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2트 (SECOND TRY)
이른 아침.
눈과 얼음의 평원과, 그 구석에 솟은 언덕 위.
아래로는 언데드 군단이 우글거리는 모습이 한 눈에 보인다.
나는 몸을 숨긴 채 나머지 셋에게 말했다.
“에… 그럼 작전을 다시 한 번 설명하겠습니다. 대충은 다들 알고 있죠?”
변경백과 레이라, 그리고 설백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
“…….”
이 파티의 분위기는 빈말로도 좋다고 할 수 없었는데. 그중에서도 설백과 레이라 사이엔 보이지 않는 장벽이 있는 듯했다.
“…….”
“…….”
두 사람은 서로를 투명인간 취급하고 있었다.
불편한 기류가 여기까지 느껴지지만 차마 화해하라곤 못하겠다. 나만해도 레이라랑 화해하기 싫은데 누가 누굴 나무라냐.
한숨을 쉰 나는 우선은 변경백을 보며 말했다.
“변경백님은 무조건 앞장서서 길을 뚫는 것만 신경써 주십쇼. 길을 뚫어서 엘더리치가 있는 곳까지 도달한 다음엔, 왔던 길 그대로 돌아가서 도망가세요. 저는 신경쓰지 않아도 됩니다.”
“… 정용 공. 역시 그럴 수는 없네. 나도 자네와 함께 끝까지….”
변경백은 주저하는 기색으로 말을 꺼냈다.
내 저럴 줄 알았다. 나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선수를 쳐서 끊어 버렸다.
“변경백님은 행여 작전이 실패했을 때를 대비해서, 여기 두 여자들의 신변을 보호한다는 중요한 임무가 남아있습니다. 뭐 레이디 보호하는 게 기사도 아닌가요? 그거 하세요. 저는 칼손절 하시고.”
“그치만….”
“그치만이고 킹치만이고. 두 여자 목숨이 변경백님 손에 달려있습니다. 아시겠죠?”
“… 알겠네. 그렇게 함세.”
변경백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역시. 전생처럼 효과가 직빵이군.
그런 생각을 하며 나머지 두 사람을 쳐다봤는데, 나도 모르게 한숨부터 나왔다.
두 사람의 불만 가득한 표정을 보니 변경백보다 길어졌으면 길어졌지 짧을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우선 레이라에게 물었다.
“넌 왜 또 그렇게 우거지상이냐?”
“저는 처음부터 이랬는데요.”
“…….”
맞네. 얘 처음부터 불만 많았지.
뭐 입으론 씨불씨불거리지만. 그윈의 추천에 이어 주인인 변경백이 하는 일이니, 아마 맡은 임무를 허투루 하진 않을 거다. 그러길 믿어야지 뭐.
“넌 여기서 대기하다 우리가 진입하면 그때부터 언데드들의 주의를 끌어. 너 잘하는 철구 돌리기 하면 되겠네.”
“말 안 해도 알아요.”
싹퉁머리 없기는. 나는 그녀에게서 고개를 돌려 설백을 바라봤다.
“넌 표정이 왜 그래.”
“저, 그… 제가 하는 일이… 너무 없는 것 같아서요. 제가 짐이 되는 건가 싶어서….”
설백은 주눅든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그녀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무슨 소리야. 네가 얼마나 큰 역할을 맡는데!”
“후방대기 하면서 망보는 게 무슨 큰일이죠?”
“너는 망만 보지만 네 기룡이 나한테 붙어서 밥값하잖아.”
그 말에 설백은 입을 다물었다.
그렇다. 설백은 보조기공사… 쉽게 말해 버퍼다. 그녀가 다루는 기룡은 다른 이에게 붙여서 각종 신체능력을 증강시킬 수 있다고 한다.
이번 싸움에선 그것을 적극 활용할 예정이다. 그녀는 절대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아니다.
게다가 설백이 맡은 막중한 역할이 하나 더 있다.
“저 많은 언데드들을 좀 봐라. 저길 뚫고 나오는데 부상없이 가능하겠냐?”
나는 언덕 아래를 가리켰다.
거기엔 수백, 아니 수천에 달하는 각양각색의 언데드들이 꿈틀거리며 제각기 광기어린 행동들을 하고 있었다.
―기에에에에!
―카아아아악!!
서로 싸우고 잡아먹는 무리가 있는가 하면, 하늘을 보며 의미없이 괴성을 지르는 언데드 무리도 있다. 보고 있기만 해도 정신이 이상해질 것 같았다.
