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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417413번째 소울라이크 용사-43화 (19/280)

43화 나에게 마왕은 살인이다

“이게… 마왕?”

나는 알을 깨고 등장한 여성의 모습을 찬찬히 훑었다.

전라의 여성. 나이는 나보다 살짝 어려 보인다. 20대 초반의 외모에, 눈부신 은발이 발끝까지 닿다 못해 바닥에 끌리고 있었다.

치렁거리는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선명한 붉은 눈동자는 묘한 매력과 동시에 음험한 기운을 살포했다.

‘그냥 사람 같기도… 아니네.’

순간 착각했지만. 자세히 보니 인간이 아니라는 걸 주장하는 부분이 많았다.

하얗다 못해 창백한 피부와, 이마 위로 돋아난 앙증맞은 세 개의 뿔. 덥수룩한 머리칼 사이로 까딱거리는 조그만 피막 날개.

그리고 꼬리. 전선처럼 가느다란 검은색의 꼬리가 엉덩이 위로 달려있다.

여담이지만.

몸매가 굉장하다. 오우야.

“그… 너무 특정 부위를 뚫어지게 쳐다보시는 것 같은데요 정용님.”

“그, 그럴 리가 있나.”

옆에서 설백이 싸늘한 표정으로 주의를 줘서 간신히 눈을 돌렸다.

한동안 설백의 책망하는 눈빛을 피하던 차, 문득 나를 내려다보던 마왕과 시선이 딱 얽혔다.

“… 후하.”

그런 소리를 내며 마왕이 히죽 웃었다.

눈매가 고혹적인 호선을 그렸다. 빠져들 듯한 새빨간 눈동자가 요사스럽게 빛난다. 이윽고 그녀는 당당하게 내 앞으로 걸어오더니.

침대에 한쪽 발을 콱, 얹으며 고압적인 말투로 내게 말했다.

“네가 나의 수호자로구나. 지금껏 과인을 지키느라 고생했느니라, 나의 충직한 시종아! 내 친히 노고를 치하하마.”

“… 얼씨구?”

하대였다.

그것도 나를 시종이라 부르며, 부려먹는 하인 취급을 하고 있었다.

내가 눈썹을 튕김에도 아랑곳않고 마왕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떠벌거렸다.

“하핫. 설마 거기서 그렇게 죽어버릴 줄이야… 다시 부활하는데 무려 30년이 걸렸느니라, 30년! 이리 오랜 세월이 걸리다니 용사들도 제법이지 않은가! 아하하!”

“야.”

“하지만 이렇게 다시 부활했느니라! 이 불사의 마왕 루스티카 아스모데우스! 다시금 파라이소의 천하를 내 손아귀에 넣으려 이 시간, 이곳에 완전히 새로 태어났음을 엄숙히 선포한다! 아하하하!”

“… 귀 먹었냐?”

뭐랄까.

그녀의 고압적이고 거만하고 안하무인에 방약무인한 태도를 보고 있자니.

나는 이 세상에 와서 전무후무하다 싶을 정도로 화가 치솟은 상태였다.

“음? 가만! 이, 이 냄새는….”

한 술 더 떠. 마왕은 내 몸에 대고 별안간 코를 킁킁거렸다.

그러더니 한 발짝 멀어지며 혐오스러운 눈으로 날 쳐다보기 시작했다.

“더러운 천계 아신들의 냄새… 네놈, 설마 용사인 것이냐?”

“… 뭐, 일단 그렇다만.”

그 말에 마왕의 이죽거리던 표정은 극적으로 변했다.

버려진 개새끼 쳐다보는 눈빛이 내게 쏟아진다.

“이럴 수가! 이번 일생을 함께할 수호자가 더러운 태생이라니. 설마 용사놈들에게 나의 부화장이 발각된 것인가? 그래서 제2계 놈들이 농간을….”

더러운 태생이라니. 말쌈 참 곱게 하시는군요 마왕님.

듣는 더러운 태생 열받게 말이야.

