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배신
―그, 오, 오오오….
골렘은 그 썩은내 나는 육신을 내게 한껏 밀어붙인 채 그대로 멈춰있었다.
그 엄청난 비주얼에 순간 몸을 움츠린 나와 루시였지만. 이내 둘 다 평정을 되찾고 서로를 쳐다봤다.
“… 멈췄구나.”
“멈췄네.”
“왜 멈췄지?”
“네가 뭔가 한 거 아니었냐?”
“그러는 용사 네놈이야말로?”
우리는 서로 어리둥절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다시금 플레시 골렘을 쳐다봤다.
골렘은 어느새 우리에게서 한 발자국 떨어져서, 마치 경외하듯이 우리를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정확히는 내가 아니라 루시에게 말이다.
나는 가만히 그 광경을 넋놓고 쳐다보다, 이내 루시에게 물었다.
“쟤는 네 시다바리가 아니라며.”
“그, 그래. 아니다. 그렇다는 건….”
루시는 무언가 깨달았는지 리치 무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 역시 뒤늦게 그녀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 그렇군.
저 시체 골렘을 조종하는 술자가, 루시를 눈치채고 골렘을 멈췄다는 소리가 되는군.
―오오… 군주시여. 영원토록 타오르는 나의 검은 태양이여! 미천한 엘더리치가 불사의 마왕님을 뵙습니다.
예상대로 거기에는, 어느새 우리의 지척까지 다가온 엘더리치가 있었다.
루시를 향해 고개를 조아리는 엘더리치. 주변의 리치들도 그들의 수장을 따라 퍼뜩 경배를 올린다.
사회생활 잘하는군. 나보다 낫다.
“용사여. 용사여. 드디어 때가 왔느니라.”
“응? 아, 어어.”
문득 루시가 내 옷깃을 잡아당긴다. 내려달라는 신호였다.
나는 순순히 마왕을 내려줬고, 그녀는 고고한 걸음걸이로 그들을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오오. 저 존안. 이 기운! 재림하신 군주님이 틀림없다!
매서운 설풍에 하얀 머리를 휘날리며 언데드들의 경외를 받는 마왕.
지금까지 보여줬던 팔푼이 같은 모습은 어디로 팔아먹었는지, 그 자태가 의외로 놀랍도록 잘 어울렸다.
엘더리치도 그렇게 느꼈는지, 감격스러운 목소리로 연신 탄성을 흘려댔다.
물론, 지금부터 불사의 마왕 루스티카가 벌일 일을 생각하면. 놈들의 기대를 완전히 배반하는 꼴이 되겠지만 말이야.
“과인의 충직한 종 엘더리치여. 네게 명하노라.”
마왕은 특유의 새빨간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그 고압적이고 도도한 눈빛이 유난히 밝게 빛나는 듯했다.
엘더리치는 땅바닥을 뚫을 기세로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오오… 무슨 일이듣 받잡겠나이다. 하명하소서.
“네 라이프포스 베슬 어디 있느냐.”
―… 잘 못들었습니다?
마왕이 서슴없이 내뱉은 말에, 엘더리치는 퍼뜩 해골을 쳐들고 물었다.
어찌나 당황했는지 한국 군대에서나 나올 법한 반응까지 튀어나왔다.
그러나 루시의 말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반복되었다.
“네 라이프포스 베슬 위치를 말하라. 직접 과인 앞에 가져오면 더 좋고.”
―… 그… 화, 황공하오나… 어, 어떤 용도로 사용하실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부술 것이다.”
―…… 그, 그럴 수가….
엘더리치는 안광을 번득였다. 연신 깜빡거리며 아래턱을 딱딱 부딛친다.
방황하는 안광에서 혼란과 슬픔이 느껴졌다. 언데드 생리를 잘 모르는 내가 봐도 느껴질 정도이니 꽤 충격을 많이 받은 듯했다.