설백은 잠깐 지켜보다 몸서리치며 눈을 돌렸다. 나는 그 때에 맞춰 그녀에게 말했다.
“만약 실패해서 도주할 일이 생기면. 부상자가 있을 경우 도망갈 때 속도가 많이 느려질 거야. 그러지 않게 네가 곧장 기룡으로 치료해줘. 알겠어?”
“… 네. 알겠어요. 저만 믿으세요.”
설백은 그제야 자부심이 생겼는지 화색을 띄며 고개를 끄덕였다.
은근히 출연욕심이 있는 여자였네. 그렇게 안 생겨가지고.
어쨌든 나는 먼저 설백에게 손을 뻗었다.
“그럼 시작하자. 기룡을 붙여줘.”
“네.”
설백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장 기룡을 소환했다.
그녀가 뭐라 속삭이자 기룡이 고개를 슬쩍 끄덕이더니 내 쪽으로 쪼르르 날아와 몸에 스며들었다. 에테르와는 또 다른 느낌의 싸늘한 청량감이 몸을 감싸고 돌았다.
‘와 X발. 호랑이 기운이 솟아난다는 게 이런 느낌인가.’
모 씨리얼 광고의 문구가 공감될 정도다. 그만큼 엄청난 힘이 내 핏줄을 타고 흐르는 게 느껴졌다.
마음의 준비를 마치고 나갈 타이밍만 기다리고 있는데. 문득 뒤에서 레이라가 물었다.
“하나 물어볼 게 있는데요.”
“음? 뭔데.”
“왜 하필이면 지금 시간으로 정한 거죠?”
“아. 그건….”
반사적으로 대답하다가 아이러니함에 순간 피식 웃었다.
전회차엔 변경백. 이번에는 레이라가 묻는 건가. 새삼 사람이 늘었다는 실감이 들었다.
나는 히죽 웃으며 중얼거렸다.
“보험 갱신 때문에.”
[불사의 회귀점이 갱신되었다.]
[일시 - 미텔란트 왕국력/547년, 12월 21일, 아침 7시]
[장소 - 할센베르크 영지 북쪽 변경, 눈의 평원]
[알림 - 불사의 마왕이 부화에 임박했다.]
[알림 ― 불사의 마왕이 완전히 부활할 때까지 12시간에 한 번씩 회귀점이 갱신된다.]
시간이 되었다.
나는 곧장 마지막 준비를 시작했다.
“진짜 이번에야말로 볼 일 없어야 되는데….”
나는 익숙한 몸놀림으로 배낭을 뒤져 망자의 함을 꺼냈고. 신속하게 사망보험(?)을 갱신했다.
'준비는 끝났다.'
이젠 돌격할 일만 남았다. 나는 곧장 에테르를 들이켰다.
저번 실패로 공격력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그래서 바람과 땅의 에테르를 하나씩 빼고 불의 에테르도 충전해 놓은 상태였다.
‘이번엔 풀 도핑으로!’
나는 세 가지 에테르를 동시에 빨아들였다.
몸 주위를 맴도는 가벼운 감각을 음미한 뒤, 곧장 변경백에게 눈짓했다.
“갑시다, 변경백님!”
“알겠네!”
우리는 동시에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언덕의 끝자락을 힘껏 박찼다.
“가즈아아아아!”
“하아아아압!”
괴성과 기합을 지르며 평원 아래로 수직낙하한 우리는 그대로 콰앙, 지면에 착지했다.
스르릉! 검을 뽑아들었다.
수많은 언데드 무리들을 향해 두 개의 쐐기가 맹진했고.
“하앗!!”
퍼버버벅!
별안간 기합과 함께 파육음이 울렸다. 변경백이나 내가 낸 것이 아니었다.
―쿠에아아악!
순식간에 우리의 앞길을 막던 언데드의 일부가 그 자리에서 찌부러졌다. 나와 변경백은 얼떨떨하게 눈앞의 광경을 쳐다봤다.
거대한 철구가 연신 날아들며 언데드들의 시선을 끌어내고 있었다.
“빨리 가세요!! 오래 시간 끌진 못해요!!”
레이라는 우리와 반대편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빗자루가 사방으로 휘적일 때마다 번득이는 검광이 비쳤다. 그리고 하급 언데드들이 어김없이 일도양단된다.
‘좋아. 톡톡히 밥값 하네!!’
비협조적인 여자라 걱정했는데, 기우였던 모양이다. 꽤 많은 하급 언데드의 이목이 레이라로 쏠려 동선이 훨씬 자유로워졌다.
