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나, 강림
우리는 그대로 후퇴했다.
물론 처음엔 그야말로 갑분싸였다.
내가 철군 지시를 내리자마자 수습할 수 없는 싸늘한 분위기로 흘러갔지만.
나라고 설마 아무 생각도 없이 저런 폭탄발언을 했겠냐. 시공회귀 짬이 얼만데.
이때를 대비해서 변명 역시 생각해두고 있었다.
“적들의 경비가 생각보다 삼엄해요. 수도 제 예상보다 훨씬 많습니다. 오늘은 지형과 적의 용태를 본 걸로 만족하고, 더 나은 작전을 짜서 내일 다시 오죠.”
“아니. 하지만 정용 공. 어제도 그렇고 갑자기 철군이라니 대체….”
“제 목숨과 할센베르크의 명운을 건 전투입니다. 불안요소는 최대한 줄이고, 조금이라도 승산을 높여야 해요. 오늘은 날이 아닙니다.”
“… 뭐. 자네가 그리 말한다면야. 알겠네.”
다행히 사람들은 내 말에 곧 순응하고 철군준비를 했다.
정확히는 변경백이 납득하자 레이라는 당연하다는 듯 그 뒤를 따랐고. 설백은 애초에 내 파티 동료라 그런지 얌전히 따랐다.
나중에 성에 도착하고 둘만 남았을 때, 변경백이 내게 넌지시 말했다.
“하지만 역시, 이 철군 지시는 좀 갑작스러운 데가 있군. 너무 부자연스러웠네.”
“… 죄송합니다 변경백님.”
나는 그 말에 아무 대답도 해주지 못했다.
다만 고개를 숙여 사죄할 뿐이다.
하지만 변경백 역시, 그런 나를 보고 더 이상 깊게 추궁하지 않았다.
“이것만은 묻고 싶군. 이 철군이 엘더리치 살해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나?”
“예. 분명합니다.”
나는 확신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22번이나 뒤졌다 살아난 나다. 세상에 나보다 더 이상 죽기 싫은 사람도 없을 거다.
그런 내가 목숨까지 버려가며 건네준 힌트다. 도움이 안 될 리가 없다.
‘엘더리치를 만났던 나는… 분명히 결정적인 무언가를 캐치했을 거야.’
애초에 그럴 때만 망자의 함에 유언을 남길 거라고 생각하던 참이었으니까.
전생의 나도 분명 그랬을 것이다.
‘그러니 오늘과 내일은 분명히 차이가 있다.’
부화가 안 된 알 상태의 마왕과, 부화된 마왕.
둘 사이엔 내가 모르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을 거다.
“음. 알겠네.”
내 태도를 가만히 쳐다보던 변경백은 이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 입으로 두 말은 하지 않음세. 난 자네를 믿겠네.”
“… 감사합니다. 변경백님.”
“그만 들어가서 쉬게. 식사를 같이 하고 싶으면, 언제든 그 설백이라는 처자와 함께 오게나.”
“예.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고개를 조아리는 한 편, 변경백의 호탕한 성격에 새삼 감탄했다.
나 같으면 쿠사리 잔뜩 멕이고 농담 빠냐고 욕부터 박았을 거 같은데. 역시 대인배는 대인배다.
쯧. 나도 모르게 혀를 차고 말았다.
‘착한 놈들 조지게 굴러처먹는 건 이 세상이나 저 세상이나 똑같네.’
이세계까지 왔는데, 세상 참 X같이 살맛 안 난다.
무너져 신음하는 할센베르크의 성벽을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서였다.
뭐 변경백의 기구한 팔자야 어쨌든. 지금 급선무는 알을 부화시키는 거다.
내가 할 건 딱히 없고, 그저 방에서 존버하는 것뿐이다.
그래서 나는 방에 돌아오자마자 배낭에서 알을 꺼냈다.
“어디….”
우웅, 우우웅.
묵빛을 발하며 끊임없이 맥동하는 알. 이젠 배낭에도 잘 안 들어갈 정도로 커졌다.
농담 전혀 안 섞고. 거의 내 상체만했다.
더 무서운 건, 맥동할 때마다 조금씩 무거워지고 커지는 게 느껴진다.
실시간으로 자라고 있다는 소리다.
“이 정도면 진짜 공룡이 태어난다 해도 믿겠는데 이거?”
불사의 마왕은 유체부터 이런 크기라고? 진격의 마왕인가?
내가 감탄사를 연발하며 알을 요모조모 살펴보던 그 순간.
“저 근데… 왜 굳이 이 방에서 그 알을 만지작거리시나요…?”
침대에 다소곳이 앉아있던 설백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 옆에 걸터앉았던 나는 고개를 돌렸다. 설백은 머뭇거리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뭐지, 이 새삼스럽게 쑥스러워하는 반응은.
물론 내가 뜬금없이 내 방이 아니라 설백의 방에 찾아온 게 문제라면 문제지만. 왜 이래 우리 사이에 이제 와서. 우리 동료잖아.
나는 대충 대꾸해줬다.
“혼자 있으면 적적하잖아. 기다리는 동안 심심풀이.”
“기다려요? 뭘요?”
“그런 게 있어.”
“아… 네에….”
설백의 목소리가 눈에 띄게 가라앉았다.
뭐지, 저 실망스러워 하는 반응은. 대체 뭘 기대했길래 실망하는 거냐.
사실 난 아직 얘의 사고방식을 잘 모르겠다. 무협세계에서 온 소녀라 그럴지도 모른다.