속으로 씨근거리는데, 마왕이 내 턱을 붙잡고 자기쪽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여봐라.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이냐. 어서 설명하거라 시종아.”

“허허허허허….”

“웃지만 말고 설명을 하거라! 어서!”

나는 헛웃음을 연신 흘렸다.

더럽긴 얼어 뒤질. 더러운 건 내 입장이지.

누군 네놈 때문에 생에 다시없을 정도로 개고생에 개고생을 반복하고 있었는데. 나오자마자 듣는 말이 저런 김밥 옆구리 폭발하는 소리라니.

시종?

개짖는 소리 하고 자빠졌다. 내가 왜 네놈의 시종이냐.

생각해보니 억울해 미치겠네. 레이라도 그렇고. 이 미친년도 그렇고.

왜.

내가.

너 같은 이상한 년들한테.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냔 말이다.

“… 안 되지. 안 돼.”

나는 고개를 저으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낮게 깔린 목소리에서 무언가 느꼈는지, 설백이 흠칫 몸을 빼며 나를 불렀다.

“저… 정용님? 괜찮으세요?”

“나 좀 먼저 간다 설백.”

“어, 예?”

“오늘 봤던 건 다른 사람들한테 절대 비밀로 해줘. 너랑 나만의 비밀이다. 알겠지?”

“아, 우리만의… 네, 넷!”

설백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천천히 앞장서 나가는 나를 마왕은 끔뻑이는 눈으로 가만히 보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녀를 불렀다.

“넌 잠깐 나 좀 따라와라.”

“아앙? 오만하구나. 한낮 시종 주제에 감히 내게 명령을….”

“아가리 여물고. 진실의 방으로.”

내가 번득이는 눈으로 마왕을 흘겨보자, 거만하게 치켜세웠던 그녀의 고개가 살짝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이내 퍼뜩 오기가 든 얼굴로 눈을 부라렸다.

“이, 이 시종이… 네놈, 그 사이 머리가 고장난 게냐?”

“어. 지금 너 때문에 대가리가 삐걱거린다. 기름칠 좀 하러 가자고.”

“이이…! 지금이라도 용서를 빌면 내 하해와 같은 마음으로 관용을 베풀 뜻이 있느니라.”

마왕은 상황 파악이 안 되는 얼굴로 멀뚱히 나를 쳐다봤다. 애써 지은 웃음이 위태롭게 입가에 걸려 있었다.

그럼에도 난 한 치 미동도 없는 표정으로 마왕을 똑바로 노려봤고.

그녀는 점점 ‘아니 X발 이게 아닌데?’ 싶은 표정으로 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어… 그, 과인은 그… 불사의 마왕님이니라. 네 주인님이다. 너는 그, 과인의 시종… 이잖느냐? 아, 아무리 네놈이 용사이고, 수호자로서 나를 지킨 공이 있다고는 해도… 그런 싸가지 없는 말투는 과인이 좀 용허해주기가….”

“진실의 방으로.”

나는 엉거주춤하게 서 있던 마왕의 팔목을 그대로 붙잡았다.

체온이 무척이나 차가웠다. 새삼 실감하게 되었다.

진짜 사람이 아니군. 생물적으로나 인성적으로나.

이제 나랑 사람 되러 가자.

“어. 흣?!”

팔을 붙잡힌 마왕은 지금까지 거만했던 태도가 거짓말 같이, 새된 소리를 내며 나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세상이 내게 이럴 수는 없다는 표정이다.

“이, 이 무례한 놈! 지금 당장 놓지 않으면 네놈을 잿더미로…!”

그리고 마왕이 내 손을 향해 팔을 뻗었다.

순간 싸한 느낌이 몰려오며 시커먼 기운이 마왕의 손아귀로 몰려들었다.

‘이건…?!’

나도 그 엄청난 기척에 숨을 삼켰다. 짧은 시간 동안 팔을 뺄지 말지 수없이 고민하는데.

이내 파스스, 하고 김빠지는 소리와 함께 몰려들었던 힘은 거짓말 같이 흩어졌다.

마왕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자기 손을 쳐다봤다.

