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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417413번째 소울라이크 용사-46화 (22/280)

46화

“훗. 흐하하.”

그러나 곧 레이라의 얼굴은 조롱으로, 변경백은 허탈함으로 물들었다.

“하하. 나도 그랬으면 좋겠네. 하지만 정용 공. 그쪽의 숙녀분에게선 그런 엄청난 일을 벌일 수 있을 법한 마력은 느껴지지 않는군. 오히려….”

“오히려 제가 느끼기론, 후배님 당신보다 미약한 마력 밖에 안 느껴지는걸요. 사람모양 허수아비도 저 여자분보단 마력이 많겠어요.”

옆에서 레이라가 한 술 거든다.

말을 가로채인 변경백은 멋쩍게 헛기침을 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동감이라는 의미인 듯하다.

그들의 실망스런 표정과 눈빛. 그것을 직시하던 불사의 마왕께선 얼굴이 즉각적으로 울그락불그락 난리가 났다.

“이, 이 무례한 잡것들이… 가, 감히 이 몸을…. 나를 능멸하다니잇…!”

억울하고 분하고 더럽고 치사하다는 얼굴이다.

그런데 실제로 힘이 없는 상태라 할 말이 없다. 그래서 하릴없이 이만 바득바득 간다.

저건 보고 있기가 안쓰러울 정도군. 나는 그쯤에서 슬슬 루시의 편을 들어주기로 했다.

“얘는 마력을 쓰지 않습니다. 다른 특별한 힘을 사용하기 때문에 느껴지지 않는 겁니다.”

변경백은 그 말에 턱을 쓰다듬었다. 흥미가 좀 동하는 얼굴이었다.

“오호. 설백 처자처럼 말인가? 숙녀분이 용사였나?”

“예. 맞습니다.”

내가 고개를 담담히 끄덕이자 마왕이 퍼뜩 나를 째려봤다.

가만히 살펴보니 ‘그게 뭔 이완용 독립운동가 되는 소리야?’라고 묻는 눈빛이다.

물론 진짜 그렇게 물었을 리는 없고, 느낌이 그렇다는 거다.

‘눈치 좀 챙기자 불사의 마왕아.’

나는 닥치고 고개나 끄덕이라는 제스쳐를 했다.

어떻게 찰떡같이 알아들었는지, 루시는 굴욕감이 뼈에 사무치는 얼굴로 긍정했다.

“그, 그래… 나, 나는 용사… 마왕들 때려잡는, 용사님이시다….”

“과연. 그렇군. 그렇다면야 납득을 못하는 것도 아니지.”

다행히 변경백은 내 말을 순순히 믿어줬다.

아마 평소에 변경백과의 신뢰관계를 제대로 구축해놓지 않았다면 이런 즉각적인 믿음은 바랄 수 없었을 터. 이래서 인맥관리가 중요하다니까.

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는 찰나.

“잠시만요.”

수십 번의 전생마다 질기도록 악연이었던 레이라가 어김없이 견제를 쑤셨다.

레이라는 변경백의 순순한 긍정에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나를 삿대질했다.

“설마 저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아무런 증거도 없이 믿고! 엘더리치의 언데드 군단을 습격할 생각은 아니시겠지요, 주인님!”

“할 생각이네만.”

변경백은 오히려 눈을 동그랗게 뜨며 쌈박하게 대꾸했다.

레이라는 허망한 얼굴로 가슴을 두들겼다. 그녀가 변경백을 쳐다보는 눈빛에는 원망까지 서려 있었다.

“주인님. 냉정해지세요. 주인님은 지금 사리분별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허허, 시종에게 듣는 말치곤 뼈가 깊군.”

“저 자의 무엇을 그리도 믿으십니까. 저 자는 용사입니다. 주인님을… 그리고 저와 그윈을 이렇게 만든 가장 큰 원인. 살아 숨쉬는 역질과도 같은 것들입니다!”

“허나 그윈 역시 다른 세계에서 찾아온 용사였네.”

그 말에 레이라는 입을 콱 다물었다. 변경백의 기세 때문에 순간적으로 할 말이 없어진 듯했다.

하지만 이내 입술을 잘근 씹은 레이라가 표독스럽게 반박한다.

“생각을 해보십시오 변경백님. 말로는 무엇이든 가능합니다. 말로는 저도 그 증오스러운 엘더리치를 100번도 죽일 수 있습니다.”

“흐음.”

“대체 무엇을 근거로 저 자의 망언을 믿으시는지요. 부디 가르쳐주시길. 저는 도저히 이해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고 보면 몇 번째 전생이었지.

하수도에서도 레이라가 비슷한 말을 하며 날 죽인 적이 있다.

―사람을 믿을 때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아세요? 저는 증거라고 생각해요.

그런 그녀의 입장에선 확실히 내 제안이 터무니없고 믿을 수없는 범주일 수도 있겠다. 내가 제시해줄 수 있는 확실한 물증은 사실 아무것도 없으니까.

나는 그저 시종일관 감정과 인정에 호소할 뿐이다.

내가 확실히 알고 있으니 믿으려면 믿고 말려면 말아라. 딱 이 정도의 수준인 것이다.

솔직히 나 같아도 안 믿는다.

‘하지만 지금의 변경백이라면 내게 힘을 빌려준다.’

변경백과 나눴던 문답에서 난 그 가능성을 봤다.

지금 변경백은 용사만을 싫어하는 게 아니다. 사실상 인간불신에 빠져있고, 자포자기 상태다.

변경백이 이곳을 수호하는 이유는 어떤 커다란 대의명분이 있어서가 아니다.

