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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417413번째 소울라이크 용사-47화 (23/280)

47화

* * *

“새끼, 결국 나올 거였으면서 튕기긴 겁나게 튕겼네.”

“시끄러워요. 아가리 다무세요.”

“예이.”

어제처럼 평원 구석의 언덕에 숨어있는 우리들. 놀랍게도 멤버 중엔 레이라도 끼어 있었다.

내가 꿍얼대자 대차게 반박이 꽂히는 걸 보니, 내가 아는 그 레이라가 맞다.

이것도 일종의 츤데레로 받아들여야 되나. 복잡하다.

나는 머리를 긁적인 뒤, 옆에서 언데드 진영을 쳐다보던 변경백에게 물었다.

“상황은 좀 어떻습니까.”

“어제와 다를 건 거의 없군. 다만 이상하게 들뜬 분위기라고 해야 할지… 나조차도 처음 보는 분주한 기색이 느껴지네. 좀 주의해야겠어.”

“아하… 그렇군요.”

나는 무심결에 옆에서 멍하니 앉아있는 루시를 쳐다봤다.

아마 그 들뜨고 분주한 기색은 엘더리치가 루시의 부활을 감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루시의 수하인 엘더리치 군단이 루시와 상호작용을 하는 건 이미 기정사실이니 이상할 건 없다.

“좋아.”

어쨌든 이걸로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다.

나는 베스타크를 힘차게 뽑아들었다.

“그럼, 가자!”

호기롭게 출진 명령을 내리자, 대기하던 인원들이 곧장 전투태세에 들어가며 분주하게 움직였다.

제3차 엘더리치 공략전이 서막을 올렸다.

* * *

“헌드레드 소드 피어스! 아발란치! 게이트 오브 라그나크!”

유성처럼 마력의 검날이 쏟아지고, 우박과 함께 불벼락이 떨어진다.

변경백이 영창하는 갖은 마법의 폭풍우가 언데드들을 쓸어버리고 나면, 거기엔 거대한 짐승이 할퀸 것만 같은 막대한 상흔만이 남는다.

그렇게 꿰뚫린 진형의 한복판을 돌파하는 세 사람의 인영이 있었으니.

나와 변경백. 그리고 불사의 마왕 루시였다.

“으랴아아!”

“우오오오!”

우리는 미친 듯이 괴성을 지르며 적의 종심부까지 치고 들어갔다.

말이 있었으면 더 빨랐겠지만… 아쉽게도 이 성에 웬만한 생명체는 모두 씨가 말랐기에, 우리는 발바닥 불나도록 뜀박질해서 적진을 깨부수고 들어갔다.

“으악! 스, 승차감이 너무 구리다! 좀 살살 달려라 용사!”

루시는 참고로 내 등에 업혀있는 상태였다.

갓 부활해서 힘이 거의 없는 상태인 루시는 나와 변경백의 속도를 따라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주제에 자꾸 뒤에서 감놔라 배놔라 시비를 거는데, 떨어뜨려놓고 가고 싶을 정도였다.

솔직히 불사의 마왕만 아니었으면 진작에 손절했다.

“좀 더 속도를 올리지. 이대로 중앙까지 파고들 걸세! 따라오게 정용 공!”

“옛!”

우리의 기세는 그야말로 파죽지세.

심지어는 우리를 상대하는 유령기사와 데스비숍들 마저 “우리의 군세가 어찌 이리 쉽게….” 같은 소리를 내뱉을 정도였다.

우리의 돌파 속도가 말도 안 되게 빠른 이유는 간단하다.

‘불사의 마왕님 덕분이지!’

리치들이 루시를 알아보고 공격 명령을 주저하니, 그 하위 언데드들도 얼타면서 주춤거리고 있는 것이다.

“변경백님! 이제 곧 중심부입니다! 마력 아끼지 말고 전부 때려 박으세요!!”

“알겠네!!”