그렇겠지. 갑자기 믿어 의심치 않던 주인한테 ‘너 죽일 테니까 약점 좀 네 손으로 가져와라’라고 들은 꼴이니.
‘쳐돌았습니까 마왕님?’ 소리가 안 나온 게 저 엘더리치의 충성심을 증명한다.
루시도 그런 엘더리치의 모습에 동정심이 생겼는지, 머리를 긁적이며 덧붙였다.
“충절에 대한 보답을 해주지 못해 미안하구나. 단언컨대 자네는 과인의 가장 충직하며 믿음직한 부하였다. 과인이 긴 잠을 자는 동안, 많은 노력을 해주어 고맙다. 심심한 감사를 전하는 바이다.”
―오오… 아니옵니다. 당치도 않사옵니다… 그저, 제가 해야할 일을 했을 뿐… 마왕이시여… 위대한 나의 태양이시여….
루시가 몇 마디 입에 발린 소리를 해주자 단박에 감격에 젖어버린 엘더리치.
야부리로 부하들 구워삶는 솜씨가 제법이군. 마왕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닌가 보다.
―검은 태양의 위대한 발자취와 함께하는 것도 여기까지… 영광이었습니다.
엘더리치는 곧 체념하듯 턱을 한 번 부딪치더니, 이내 허공에 스태프를 휘저었다. 녹색의 마법진이 떠오르며 곧 허공에서 새빨간 보석 하나가 튀어나왔다.
엘더리치는 조심스러운 기색으로 그것을 마왕의 손에 넘겼다.
―받으소서 마왕이시여. 제 베슬 중 하나이옵니다.
“… 그래. 고맙다. 그럼….”
루시는 받아온 붉은 보석을 그대로 내게 넘겼다. 내가 그걸 받아들인 찰나, 루시가 문득 행동을 덜컥 멈췄다.
그리고 다시금 엘더리치를 돌아보며 물었다.
“베슬 중 하나? 그렇군. 그러고 보니. 자네는 라이프포스 베슬이 두 개였던가?”
―그렇사옵니다. 만일을 대비하여 다른 하나는 적이 절대로 손대지 못할 곳에 숨겼사옵니다.
“호오. 그게 어디인가?”
―저의 숙적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 그것에 숨겼사옵니다.
나는 엘더리치의 대답을 듣고 눈을 크게 떴다.
변경백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
그것에 자기 라이프 베슬을 숨겼다고?
‘그렇다면 나머지 하나는….’
내가 상념에 잠긴 사이, 엘더리치는 흉흉한 안광을 한 차례 뿜었다.
놈의 안광은 내쪽을 향해 있었다. 엘더리치는 바싹 굳어있는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외람된 말씀이오나… 저 살덩이의 정체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아. 저 자는 나의 시종… 이 아니라. 수호자. 그래. 나와 계약으로 종속된 수호자이니라.”
엘더리치의 시선이 조금 내려갔다.
―수호자… 용사인데도 말입니까. 과연 군주님의 축복이 느껴지긴 합니다.
“뭐, 그래… 좀 복잡한 사정이 들어있느니라. 신경쓰지 말거라.”
―알겠사옵니다.
놈의 시선은 시종일관 내 손에 들린 자기 베슬에 박혀 있었다. 내가 그것을 숨기듯 뒤로 감추자, 엘더리치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저의 베슬을 파괴하고자 하는 것은 마왕님의 의지입니까, 아니면 수호자의 의지입니까.
“굳이 말하자면… 수호자 쪽이지?”
루시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엘더리치의 안광이 순간 번쩍, 빛을 뿜었다.
이거 좋지 않아.
뭔가 안 좋은 방향으로 얘기가 흘러가는 것 같다. 그런 불길한 예감이 자꾸만 감각을 욱신욱신 찔러온다.
―마왕이시여. 당신께서 어떤 말씀을 듣고 저를 소멸시키겠다는 결정을 하셨는지는 묻지 않겠사옵니다. 허나….
