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나랑 계약해지하지 않을래?
“저는 버러지입니다… 다시는 까불지 않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장장 5시간에 달한 ‘다 너 잘 되라고 하는 설교’가 끝났다.
창밖으론 이미 새벽이 밝고 있었고. 마왕은 침대에 무릎꿇고 앉은 채 꾸벅꾸벅 졸며 연신 그 말을 되뇌었다.
거의 세뇌당한 모습.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야 마왕.”
“응허?”
내 부름에 퍼뜩 잠에서 깬 마왕이 고개를 돌렸다. 비몽사몽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린다.
나는 그녀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다가, 이내 멋쩍게 고개를 돌렸다.
“… 일단 이거라도 좀 입고.”
“으에?”
나는 방에서 뒹굴던 내 셔츠 하나를 마왕에게 덮었다.
생각해보니 지금껏 얘 반라 상태로 계속 있었다. 열이 뻗쳐서 눈에 뵈는 게 없었다지만, 너무 주변머리가 없었다.
“으음… 뭐, 일단 시키니 입긴 하겠다만.”
마왕은 못마땅한 얼굴로 걸쳐진 셔츠를 바라봤고. 이내 주섬주섬 단추를 잠그기 시작했다.
그녀는 한동안 하얀 셔츠로 감싸인 자기 몸을 물끄러미 쳐다보나 싶더니.
“이거 가슴이 너무 답답하다. 용사.”
“… 닥치고 입어. 나중에 맞는 옷 가져올 테니까.”
“날개도 끼어서 힘들다. 답답한데 벗으면 안 되겠느냐?”
“나중에 가져다 준다니까. 일단 참아.”
“끄응. 일단 알겠다.”
불만스런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리는 마왕. 나는 그녀를 잠깐 주시했다.
얇은 셔츠 한 장을 걸친 마왕의 뇌쇄적인 몸매가 유감없이 드러난다. 셔츠 아래로 뻗은 새하얀 다리. 그 사이로 삐져나와 살랑거리는 꼬리가 유난히 눈에 밟혔다.
“뭘 그렇게 흘금흘금 쳐다보느냐.”
“어흠! 허흐허험!!”
이런 X발. 머리에 열이 식고 나니 쓸데없는 게 보이기 시작하는군.
정면으로 마주보기가 껄끄러워진 나는 그대로 털썩. 마왕의 옆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 야. 지금 너는 나랑 계약이 돼 있는 상태지?”
나는 주의를 돌리기 위해서라도 화제를 바꿨다.
마왕은 그런 나를 미심쩍게 쳐다봤지만. 이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까딱였다.
“그러하다. 대체 어쩌다 용사인 네놈과 수호계약이 묶였는지는 과인… 아, 아니. 나도 모르겠지만. 지금 네놈과 나는 수호자 계약이 성립된 상태다.”
“흐음.”
“영광으로 알거라. 인간이 내 수호자가 된 경우는 내 생을 통틀어도 세 손가락에 꼽는 진귀한 일이니라.”
“옘병 퍽이나.”
나는 가만히 손을 쥐락펴락 해봤다가, 다시 시선을 마왕에게 돌렸다.
“전에 수호자였다는 인간들은 어떤 놈들이었냐?”
“음….”
내 물음에 루시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눈을 말똥말똥 뜨며 말했다.
“기억 안 난다.”
“…….”
“왜, 왜 그런 눈으로 보냐. 어쩔 수 없다. 내가 죽어서 수호자 계약이 파기되면, 나는 수호자에 대한 모든 기억을 잃는단 말이다.”
“흐음. 그러냐?”
“그렇다.”
그렇다는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쪽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내가 진짜 궁금했던 부분은 지금부터니까.
“내가 죽으면 말이다. 시간이 돌아가잖아.”
“그렇다. 망할 천계의 사신 자매들도 가지지 못한 나만의 권능이니라. 후후. 놀랍느냐?”
“… 뭐 그래. 놀랍긴 한데… 그러면, 너도 죽으면 시간이 돌아가냐?”
놀라운 건 사실이니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고. 난 곧장 본론을 꺼내들었다.
의기양양한 표정의 마왕은, 무슨 말을 하냐는 듯이 눈썹을 틀었다.
“시공회귀는 어디까지나 수호자에게 거는 보험이다. 내가 뭣하러 그런 귀찮은 짓거리를 해야 하지?”
“뭐? 그럼 넌 죽으면 어떻게 되는데.”
“용사 네놈이 지금껏 지키지 않았느냐! 나는 알로 돌아간다.”
“아.”
불사의 마왕의 알. 내 이세계 생활의 알파이자 오메가.
그래. 생각해보니 마왕은 죽고 난 뒤 알 상태로 있다가, 아신들에게 발각돼서 나와 엮인 거였지.