변경백은 진로를 가로막은 데스비숍 무리들을 향해 지팡이를 치켜들었다.

파지직, 바직!

그의 지팡이 끝으로 섬뜩한 예광을 뿜는 스파크가 부서지더니. 이내 거대한 번개로 세를 미친 듯이 불려나갔다.

변경백이 어느 순간, 지팡이를 휘두르며 영창한다.

“로터스 렐람파고!”

역시. 내가 이렇게 주문하면 저 마법을 쓸 줄 알았다.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몸을 바짝 숙였다.

쿠과과과!

지축이 요동치는 굉음과 함께 시야가 번쩍번쩍 명멸했다.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폭음이 멈추고 소강상태가 되자 가까스로 눈을 떴다. 거기엔 만신창이가 되어 로브를 꿈틀거리는 데스비숍의 잔당들이 있었다.

눈동자의 안광이 위태롭게 깜빡거리고 있다.

―그어어… 몸이….

실로 어마어마한 파괴력. 나는 무심코 숨을 삼켰다.

“크허억. 여, 역시… 고대 마법을 감당하는 건 상당히 힘에 부치는군.”

그러나 그 엄청난 마법을 쏜 여파인지, 변경백도 자리에 주저앉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내게 손짓하며 말했다.

“먼저 가게. 여긴 내가 맡지. 뒤는 자네에게 부탁하겠네!”

그거 사망플래그 아니냐?

아무래도 전례가 기억에 있다 보니 그런 생각이 훅 치고 들어왔지만. 황급히 물리고 고개를 세차게 끄덕여줬다.

“예. 변경백님도 그만 돌아가십쇼! 뒤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무슨 소리. 기운만 돌아오면… 내 금방 자네를 뒤따라가겠네.”

변경백은 희미하게 웃으며 강직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그 말에 헛웃음을 삼켰다. 거기에 짙게 담긴 체념에서 변경백의 각오를 느꼈기 때문이다.

진지한 와중에 미안하지만 변경백. 여긴 당신 묫자리가 될 일은 절대 없을 거야.

'내 묫자리라면 이미 두 번쯤 된 모양이지만.'

나는 변경백을 등지고 눈 덮인 평원을 질주했다.

“가자 루시. 이제 곧이니 준비해둬!”

“흥. 걱정도 팔자로구나. 빨리 데려가기나 하거라.”

변경백의 기세를 보니 정말 기운을 차리고 나면 따라올 심산인 모양인데, 사실 그러면 안 된다.

루시와 엘더리치가 쇼부치는 광경을 들켰다간 나까지 도매금으로 엮일 게 분명하니까.

변경백이 기운을 차리기 전에 엘더리치와 만나야 한다.

만나서 한 시라도 빨리 엘더리치의 베슬 위치를 알아내고. 가능하다면 회수까지 한다!

“…… 찾았다!”

나는 멀찍이서 다가오는 시커먼 로브 무리들을 포착했다.

그 중앙에 눈에 띄게 시커먼 오라를 흩뿌리는 놈이 있다. 미미르의 눈을 발동시켜 보니, 예상대로 그 놈이 엘더리치였다.

'이런…!'

내가 단숨에 달려가려 했으나, 그보다 주변의 리치들이 한 템포 빨랐다.

―일어나라… 나의 종복들이여…!

놈들이 지팡이를 휘두르며 소름끼치는 주문을 외자 주변에서 죽어있던 언데드들의 살점이 한 데로 뭉쳐 집채만한 골렘이 되었다.

그 끔찍한 광경에 나도 모르게 탄성을 흘렸다.

“이런 X발… 저, 저건 뭐야.”

경기를 일으키면서도, 나는 본능적으로 놈들의 정보를 띄웠다.

[몬스터 정보]

[명칭: 플레시 골렘]

[체력: 1500/1500 마력: 0/0]

[힘: 246 민첩: 41 지능: 3]

[상세: 죽은 자의 살점을 이어붙여 만든 골렘. 중앙의 코어를 부수지 않는 한 주위의 시체를 집어삼켜 계속해서 체력을 회복한다.]