전회차를 직접 경험했던 나였기에 그 차이가 더욱 어마어마하게 다가왔다.
“지금입니다! 돌격하죠 변경백님!!”
“물론!!”
서걱, 파각, 우드득!
하나의 쐐기처럼 우리는 진형의 중앙으로 파고들어갔다. 파육음이 연신 울리며 우리들의 진격을 알렸다.
주변의 언데드 특유의 무리가 나무 긁는 소리를 내며 우리에게 달려들었다.
―쿠에아아악!
―키아아악!
언데드들은 전생이나 이번 생이나 반응이 한결 같았다.
기습적으로 치고 들어온 우리들에게 우왕좌왕하지 않고, 올곧게 우리의 생살을 씹어먹으려 일제히 달려들고 있었다.
“으음! 역시 엄청난 수로군!”
앞서 나가며 섬전처럼 언데드들을 베어 넘기던 변경백이 문득 외쳤다. 나도 연신 언데드들을 베어넘기고 있었지만 실감이 나고 있었다.
‘제길… 또 느려졌나?!’
전보다는 확실히 한참 더 진격했다.
하지만 앞을 메우는 언데드들은 점점 빽빽해지고, 우리의 진격속도는 기하급수적으로 줄어갔다.
아직 전생에서 막혔던 데스 비숍조차 나오지 않았다. 벌써 이렇게 정체되면 곤란해!
내가 입술을 깨물며 초조해하던 그 때.
“엎드리시게 정용 공!”
별안간 변경백이 앞에서 달려드는 구울 다섯 마리를 동시에 베어넘기더니, 이내 검을 집어넣고 허리춤에 차고 있던 지팡이를 꺼내들었다.
지팡이 앞에 붙은 새빨간 보석이 시퍼런 번개를 낼름거리기 시작했다.
‘저건…!’
시야를 물들이는 새파란 번개. 그리고 불길하게 일러이는 새빨간 보석.
나는 변경백이 하려는 짓을 눈치챘다.
“로터스 렐람파고!”
파지지직!
순간 눈이 멀 것만 같은 섬광과 함께 굵직한 번개줄기가 수십 가닥으로 뻗어나갔다.
번개는 공기와 언데드들을 태우며 미친 듯이 사방을 지지기 시작했다. 도처에서 비명과 살갖 터지는 소리가 울린다.
번개로 피어난 꽃밭이었다.
아름답지만, 그것이 남긴 파괴현장을 보면 등골이 섬뜩하다.
‘X발 두 번째 봐도 믿기지가 않네….’
지금까지 변경백이 사용했던 마법과는 한 차원 다른 궁극의 마법.
나는 초토화된 주위를 둘러보며 혀를 내둘렀다.
“역시 변경백님! 지엔장 믿고 있었다고!!”
나는 변경백에게 엄지를 치켜세웠고.
변경백은 힘겹게 웃으며 스태프를 다시 허리에 꽂았다.
“후우. 고대마법은 역시 만만치가 않군.”
나는 변경백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생각해 보면. 변경백은 전생에서 저 마법을 사용한 여파로 탈진했었던 것이다.
'설마, 이번에도…?!'
나는 즉시 변경백의 상태를 자세히 훑었다. 그리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변경백은 숨이 거칠어졌지만 아직 버틸만한 모양새였다.
“뭘 멀뚱히 서있나. 어서 가지!”
“… 아, 아!”
오히려 내게 진격을 재촉한다. 아무리 봐도 당장 쓰러질 체력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바뀌었다. 내가 겪었던 그 시나리오가 깨졌다!
‘… 좋아. 이대로 돌파한다!’
나는 주먹을 불끈 쥐어준 뒤, 곧장 변경백의 뒤를 따라붙었다.
그리고 호기롭게 외쳤다.
“아직 멀었습니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갑시다!”
“알겠네!”
우리는 그렇게 파죽지세로 전진해 나갔다.
우려와는 달리 진격은 갈수록 가속도가 붙었다. 언데드를 베어 넘기는데도 노하우가 쌓이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왼쪽! 구울 둘 죽이고 다음 놈은 그냥 맞는다!’
정확히 효율적인 경로를 찾아 필요한 놈만 죽이고. 나머지는 갑옷을 믿거나, 땅의 에테르가 부여한 방어력을 믿는 전략으로 나아갔다.
미친 듯한 속도였다. 우리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듯했다.
―숨쉬는… 살덩이들… 이곳까지… 찾아오다니….
시커먼 주교 복장에 해골 스태프를 든 좀비들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걸로 두 번째 만남이다.
나는 놈들을 보며 사납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