“이, 이럴수가… 힘이… 들어가질 않아? 너무 오랜만에 깨어나서인가?”

마왕은 자기 몸을 더듬으며 연신 고개를 저었고.

나는 그 모습을 보며 히죽, 음험하게 웃었다.

“… 세상 일이라는 게 참, 계획대로 되는 법이 없죠? 얄궂네 얄궂어.”

“히익?!”

내가 비아냥대듯 말하자 마왕은 퍼뜩 내게 시선을 박았다.

나를 쳐다보는 눈빛에 전에는 없던 감정이 실려있었다. 분노. 굴욕. 불안. 뭐 그런 것들.

동감이다. 나도 너를 보면서 딱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 역시 불사신끼리는 마음도 통하는 모양이지?

그래. 세상이, 네가 나한테 이런 태도를 보이면 곤란하지.

지금부터 버르장머리를 좀 고치러 가보자. 신생아 마왕 소녀여.

“가자. 진실의 방으로.”

“자, 잠깐! 잠깐 기다려라! 알고나 가자! 대체 뭐냐 그 진실의 방은?!”

“너를 세상의 진실과 마주시켜줄 꿈동산이지.”

“이, 이거 놔라! 이익! 과, 과인이 부활한 직후라 힘이 없다고는 해도 이런… 아야! 아, 아파! 좀 살살…!”

마왕은 이제 내게 엉겨붙으며 마구 저항했다.

내 팔을 당기다가 밀어내다가. 어깨를 툭툭 치다가. 소리를 지르고, 심지어는 깨물기까지 했다.

그러나 나는 요지부동이다.

우리는 설백의 방에서 나와, 바로 옆에 있던 내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 방문이 가까워질 때마다 마왕의 목소리는 떨리기 시작했다.

“어, 그… 과, 과인이 심기를 상하게 한 부분이 있다면 사과하마… 아니, 사과할게. 사과할게요! 미안해요! 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요?!”

마왕이 끝내 울먹이며 사죄를 연발했지만. 결국 나는 그녀와 함께 내 방으로 들어갔다.

끼이익, 덜컹.

어두운 내 방의 랜턴이 켜지고. 문은 닫혔다.

마왕의 새빨간 눈에 천천히 가까워지는 내 얼굴이 비쳤다.

“끼야아아아악!”

마왕의 긴 비명소리가 방을 메웠다.

…….

….

… 오해는 하지 말길 바란다. 엄한 짓은 하지 않았다.

나는 그냥 설교를 했을 뿐이다.

물론 일반적인 설교는 아니고.

군대에서 막노동판까지 전전하며 직접 체득한 꼰대짓들을 좀 풀었다.

“진짜 세상 좋아졌다. 나 때는 말이야. 20살이나 차이가 난다? 겸상도 못 했다 이 말이야. 근데 넌 뭐야. 너 몇 살이야.”

“이, 이몸은 부활한 올해로 142년째 살아가는 중이다만….”

“지금 그게 중요하냐? 하, 요즘 애새끼들은 이래서 문제라니까.”

“아니 그럼 대체 뭐가 중요한… 아, 아니다. 알았으니까 제발 그만하거라! 내가 잘못했으니 그만! 이제 시종이라고 부르지도 않겠다! 용사 나리! 이제 됐냐!”

“잘못했어? 뭐가 잘못했어. 지금 그게 반성하는 태도야? 따박따박 말대꾸나 할 줄 알지 이거… 야, 왜 입 다물어. 대답 안 하지? 아예 무시를 하겠다? 진짜 나 때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새파랗게 어려 가지고 말대답에 씹기까지… 네가 뭘 잘못했는지는 아냐? 모르니까 그러는 거야. 맞아야 정신 차리지. 정신머리가 글러먹었어 아주. 나 때 지금 너처럼 싸가지 없이 했으면 말이야. 그냥 바로 내 밑에 네 위로 다 집합시켜서 그냥….”

“아오 그만 좀 하라니까! 갸아아아악!!”

나와 마왕의 뜨거운 밤은 꽤 길게 이어졌다.

한 5시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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