왜? 나는 지금 그 변경백이 소중히 여기는 백작 부인의 시신을 훼손하러 가는 거니까.

엘더리치를 죽이기 위한 최종보스가, 아이러니하게도 변경백이 될 수도 있다는 거다.

‘변경백의 입장에서 보면… 난 그냥 또라이야.'

그것도 완전히 맛이 간 개미친 상또라이지.

야밤에 찾아가서 ‘당신 마누라 시체에 엘더리치 베슬이 있습니다. 그거 좀 부술랑게 시체 좀 헤집을게요?’라고 말한다 치자.

당연히 변경백은 증거를 바라겠지. 적어도 그렇게 생각하는 타당한 근거를 요구하겠지.

그러면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 구라를 친다.’

이건 에러다.

전적으로 내 능력 문제인데, 마땅한 구라가 생각나지 않는다.

대체 어떤 구라를 쳐야 가만히 있던 변경백 마누라 시체를 헤집을 명분이 생기냐? 내 머리로는 도저히 생각나지 않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지능 좀 찍어두는 건데. 제길.

‘둘. 사실대로 말한다.’

이것도 에러다.

사실대로 말하려면 필연적으로 내 시공회귀와 마왕 루시에 대한 것을 밝혀야 한다. 변경백은 엘더리치를 죽일 수 있을지언정, 나는 변경백에게 죽겠지.

사양이다.

‘셋. 그냥 감이라고 얼버무린다.’

이건 재고의 가치도 없다.

무슨 도를 아십니까도 아니고 감은 X발 얼어 뒤질. 나 같으면 그런 개소리가 나오는 순간 뺨아리부터 후려갈겼다.

‘마지막 넷. 그냥 막무가내로 밀어붙인다.’

그러니 사실상 방법은 하나뿐이다.

변경백과 담판을 짓고 강제로 베슬을 부수는 것.

현재로서는 사실을 증명할 방법이 없지만. 베슬을 파괴하면 엘더리치 휘하의 모든 언데드가 소멸할 것이고, 안타깝지만 백작 부인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면 변경백은 내 말이 사실이었단 걸 믿을 수밖에 없다.

“대화가 안 된다면… 폭력을 써서라도.”

나는 주먹을 움켜쥐며 비장하게 중얼거렸고.

옆에서 가만히 걷고 있던 마왕이 불쑥 끼어들었다.

“보아하니 변경백이라는 작자와 소요를 예상하는 듯한데. 용사, 네놈은 그 자의 발톱 때도 못 벗기잖아.”

“…….”

“나도 지금까지 본 게 있느니라.”

“스탑 유징 팩트.”

새끼가 폼 잡는데 초치고 앉아있군.

나는 헛기침을 하고는 마왕을 지그시 쳐다봤다.

“…?”

마왕은 갑자기 그윽하게 바라보는 내 눈빛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했는지, 퍼뜩 내게서 떨어졌다.

“뭐, 뭐냐 그 눈빛은.”

“그래서, 그 시점에 네가 필요한 거지. 불사의 마왕님.”

“뭐어?”

나는 눈을 끔벅이는 마왕에게 작전을 설명해줬다. 그리고 설백에게서 빌려온 작은 단검을 마왕에게 힘껏 쥐어줬다.

그녀는 내 작전을 들을수록 표정을 해괴하게 뒤틀더니, 이내 아리송한 얼굴을 했다.

“그게 먹히겠느냐?”

“안 먹히면. 될 때까지 다시 도전해야지.”

내가 대수롭잖게 말하자 마왕은 질렸다는 듯 피식 웃었다.

“과연. 불사의 마왕 수호자다운 대답이로구나.”

“칭찬이냐.”

“아니니라.”

“진실의 방 가고 싶냐.”

“엑….”

우리는 만담 같은 대화를 주고 받으며, 폐허가 된 할센베르크성의 복도를 걸어갔다.

발소리의 끝이 닿은 곳은 시체가 가득한 알현실의 한복판이었다.

거기에는 언제나처럼 백작 부인의 손을 붙잡고 저주를 중화하는 변경백이 있었다.

“… 보게. 오늘따라 달이 밝군.”

변경백이 어스름한 달빛 속에서 나를 발견하고는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그리고 손을 슬쩍 흔들며 밤손님을 맞았다.

나는 착잡한 얼굴로 변경백의 인사를 받았다.

“무슨 일인가 정용 공. 옆에 처자는 누구고.”

“… 그냥 뭐, 어쩌다 얽힌 악연입니다.”

“하하. 그런가. 설백 처자도 그렇고. 자네는 은근히 여복이 많은 친구로군.”

“말이라도 감사하네요. 그보다….”

대충 얼버무린 나는 가만히 변경백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변경백님. 잠깐 부인 좀 빌려가도 되겠습니까.”

…… 오해하지 마라.

이거 ntr 선언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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