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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417413번째 소울라이크 용사-49화 (25/280)

49화

“… 웃.”

루시는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 어깨를 움찔했지만. 이내 당당하게 턱을 치켜들고 나를 마주봤다.

상황이 자기에게 훨씬 유리하게 돌아가니 그럴 만도 하다.

내가 피식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이 X발 철새 같은 년아. 그 새에 배신을 때리냐?”

“흥. 마왕이 용사를 죽이겠다는데 문제라도 있느냐. 나는 그저 실익을 쫓을 뿐이다.”

“뭐… 그렇군. 그렇게 말하니 할 말은 없네.”

나는 대충 내뱉고는 곧장 베스타크를 들어올렸다. 망설임은 전혀 없었다.

나를 바라보며 불길한 주문을 외던 마왕이 화들짝 놀라 엘더리치에게 명령했다.

“이런! 자살하려 한다! 용사를 막아! 어서!!”

“늦었어.”

나는 이미 내 목으로 칼을 쑤셔넣은 상태였다.

아찔한 고통이 노도처럼 밀려오길 잠시. 곧 시야가 아득해지며 의식이 빠른 속도로 멀어져 갔다.

‘… 얻을 건 다 얻었다. 부탁한다… 다음 생의 나.’

마지막으로 간절한 기원을 하며, 나는 눈을 감았다.

* * *

“아! 응애에요!”

마왕이 오랜 기다림 끝에 알을 깨고 나왔다.

동시에 체크포인트 갱신 알림이 시야를 가렸다. 나는 그걸 물리고 마왕을 눈에 담았다.

“이게… 마왕?”

나는 중얼거린 뒤, 박혁거세 마왕의 모습을 찬찬히 훑었다.

바닥까지 끌리는 하얀 머리칼에 와인처럼 일렁이는 붉은 눈. 하얀 나신 위로 달린 검은 날개와 전선 같은 꼬리, 그리고 이마에 달린 세 개의 뿔이 인상적인 여자다.

문득 나를 내려다보던 마왕과 시선이 딱 얽혔다.

“… 흐엑.”

그런 소리를 내며 마왕이 퍼뜩 몸을 움츠렸다.

눈매가 시무룩하게 쳐져 있었다. 빠져들 듯한 새빨간 눈동자가 요사스럽게 빛난다.

이윽고 그녀는 조심스럽게 내 앞으로 걸어오더니. 침대에 슬며시 걸터앉으며 교태를 떨듯이 내게 말했다.

“저, 음… 아까 그건 농담이었느니라 농담. 이 불사의 마왕 루스티카 아스모데우스께서 배신이라니! 서, 설마 그 정도 농담도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로 소인배는 아니지? 자네는 용사이지 않느냐? 요, 용서해 줄 거지? 응?”

… 태어나자마자 뭔 개소리를 하는 거냐 얘는.

갑자기 내게 달라붙어서 아양을 떨어대는 마왕의 행태에 나는 당황했다.

아니 그보다 일단 좀 떨어져라! 살이… 그, 부드러운 게 자꾸 옆에서 닿고 있단 말이다!

“…… 흐으응.”

게다가 철거머리처럼 달라붙은 마왕과 나를 쳐다보는 설백의 눈초리가 유난히 싸늘해진 느낌이다.

그녀는 내 도움을 바라는 시선을 외면한 채, 이불을 뒤집어쓰고 퉁명스레 말했다.

“무슨 상황인지는 몰라도 좋아 보이시네요. 재미들 보세요. 일단 방에서는 좀 나가주시고요.”

“아니. 너도 봤으니 알잖아!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 건지 나도 잘….”

“네네. 저도 알아요. 그러니까 나가서 일들 보시라니까요?”

설백은 내 시선을 완전히 외면한 채 눈길도 주지 않았다.

얘는 또 왜 이러냐. 나는 참담한 심정으로 마왕을 끌고 내 방으로 향했다.

“야 너. 일단 좀 얌전히 여기 앉아봐.”

“으응. 그러마. 나는 수호자의 의견을 존중하는 어진 마왕이니까!”

나는 일단 마왕을 떨어뜨려 놓고 침대에 앉혔다.

그리고 그 앞에 앉은 뒤 마왕을 똑바로 쳐다봤다.