우리 좋은 동료 사이가 될 수 있을까? 앞이 좀 캄캄해졌다.
“그런데 이 알은 대체 뭔가요? 무엇의 알이죠?”
설백은 그런 어색한 분위기를 타파하고 싶었는지, 짐짓 밝은 목소리로 내게 대화를 시도했다.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우리가 좀 더 친해지면 알려줄게. 알면 곤란한 물건이야.”
내가 단칼에 거절하자 설백은 표정을 흐렸다.
그녀의 얼굴엔 가득했던 호기심 대신 실망이 자리잡았다.
“그, 그런데 왜 굳이 여기서… 괜히 궁금하게….”
“그것도 그렇네. 나 그냥 나갈까?”
“아뇨! 그, 그런 소리는 아니었어요. 나가지 마세요….”
뭐, 그런 식으로 설백과 노가리를 한참동안 깠다.
그러다 할 얘기가 없어지면 잠깐 침대에 기대서 쉬거나. 물을 마시거나 했다.
이내 설백은 아침에 출정 나가면서 긴장했던 것이 풀렸는지, 병든 닭처럼 곯아떨어졌다.
그대로 시간은 하릴없이 흘러갔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었고. 밥 때가 되어 나는 설백을 깨워 같이 밥을 먹었다.
레이라에게서 얻어온 멀건 수프와 빵. 그리고 야채와 과일 조금이었다.
‘… 이제 곧인데.’
밤이 되었다. 사위가 어두워진다.
시간이 임박했다. 나는 알쪽으로 시선을 주시했다.
[부화까지 남은 시간: 49분]
시간은 6시를 조금 넘겼다.
카운트 다운이 시작된 이래 딱 사흘이 지나는 시점까지 앞으로 약 한 시간.
한 시간 후면 다음 체크포인트다.
그리고 패널이 말한 대로, 그 체크포인트가 바로 알의 부화시점이 될 것이다.
“…….”
나는 숨을 죽이고 알을 가만히 지켜봤다. 그리고 천천히 허리춤의 베스타크에 손을 가져갔다.
‘조금이라도 위협이 될 것 같다 싶으면….’
단칼에 죽인다.
아신 미네르바와 계약한 게 있다고는 하지만. 나는 누가 뭐라해도 내 목숨이 최우선이다.
저 알에서 나온 무언가가 변경백 말대로 터무니없는 괴물이라면, 강해져서 골치 아파지기 전에 내 손으로 쓱삭하는 게 낫다.
옆에서 기웃거리며 같이 보던 설백은 무언가 발견했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어, 아까 밥 먹기 전보다도 커진 거 같은데요?”
“아마 맞을걸. 지금도 커지고 있어.”
“우와… 여, 여기서 더 커지면… 저희도 들어갈 수 있겠어요.”
“그러게나 말이다.”
설백이 감탄하며 알을 슬쩍 쓸어보다가, ‘우우웅’ 하고 시커먼 기운이 흘러나오자 기겁하며 몸을 물렸다.
나는 피식 웃고는 다시 알을 주시했다.
‘진짜 오지게 커지긴 했네.’
설백의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이미 크기가 내 키의 3분의 2를 초월했다. 현재는 성인 하나가 웅크려 있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턱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던 설백이,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말했다.
“대체 뭐가 태어나는 걸까요. 궁금하네요….”
“그러게나 말이다. 나도 궁금해 죽겠다.”
“어? 정용님도 모르세요?”
“정체는 알지만. 그게 어떻게 생겼는지는 나도 몰라.”
“아하… 그렇군요.”
설백은 납득했는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내 옆에 가만히 앉아 알을 빤히 주시했다.
… 그렇게 우리는 한동안 알만 죽치고 쳐다보고 있었다.
“… 언제쯤 깨어날까요?”
“곧.”
“그 곧이 언제일까요?”
“보자… 23분 후.”
“예? 어떻게 그렇게 정확히 아세요?”
“… 그냥 감으로.”
“흐응?”
설백이 ‘개소리 찰지게 하네 이 사람’이라는 표정으로 키득거린다.
다 보인다 설백. 표정관리 좀 하고 살도록.
아무튼 너무 조용하다 싶을 때마다 설백과 놀아주다 보니, 시간은 의외로 잘 갔다.
역시 설백의 방에서 알의 부화를 기다린 건 정답이었다. 그런 잡생각을 하고 있자니.
어느 순간 쩌적,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
“… 방금?”
나와 설백은 동시에 눈을 크게 뜨며 알에 퍼뜩 시선을 박았다.
깨졌다. 알에 금이 가고 있었다. 게다가 힘차게 꿈틀거린다. 깨진 알 속에서 시커먼 빛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다.
입을 쩍 벌린 설백이 내 어깨를 잡고 뒤흔들었다.
“깨, 깨어나요! 알이 깨지고 있어요 정용님!”
“어 그래. 나도 눈 있어. 그만 흔들어. 토할 거 같아!”
알의 꿈틀거림은 점점 거세졌고, 표면의 실금도 거미줄처럼 퍼져나갔다.
삽시간에 전체를 뒤덮었다. 새어나오는 칠흑의 기운이 최고조에 달했다 싶은 순간.
쩌저적!
알은 산산이 부서졌다.
동시에 안에 웅크려 있던 누군가의 신형이 벌떡, 몸을 일으키며 우리 앞에 당당히 모습을 드러냈다.
“아, 응애예요!”
알에서 깨어난 불사의 마왕이 처음으로 내뱉은 말.
그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