나는 그제야 깨달음의 탄성을 흘렸다.
“… 그런 건가.”
“그런 게다. 지금처럼 수호자가 붙어 있으면 금세 부활할 수 있지만. 수호자와 같이 죽어버린 경우엔 부활에 시간이 많이 소요되지. 이번 부활에 30년이나 썼던 것처럼 말이다.”
그녀는 치렁거리는 햐안 머리를 긁적이며 당당하게 말했다. 거짓말은 아닌 듯하다.
이걸로 확실해졌군. 불사의 마왕 본인은 시공회귀를 하지 않는다.
이러면 내가 생각하고 있던 한 가지 계획에 큰 차질이 생긴다.
“그러면. 일 잘못 됐을 때, 나 대신 널 죽여도 시공회귀는 되지 않는다는 거냐…?”
“아니 미친 이 썩을 놈의 쉑…! 그, 그딴 발칙한 생각을 하고 있었단 말이냐?!”
마왕은 노발대발하더니 내 어깨를 마구 두들겨팼다.
그래봐야 솜주먹이라 하나도 안 아팠지만. 오히려 때린 그녀만 지쳐서, 헝클어진 셔츠를 정리하느라 바빴다.
“아우씨, 이건 뭐 이리 불편한 복장이냐!”
그녀는 어지간히도 셔츠가 답답했는지 단추를 위부터 하나씩 풀러가고 있었다.
… 이런 X발. 자꾸 시선이 쏠린다. 나는 황급히 말을 이어나갔다.
“야 그럼. 적어도 회귀점 설정은 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거지?”
“음? 어… 그게.”
마왕은 내 질문에 눈에 띄게 당황했다.
단추를 풀다 말고 우물쭈물하는가 싶더니. 이내 고개를 떨구고 입을 다문다.
내 얼굴은 곧장 우거지상이 되었다.
“못하냐?”
“그… 회귀점 설정에도 꽤 많은 마력이 필요하다. 근데 지금 몸 상태가 이 모양이라….”
“…….”
“… 아마 다가올 미래에 내게 위협이 있으면 본능적으로 회귀점 갱신이 되겠지만. 그 외에는 안 된다.”
그렇다는군.
그러니까, 앞으로는 회귀점이 갱신된다 싶으면. '너 이제 앞으로 X될 거다'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라는 소리다.
이해했다. 전부 이해됐어.
나는 산뜻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곧장 마왕에게 물었다.
“이 계약 해제는 못하냐?”
“해… 제? 계약을 파기하겠단 말인가?”
“당장 하겠다는 게 아니고. 되냐 안 되냐가 궁금한 거지.”
“굳이 말하자면… 내가 원하면 파기는 할 수 있다.”
“그래? 그럼 지금 당장 파기하자.”
김 모 화백의 만화가 떠오르는 극한의 태세변환.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마왕의 미간이 역동적으로 꿈틀거렸다. 그녀의 멍하니 풀린 시선이 내게 향했다.
“… 뭣이?”
“계약 파기하자고. 너도 나 싫다면서. 잠깐 욕봤다 생각하고 알아서 갈 길 가자고.”
“그, 그야 그렇다만… 계약 파기도 마력이 꽤 든다.”
“…….”
“지금은 내가 마력이 모이지 않는 상태라 계약을 파기할 수가 없는데….”
시무룩하게 풀 죽은 마왕이 손가락을 비비 꼬며 말했다.
참고로 나는 그녀 이상으로 시무룩해졌다.
“아 뭐냐. 그걸 먼저 말해야지. 좋다 말았네.”
“미안하… 긴 내가 왜! 이게 아니고!!”
마왕은 내게 얼굴을 퍼뜩 가까이 가져왔다.
내 입에서 튀어나온 발언들을 믿을 수가 없다는 행색이었다.
“네놈! 감히 과인의 은혜를 입어 지금까지 연명한 주제에 파기라니?! 어찌 그런 망발을…!”
“은혜? 진실의 방에서 은혜의 말씀 한 번 더 듣고 싶냐?”
“으힉.”
내가 진심으로 극혐하는 표정을 짓자 마왕이 흠칫 몸을 물렸다.
어지간히도 은혜의 말씀이 싫었는지 진땀을 뻘뻘 흘린다. 방금까지의 거만한 태도가 온데간데없이 온순해졌다.
“아 왜. 사실이잖느냐. 내, 내 몸에 흉마(凶魔)가 잔뜩 쌓인 거 보니… 용사 네놈. 이미 내가 부활하기 전부터 잔뜩 죽어댄 모양이더만.”
마왕이 아까처럼 손을 꼼지락거리며 볼멘소리를 주워섬겼다.