단 하나다. 자기 묫자리를 부끄럽지 않게 하려고 발악할 뿐이지.

‘변경백이 진짜 날 믿어서 도와준다고 생각하냐?’

레이라. 넌 전제부터가 틀렸다.

변경백은…. 사실 지금도 내 작전이 성공할 거라고 개뿔 요만큼도 생각 안 해.

쉽게 말하자면.

그는 그냥 자포자기 상태에서 내 말을 따라 죽고 싶은 것이다.

‘평생 옆에 붙어서 뭐 봤냐 쟤는.’

‘용사 박정용의 작전에 따라 적진에 돌격했다가 장렬히 산화했다’라는 명분을 얻고, 이 너절한 삶을 후딱 끝내고 싶은 거라고.

아무것도 모르는 나도 딱 보니 알겠더라.

―미안해하지 말게. 한 때나마 할센베르크의 미래를 꿈꿨으니.

뭐, 물론.

지금은 이미 없는 일이 되어버린 변경백의 최후도… 나의 확신에 한 몫 하긴 했다.

그런 나와 변경백의 속마음을 모르는 레이라는, 이어서 루시에게 삿대질을 하며 말했다.

“애초에 저 여자의 정체도 그렇습니다. 대체 어디 숨어 있다가 갑자기 나타났다는 겁니까. 용사 소환은 후배님 전까지만 해도 끊어진지가 옛날인데요.”

레이라는 그 말과 함께 차가운 눈으로 설백을 노려봤다.

설백은 뱀 앞의 개구리처럼 바싹 쭈그러들었다. 체할 것 같은 얼굴로 연신 기침을 한다.

나는 그런 레이라와 설백 사이로 끼어들었다.

“에헤이. 괜한 업보 늘리지 말자.”

“… 흥.”

괜히 상관도 없는 설백한테 화풀이하지 말라는 협박.

레이라는 표정을 구기며 시선을 돌렸다. 설백이 그제야 한숨 돌렸고, 이내 내 뒤에 대고 작게 인사했다.

“고, 고마워요. 정용님.”

“됐으니까 밥이나 드슈.”

“네에….”

그러고 보니 설백은 나 이전에 마지막에 있었던 소환식의 최후 생존자다. 레이라와 상성이 나 이상으로 최악이군.

지금 다 같이 힘 모아서 으쌰으쌰해도 모자랄 판인데 이렇게 분열되면 나로선 곤란하다.

“자 일단 거기까지 하시고.”

나는 박수를 쳐서 사람들의 이목을 모았다.

그리고 이쯤에서 이 지리멸렬한 논쟁을 종식시키기로 했다.

“야 레이라. 꼬우면 가지 마. 너 사실 그렇게 많이 필요하지도 않아.”

“?!”

사실 엄청 필요한 사람이지만. 나는 그렇게 허세를 부렸다. 레이라는 인상을 잔뜩 구긴 채 나를 노려봤다.

내 발언이 의외인 것도 있고. 대놓고 무시하니 짜증난 것도 있으리라.

“지금… 뭐라고 지껄였나요?”

“그렇게 꼬우면 가지 말라고. 훈수충 아웃 새꺄.”

그녀가 필요한 건 사실이지만. 더 이상 낭비할 시간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나는 한 시라도 빨리 이 지긋지긋한 폐성을 탈출하고 싶다.

그것도 레이라나 할센베르크 변경백, 어느 쪽에도 후환이 남지 않는 깔끔한 형태로.

'그것 때문에 난 너한테 복수하는 것도 포기했다고. 알긴 아냐?'

어차피 이제와선 모두 없었던 일이 되어버린 나의 개죽음들.

그 전생의 분노를 이번 생에 발산하는 게, 내 앞으로의 생존에 이로운가?

'아니. 전혀.'

X도 쓸모도 없는 비생산적인 행위다.

나는 자타공인의 호구다. 그러나 병신도 아니고 저능아는 더더욱 아니다.

그래서 하수도에서, 레이라에게 알랑거릴 때부터 결심했다. 사사로운 감정을 접고 좀 더 빅― 픽쳐를 보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선 이 성에 위협이 되는 엘더리치를 하루빨리 박살내야 한다고!'

내가 너희들의 해피엔딩을 위해서 이렇게까지 똥고생을 하는데 쌔꺄.

굳이. 사람 빡치게. 이렇게 비협조적으로 나와야겠냐? 응?

“뭔 말이 그리 쫑알쫑알 많아. 못 믿겠으면 가지 마. 네가 뭔데 변경백이 가겠다는데 지랄이냐? 개길 끗발 정돈 되나보지?”

“정용 공. 말을 삼가게.”

옆에서 엄중한 목소리로 변경백이 주의를 줬다.

나는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렴 건물주가 닥치라면 닥쳐야지.

“… 큿!”

레이라는 분한 얼굴로 나를 뚫어지게 노려봤지만.

끝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테이블을 부술 듯이 내리치고는 자리를 박차고 성큼성큼 식당을 나가버렸다.

“새끼 나이도 어린 게 싸가지 하고는.”

보란 듯이 혀를 차 주고는 다른 이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설백, 변경백, 그리고 어리둥절한 얼굴의 루시까지.

나는 고개를 굳게 끄덕였다. 그리고 조금 낮게 깐 목소리로 좌중을 보며 말했다.

“방해꾼은 사라졌습니다.”

나는 먼저 식기들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을 마쳤다.

“출정준비 하십쇼. 엘더리치 때려잡으러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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