얘도 이렇게 보니 한 미모 하는… 이게 아니지.

“야. 말해봐. 대체 아까부터 무슨 말을 지껄이고 있는 거야?”

“무슨 말이냐니. 아까 내 종복의 말에 홀라당 넘어가서 자네를 배신한….”

쭈삣거리며 내 눈치를 살피던 마왕의 움직임이 움찔 멎는다.

그녀는 내 어리둥절한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더니, 이내 말을 삼켰다. 그녀가 크게 뜬 눈으로 잠깐 탄성을 흘렸고.

이내 벌떡 일어나며 내쪽으로 상체를 들이밀었다.

… 엄청난 볼륨감이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나는 퍼뜩 시선을 돌렸다.

“아아아! 잊었구나! 용사! 너 부활할 때 기억도 잃는구나!! 그런 거였구나!”

“맞긴 한데… 아니, 잠깐.”

나는 마왕의 행동과 그녀가 했던 말들 속에서 어떤 가정을 하나 떠올렸다.

나는 설마 싶은 표정으로 마왕을 뚫어져라 쳐다봤고. 그녀는 말없이 나를 주시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나 설마… 한 번 죽었냐?”

“그러하니라.”

“넌 그걸… 기억하고 있고?”

“그러하니라.”

마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충격에 잠시 숨을 멈췄다.

이런 제길. 이 전개도 익숙해졌다 생각했는데, 이런 식으로 알게 되는 건 처음이라 좀 신선하군. 한참을 심호흡한 뒤에야 나는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그러자 문득, 그녀가 처음 태어났을 때 내게 했던 말들이 마음에 걸리기 시작했다.

순간 날카로워진 눈빛이 마왕에게 쏟아졌다.

“네가 배신을 했다느니 어쩌느니 하는 건, 무슨 말이냐?”

“앗…. 그, 그게…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니… 에요.”

지금껏 보여줬던 마왕 특유의 건방지고 도도한 말투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거기엔 죄를 지은 꼬맹이마냥 위축된 하얀 머리의 여자가 있을뿐이다. 심지어 존대말까지 튀어나왔다.

뭔가 있군.

나는 활짝 웃으며 곧장 방문을 걸어 잠갔다.

철커덕. 그 소리에 화들짝 놀란 마왕이 퍼뜩 목소리를 높였다.

“어, 어어?! 왜, 왜 잠그느냐?! 무, 무슨 짓을 하려고?!”

“별 건 아니야. 진실의 방을 만들려고.”

“히에에엑!”

내가 아직 뭘 하지도 않았는데 마왕은 ‘진실의 방’이라는 말에 경기를 일으켰다.

뭐지. 전생의 내가 뭔짓이라도 했나 보군. 마왕의 싸가지없는 태도를 보고 잔소리라도 한 게 아닐까.

그렇다면 아마 마왕 본인도 알겠지. 지금부터 무슨 일이 벌어질지.

나는 입가의 미소를 짙게 만들며 사시나무처럼 오들오들 떠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우리 진솔한 대화의 시간을 좀 가져볼까?”

* * *

“… 흠. 그렇다 이거지.”

“으, 우우. 그렇다 했지 않느냐. 맹세코 거짓은 전혀 없느니라!”

셔츠 한 장 걸친 마왕은 방 한 가운데서 무릎 꿇고 손 들고 있고.

나는 침대에 앉아 그런 마왕을 내려보는 진풍경이 펼쳐져 있다.

“어허. 손 내려간다. 똑바로 올려.”

“…….”

“대답.”

“… 죄, 죄송합니다아….”

마왕은 굴욕 때문인지 힘들어서인지 온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붉게 물든 얼굴을 떨구고 안절부절한다.

나는 그쯤에서 이 괘씸한 마왕을 용서해주기로 했다.

“좋아. 손 내려.”

“푸하아!”

마왕은 그 말만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번쩍 내렸다. 그리고 한동안 어깨를 주무르며 눈물을 찔끔 삼켰다.

나는 그런 마왕의 옆으로 다가가 어깨를 주물러주며 물었다.

“정말이야? 네 이름에 걸고 전부 사실이지?”

“정말! 진짜 참으로 진실로 정말! 있는 그대로 사실을 불었다! 제발 나 좀 그만 못살게 굴어라! 내가 잘못했다니까!”