아니나 다를까. 엘더리치가 마왕 쪽으로 점점 다가간다.
그리고 특유의 낮게 깔린 목소리로 그녀를 회유하기 시작했다.
―저자는 용사입니다. 그 증오스러운 천계의 개들에게 부려먹히는 하잘것없고 버러지 같은 존재. 언젠가 반드시 마왕님의 목에 칼을 들이댈 것입니다.
“아니. 그건 아니다. 본인의 입으로 확약을 받았다. 그는 이제부터 과인의 대업에 있어 가장 충직한 심복으로….”
―마왕이시여. 아직도 살덩이들의 간사한 혀를 믿으십니까.
“…….”
마왕이 그 말에 입을 다문다.
엘더리치를 쳐다보는 붉은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다.
안 돼. 이제와서 왜 흔들리는 거야. 내가 그리 못 미덥냐?
불신사회 타파하고 정의사회 이룩하자고 불사의 마왕아!
“야 안 되겠다. 저 새끼 말 듣지 마. 일단 베슬 하나 확보했으니 오늘은 철수하고….”
“잠깐. 기다려 보거라.”
나는 황급히 대화를 중지시키려 했으나. 마왕은 유난히 싸늘한 표정으로 거절했다. 그 눈빛에서 나는 어떤 불길한 직감을 받았다.
왠지 이 대화의 결말이 벌써부터 좀 짐작이 되고 있었다.
'이건 위험해!'
더는 망설일 틈이 없다. 나는 우선, 놈들 몰래 배낭을 뒤져서 망자의 함을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들고 있던 새빨간 보석에 갖다대 봤다.
‘… 좋아. 됐다!’
다행히 엘더리치의 베슬은 망자의 함보다 작았다.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흘리며, 그것을 조심스럽게 망자의 함 안에 집어넣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엘더리치와 마왕의 대화는 계속되었다.
“계속해 보거라.”
―예. 혹여 마왕님께서 수호자의 계약 때문에 억지로 그의 말을 듣고 계신 것이라면. 굳이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 그럴 필요가 없다라?”
―당신의 권능으로 계약을 해지하십시오. 그리고 저를 새로운 수호자로 발탁하시면 됩니다. 비록 지금 마왕님에게서 느껴지는 마력으로는 수호계약에 소비되는 심대한 마력을 감당할 수 없으나…. 마왕이시여. 당신께서 원하시기만 한다면… 제가 마력을 쏟아드리겠사옵니다. 계약을 해지하소서.
“… 호오.”
마왕이 문득 나를 돌아본다. 엘더리치와 함께 싸늘한 붉은 안광이 내게 향한다.
유난히 등골이 섬짓해지는 그 눈빛에, 나는 결심을 굳혔다.
그리고 결심한 건 마왕 쪽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과연. 그런 방법이 있었구나.”
그녀는 곧장 엘더리치의 곁으로 가서 나란히 섰다. 그리고 엘더리치에게 턱짓했다.
엘더리치는 턱을 한 번 따닥, 부딛친 뒤 곧장 내게 광선을 날렸다.
일말의 망성임도 없었다. 마치 그 명령만을 기다렸다는 듯한 행동.
“이런 제길!”
피피핑! 광선이 세 발.
공격을 예상했던 나였지만 쳐내는 건 두 발이 고작이었다. 한 발은 왼팔을 관통해 지지는 듯한 통증을 남겼다.
“크으으!”
―가증스러운 용사여. 네놈의 세치 혀가 끝내 마왕님을 향한 내 충절을 갈라놓지 못하였구나.
엘더리치가 천천히 다가오며 주문을 영창했다. 무수한 광탄이 엘더리치 주변으로 둥둥 떠올랐다. 족히 백 개는 되어 보인다.
끝났군. 나는 허탈한 얼굴로 마왕 쪽을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