“미친… 체력돼지에 힘 몰빵이네!”

나는 시험삼아 정신을 집중한 뒤, 베스타크를 어깨 뒤로 힘껏 당겼다.

치지지징. 내 의지에 따라 주변으로 일곱 개의 마력 검날이 생성되어 새파랗게 빛을 뿜기 시작했다.

“세븐 소드 피어스!”

피피피핑!

마력검은 새파란 잔상을 남기며 플레시 골렘에게 날아갔다.

스파크와 함께 검날이 일제히 골렘의 살을 파고들었다. 골렘은 끔찍한 파육음을 내며 살점을 바닥에 흩뿌렸다.

일단 7발 모두 정타로 들어갔다. 나는 재빨리 미미르의 눈을 발동시켰다.

[체력: 1418/1500 마력: 0/0]

“아니 X벌! 아픈 시늉도 안 하네 쌔끼가!!”

웬걸. 나름 내 필살기인데 기스도 안 났다.

설상가상으로 골렘은 주위의 시체들을 꿀렁꿀렁 흡수하기 시작하더니.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입은 상처를 시체들로 덧씌웠다.

체력은 당연히 원상복구 되었다.

‘저건… 내 수준에서 상대하긴 글렀군.’

나는 곧장 판단을 내렸다.

죽이려면 한 번에 코어까지 꿰뚫거나 재생할 시간도 없이 도륙을 내야 하는데. 내 스킬은 대부분 대인용 기습 스킬이라 파괴적인 게 없다.

코리안 시크릿 웨펀 기질이 여기서 발목을 잡는군.

“그럼… 저놈들을 돌파하려면…!”

타개책을 강구하는 와중. 문득 업혀있던 루시가 내 옷깃을 꾹꾹 잡아당겼다.

“엄… 용사.”

“왜 인마. 지금 바빠!”

“저 골렘 점점 다가오는데? 뭔가 뾰족한 수가 없느냐?”

“지금 생각중이야! 조용히 해봐!”

“아니, 생각이고 나발이고 지금 바로 위에…!”

―그오오오오!!

우리는 동시에 입을 닫고 퍼뜩 위를 쳐다봤다.

루시의 말대로 골렘은 어느새 우리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시체의 살점으로 이루어진 입술이 쩌억 벌어지고, 그 안에 뼛조각으로 이루어진 이빨이 나를 향해 다가온다.

‘이런 미친. 어느새 이렇게 가까이에?!’

순간 머리가 하얗게 되어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도망친다는 선택지마저 날아갔다.

그런 와중에 루시는 내 목을 힘껏 조르며 미친 듯이 발악을 하기 시작했다.

“으아악! 부활한지 하루 만에 비명횡사라니잇! 이럴 순 없다! 대, 대신 죽어라 용사!!”

“켁, 야! 수, 숨 막혀!”

“어떻게 좀 해보거라! 뭐 숨겨 놓은 필살기 같은 거 없느냐! 명색이 용사잖냐!!”

“너야말로 쟤네 다 쫄따구잖아! 어떻게 좀 해봐!”

“내 쫄따구는 말 통하는 놈들이지 저런 저능한 놈들이 아니다!”

“좋겠다 이 무능한 새꺄!”

우리는 그 새를 못참고 옥신각신했고.

플레시 골렘은 용서없이 우리를 향해 아가리를 떨구었다. 순식간에 다가오는 그림자 안에서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 짧았다 내 23번째 인생!

결국 전생의 잔류사념은 회수 못하고 죽는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망자의 함 아이템이나 바꿔놓을걸.

다음 생의 내가 잘 눈치를 채줘야 할 텐데….

“… 얼라.”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나는 문득 눈을 떴다.

골렘이 이미 나를 삼켰을 시간이 지났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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