나는 전생의 일들을 마왕 루시를 통해 전해 들은 상태였다.

내가 성공적으로 적진을 뚫고 들어가 엘더리치와 접촉했다는 것.

두 개 있다는 엘더리치의 베슬 중 하나를 입수하는 데까지 성공했다는 것.

직후 엘더리치의 회유로 마왕이 배신했다는 것.

마왕이 계약을 해지하기 직전에 내가 자살해버렸다는 것.

그렇게 지금 이 시간으로 회귀했다는 것까지.

'이런 X발.'

기억도 없는데 곱씹으니 괜히 괘씸하네.

나는 옆에서 툴툴거리는 마왕의 머리를 빠악, 시원하게 후려갈겼다. 마왕은 화들짝 놀라서 머리를 쥐어싸매고 나를 노려봤다.

“아야! 왜 때리느냐!”

“괘씸해서. 불만 있냐?”

“불만은…! 없지만… 요.”

저지른 일이 있다 보니 마왕은 금세 수그러들었다.

처음 알 깨고 등장했을 때 그 도도한 이미지가 거짓말 같군. 전생에서도 이런 느낌이었나?

“어쨌든 이게, 엘더리치의 베슬 중 하나라 이거지….”

나는 새삼스런 눈으로 손에 든 새빨간 보석을 어루만졌다.

마왕의 기행 때문에 눈치채는 게 늦었는데, 갱신된 망자의 함에 들어있던 놈이다. 전생의 나는 그 급박한 상황에서도 만약을 대비해, 베슬을 다음 생에 넘겨주는 것까지 생각한 것이다.

역시 나야. 대단해. 짜릿해.

멍하니 베슬을 쳐다보는데, 문득 옆에서 머리를 매만지던 마왕이 툭 내뱉었다.

“그나저나 놀랍구나. 내 불사의 계약을 간섭하는 물건을 천계에서 만들어낼 줄이야.”

“… 망자의 함 말이냐?”

“그래. 보나마나 망할 사신 세 자매의 작품이겠지. 아니꼽기 짝이 없구나.”

처음에 마왕은 망자의 함에 든 엘더리치의 베슬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형이 거기서 왜 나와?’라고 얼굴로 묻는 느낌이었다. 그렇겠지. 시간이 돌아왔는데 베슬은 여전히 내 손에 있으니. 자신의 계약이 어그러졌다는 소리니까.

내가 그런 생각을 하며 루비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자니.

삐빅. 언제나 그렇듯 아이템의 상세설명이 튀어나왔다.

[명칭: 엘더리치의 베슬 (전설)]

[보정치: ???]

[상세: 고대마족, 언데드의 왕 엘더리치가 생의 정수를 봉인해놓은 최고급 룬. 엘더 리치의 강력한 보호마법으로 인해 어떤 방법을 사용해도 복사나 강화는 불가능하다.]

[강화 가능 회수: 0]

“복사는 불가능하다….”

거 다행이구만. 나는 히죽, 웃으며 베슬을 힘껏 쥐었다.

기본적으로 망자의 함에 담겨 있던 전생의 물건은, 이번 생의 물건과 아무 관련이 없는 새 물건처럼 '창조'된다.

그래서 내 앞섶을 찢어 혈서를 만들어도 다음 생의 내 옷은 변화가 없는 것이다.

‘자승자박이 딱 이 꼴이군. 안 그러냐 엘더리치?’

엘더리치가 딴에는 안전을 위해 걸어놨을 보호마법. 그것이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어떤 방법을 사용해도 복사는 불가능.

즉, 이 세상에 이 새빨간 룬은 무슨 수를 써도 단 하나 밖에 존재할 수 없다는 소리.

‘하지만 네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신이나 마왕보다 끗발이 높겠냐?’

사신의 계약품이라는 망자의 함.

그 효과는 불사의 마왕조차 막을 수 없다. 가히 절대적이다.

그러므로 내가 망자의 함에 넣은 엘더리치의 베슬은 이번 생으로 반드시 이어지고.

오히려 이번 생에 있어야할, 엘더리치가 원래 가진 베슬은 복사방지의 효과로 인해, 아마 지금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네놈은… 대체 무엇이냐…!

그리고 그 순간. 문득 루비 안에서 그런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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