나는 생소한 단어의 출현에 눈썹을 슬쩍 튕겼다.
“흉마? 흉마가 뭔데.”
“네가 죽음을 겪을 때마다 내 몸에 쌓이는 특수한 마기(魔氣)다.”
“… 그게 쌓이면 어떻게 되는데?”
“죽음과 시간은 불가분의 관계이니라. 같은 시점에서 네놈의 죽음이 반복되면 내가 고정한 시간축의 구성력이 약해지고. 결국 붕괴하게 된다.”
나는 마왕의 말을 곰곰이 곱씹어 봤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뭔 소리인지 모르겠다.
나는 찹쌀떡 같은 마왕의 하얀 볼을 쭉 잡아당겼다.
“10초 줄 테니까 허세충 개소리 집어 치우고. 내가 알아들을 수 있게 정리해라.”
“어아! 아흐아! 아흐니까 이허 놔! 아파앗!”
마왕이 팔을 필사적으로 휘적이며 내 손을 떼려고 했다. 나는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찔끔 맺히는 걸 보고 나서야 손을 놔줬다.
그녀는 울상이 돼서 볼을 비비적거리다 이내 나를 째려봤다.
“쉽게 말해! 회귀점이 박살난다 이 말이다!! 그 시점으로 더 이상 부활할 수 없다고!”
“…… 아.”
그제야 이해했다.
이해하고 나니 생각보다 심각한 얘기라서 충격을 먹었다. 내 시공회귀가 무한하지 않다는 소리니까.
나는 얼떨떨하게 마왕을 바라보며 재차 물었다.
“… 그 흉마의 최대치? 같은 게 대충 몇 번까지냐?”
“그건 네놈 정신상태에 따라 다르다. 흉마는 네놈에게도 쌓이니까.”
“나한테도?”
“그러하니라. 그러니 중요한 건 내가 아니라 네놈의 정신머리지.”
마왕은 히죽 웃으며 내 옆머리를 콕콕 찔렀다. 특유의 붉은 눈이 유난히 사특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의 핏기 없는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흉마는 수호자의 정신을 좀먹는다. 죽음을 반복할수록 네놈은 점점 죽음에 무뎌지게 될 게다. 본인의 죽음도. 그리고 타인의 죽음도.”
“죽음에 무뎌진다….”
나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미래가 예상되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과거가 떠올라서이다.
이번 작전만 해도 그렇다.
나는 죽는 게 무섭다. 정말 미친 듯이 죽기 싫다.
그런데 그렇게 죽음을 두려워하면서도, 어느새 내 목적을 이루기 위해 목숨을 기꺼이 버릴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이미 알고 있다. 죽음에 익숙해진다는 저 감각을.
가슴 한 켠이 서늘해지는 가운데. 마왕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끝내 광인이 된다. 목숨에 아무런 가치도 느끼지 못하는 위험한 광인이. 그렇게 되면 흉마가 끝까지 쌓인 게지. 그 순간이 오면 나는 선택하는 게다.”
“선택?”
“계약을 파기하고 수호자를 포기하거나. 아니면 특정 회귀점을 파괴해서 흉마를 지나온 시간과 함께 날려버리는 게지. 이 선택권은 자비로운 이몸이 언제나 수호자 본인에게 주고 있지만… 대부분 전자를 선택한다.”
“…….”
“적어도. 과거 내 수호자였던 두 명의 인간은 그러했느니라.”
서늘한 경고가 포함된 마왕의 말. 나는 심각하게 가라앉은 얼굴로 마왕을 마주봤다.
그리고 대답 대신, 이번에도 볼을 쭈욱 잡아당겼다.
“아가가가! 아흐아! 아 왜! 왜 자꾸 당기흔 거햐!!”
“너 그 허세에 찌든 말투 좀 고쳐라. 존나 오글거려. 힙찔이냐?”
“히, 히찌리가 먼데! 아, 아무튼 안 하께! 놔 줘! 아프아!!”
나는 확답을 받고 나서야 마왕의 볼을 놔줬다.
이젠 마왕은 울먹이다 못해 훌쩍거리며 울고 있었다.
“으힉… 으우… 부, 분하다… 이, 이 수모… 내가, 언젠가, 반드시 갚고 말 것이야… 우흑!”
그렇게 내가 세게 잡았나. 아니. 분명 그러진 않았다.
꼬집었다고 하기도 뭐하게, 사실 그냥 주무른 수준이었다.
‘마왕이라는 년이 뭔 눈물샘이 저리 약하냐.’
저것도 마력이 없어서 그런 건가.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고개를 돌린 채 셔츠자락으로 눈물을 닦아내는 최흉, 최악, 최강의 마왕. 나는 슬쩍 한숨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