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3트 (third try)
* * *
뭐 아무튼. 시공회귀에 대해 알고 싶은 것도 전부 알아냈겠다.
나는 마왕의 도움을 받기 위해, 엘더리치 살해 계획을 곧장 털어놓았다.
“용사. 네놈 벌써 흉마에 먹혔느냐?”
그 대답은 혐오 어린 표정과 함께 즉시 돌아왔고.
꿈틀거리는 내 손도 마왕의 볼로 즉시 향했다.
“아, 아니 미안! 죄송해요! 다시 생각해보니 지당하고 타당한 명안인 것 같아요!”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 씨이….”
혼자 씨불거리기 시작한 마왕. 백날 그래 봐라. 뭐 바뀌나.
어차피 넌 나랑 1+1 상품인 이상, 내가 한다면 무조건 하는 거다. 열외 없어.
‘이래서 갑들이 갑질을 하는 거였군.’
당할 땐 그렇게 짜증났는데. 솔직히 기분이 오지게 째진다.
혼자 고개를 끄덕이자니, 문득 마왕이 내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퍼뜩 말했다.
“근데 말이다 용사.”
“어 왜.”
“내가 엘더리치한테 베슬의 위치를 물어서 알아내면. 네놈은 그걸 가지고 어쩔 셈이냐?”
“부숴서 죽일 건데?”
노 빠꾸 노 퓨쳐, 예스 상남자.
칼같이 사실대로 대답했다. 마왕이 인상을 팍 찡그렸다.
잠깐 그 상태로 침음을 흘렸던 그녀는, 이내 눈썹을 튕기며 내게 손가락을 까딱였다. 가까이 오라는 제스쳐다.
내가 순순히 얼굴을 가까이하자, 그녀가 언성을 조금 높였다.
“아니 여봐라. 그러면 나한테 좋을 게 하나도 없지 않느냐! 엘더리치는 내 충직하고 강력한 가신들 중 하나란 말이다!”
“대신 나를 얻었잖아. 새로 태어난 김에 적폐세력 손절하고 정용코인 탑승하자.”
“으그그! 진짜 네놈이 내 수호자만 아니었어도! 아우 진짜!”
마왕이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쳤다.
현재 무력적으로 갑이 나인지라, 반항하지 못하는 자기 처지가 답답한 모양이다.
그녀는 쌍심지를 벌떡 세우고 내게 따박따박 대들었다.
“네놈은 용사지 않느냐! 내가 언젠가 이 파라이소 대륙을 정복하려할 때, 엘더리치랑 다르게 네놈은 걸림돌이 될 게 아니냔 말이다!”
“안 될 거야.”
이번에도 나는 즉각 대답했다. 잠깐의 망설임도 없었다.
마왕의 눈썹이 꿈틀, 춤을 췄다.
“…… 뭣이?”
“지금 도와주기만 하면, 난 평생 네 편이 될 거라고.”
내 돌발 발언에 마왕은 벙찐 표정으로 입을 뻐끔거렸다.
나는 믿음직하게 따봉을 치켜들고 불사의 마왕에게 말했다. 나름 진지한 어조였다.
“내가 윗대가리한테 받은 명령은 너를 관리하라는 거였지, 토벌하라는 게 아니었어.”
“허어… 그래서?”
“네 마음대로 해라. 이쪽 대륙을 먹든 내가 살던 지구를 두쪽 내든. 조또 관심 없어.”
미네르바와의 약속대로, 나는 마왕의 감시자다. 나는 지금부터 마왕을 감시해야 한다. 실제로 하긴 할 거다.
하지만 감시하라고 했지, 그게 마왕이 세상을 정복하는 걸 막으라는 의미가 되나?
싫다. 귀찮다.
시키지도 않은 일을 내가 왜 해.
억울하면 명령이나 똑바로 해놓든가.
‘이래서 구두계약이 문제지.’
계약내용을 상대가 멋대로 곡해해도 증거가 없잖아?
미네르바를 비롯한 아신 놈년들아. 너희는 나를 좀 너무 우습게봤다.
“나중에 세상 찜쪄먹으면 나도 한 자리 얹어줘라. 개처럼 일해줄 테니까.”
“허. 처음부터 느낀 거지만 네놈은… 내가 알던 용사들과는, 좀 많이 다르구나?”
“알 게 뭐냐. 딴놈들 어떻게 살든.”
나는 대차게 조소를 지은 뒤, 중얼거렸다.
“1억 6341만 7413명이나 되는 용사 중에, 나 같은 놈도 하나 정도는 있어줘야지.”
내가 당당하게 궤변을 늘어놓자 마왕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이었다.
헛웃음을 흘리던 마왕이 이내 고혹적인 안광을 빛냈다.
“후후후, 좋다. 믿어주마. 하지만 역시, 엘더리치의 값어치에 비해 아직 부족하니라. 더 큰 조건을 걸거라.”
“네가 엘더리치의 베슬 위치를 캐내주지 않으면. 수호자고 나발이고 지금 당장 널 죽이고 나도 자살할 거다.”
이런 걸 당근과 채찍이라던가? 방금까지 회유였다면, 지금은 협박이다.
네가 갑질할 때가 아니란 걸 알아야지 불사의 마왕아.
“… 읏!”
3연속의 즉답에 마왕이 숨을 삼켰다.
부릅뜬 붉은 눈이 나를 빤히 쳐다본다. 내가 허세를 부린다고 생각했는지, 그녀의 표정에 곧 여유가 돌아왔다.
“할 수 있으면 어디 한 번 해보거라. 죽음이 녹록하지 않다는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세븐 소드 피어스.”
파지지직!
곧장 일곱 개의 검이 내가 쥔 베스타크에서 튀어나왔다.
네 개는 마왕의 목 언저리에. 그리고 나머지 세 개는 내 목을 정확히 겨누고 있었다.
“아무렴 사내새끼는 말보다 행동이지.”
“…….”
“까짓 거 스물두 번 죽어봤는데 스물세 번쯤이야.”
나는 보란 듯이 베스타크를 똑바로 내 목에 겨누었다.
가라앉은 내 눈에서 진심을 읽었는지, 마왕은 잠깐 낮은 탄성을 흘렸다. 그리고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얼굴엔 질렸다는 듯이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래 좋다. 용사 네놈, 내가 배신한 값어치를 반드시 보여줘야 할 것이야.”
“말이라고.”
나는 번쩍 손을 내밀어 마왕과 맞잡았다.
가볍게 흔들어 악수를 나눈 나는, 곧장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 후우. 살았다.’
허세가 먹혔다.
안 무섭긴 개뿔. 애초에 이 지랄쇼를 벌이는 이유가 한 번이라도 덜 죽어 보겠다고 이러는 건데.
미쳤냐? 여기서 사이좋게 동반자살하게?
‘스물두 번 죽었으니 스물세 번은 안 무서워?’
지랄 싸는 소리다. 스물두 번이나 죽었으니 스물세 번째는 점점 더 무서워지는 거지.
죽음에 대한 공포는 지금도 죽을 때마다 복리로 늘어나고 있다.
‘뭐. 아무튼 간에.’
이걸로, 진짜 모든 배우가 다 모였다. 이젠 정말 마지막 연극이 될 수 있겠지.
모가지 잘 씻어놨길 바란다. 얼굴도 모르는 엘더리치야.
* * *
“여러분. 오늘은 제가 소개해드릴 사람이 있습니다.”
그 날 아침.
나는 모두가 모인 아침식사 현장에서 야심차게 마왕을 데리고 나갔다.
레이라에게 빌린(이라 쓰고 훔친이라 읽는다) 수수한 흰색 원피스를 입고, 그 위에는 날개를 가릴 짧은 숄. 그리고 뿔을 가리기 위해 검은 써클릿을 쓴 마왕.
적어도 외관상으론 무척 가련한 소녀 같이 보였다. 어디까지나 외관상이다.
“… 와아.”
“오오. 아름다운 처자로군.”
물론 설백을 제외한 모두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새로운 인물을 쳐다봤다.
아니. 이제보니 설백도 눈을 크게 뜨고 있다. 아마 원피스 하나로 급변한 그녀의 모습이 낯설어서 그럴 것이다.
나는 그런 모두에게 설명해줬다.
“엄, 소개하죠. 이쪽은 제 오랜 지인인 루시라고 합니다.”
“… 반갑다 제군들. 이몸은 루슷… 아니. 루시라고 한다.”
어제의 5시간에 달한 ‘다 너 잘되라고 하는 설교’는 효과가 만점이었다.
그 증거로 지금, 마왕 루시는 고분고분하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 있다. 물론 얼굴은 굴욕감으로 점철되어 부들부들 떨고 있었지만.
'그래도 처음 거만한 태도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지.'
참고로 루시라는 이름은 루스티카를 줄여서 대충 지은 거다.
본명은 못 쓴다. 불사의 마왕 부활했다고 광고할 것도 아니니까.
나는 가만히 청중들의 반응을 살폈다.
“음… 가, 갑작스럽군. 어제부터 참 갑작스러운 일들 투성이로군 정용 공.”
“그렇네요. 설명을 좀 해주실까요 후배님.”
“아하하….”
침음을 흘리며 턱을 쓰다듬는 변경백과, 추궁의 눈빛을 보내는 레이라. 그리고 옆에서 멋쩍게 웃으며 음식을 깨작거리는 설백까지.
반응들을 보니 나름대로 의심의 눈초리는 절찬리에 뿌리고 있지만. 이 여자가 불사의 마왕이라는 것까지는 눈치채지 못하는 듯하다.
설백은 어제 태어나는 걸 직접 목격했지만, 아마 ‘불사의 마왕’이라는 이명이 갖는 심각성을 모르는 거고.
그래서 그녀에게 마왕 루시의 이미지는 그냥 ‘파티 동료가 부화시킨 정체 모를 박혁거세 소녀’ 정도다.
‘… 후우. 일단 가장 중요한 고비는 넘겼다.’
복장으로 눈에 띄는 특징은 모두 숨겼지만. 가장 중요한 얼굴을 알고 있을 경우 아무 소용이 없다.
하지만 변경백은 다행히 불사의 마왕의 얼굴까지 식별하지는 못하는 듯했다.
‘하긴 이 여자… 30년 전에 죽었다가 부활했다 그랬나?’
마왕군과 전쟁이 잦아 평균수명이 낮은 이쪽 동네에선, 30년 전이면 이미 전설 속 존재다. 그 얼굴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게 정상이다.
이렇게 되면 오히려 뻔뻔하게 나가는 게 상책이다.
나는 루시를 전면으로 세우며 말했다.
“얘가 이번 작전의 비밀병기입니다.”
“… 비밀병기?”
“예. 얘만 있으면 엘더리치의 베슬 위치를 알 수 있을 겁니다.”
그 말에 변경백은 물론이고 레이라도 경악에 겨운 얼굴로 마왕을 쳐다봤다.
“… 뭐. 뭘 꼴아보냐 다들.”
심기가 어지간히 불편해 보이는 마왕을 중심으로,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