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그녀의 약점
이번 실패로 통감한 것은 당연히 이것이다.
‘동료! 전력! 아무나 좋으니까 사람 긁어 모아!!’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린 건 당연히 설백이었다.
나의 동료. 선임 용사이자, 이 세상 와서 사귄 첫 번째 친구.
전투는 특기가 아니라고 했지만, 그렇다고 못한다고는 안 했다. 게다가 치유력이 화타급인 투명드래곤(?)까지 악세사리로 달고 다닌다.
개똥도 약에 쓴다는데 말이야.
이렇게 쓸모가 많은 설백을 ‘아직 몸 상태가 불안정해서' 따위의 시답잖은 이유로 작전에서 제외했다니.
지난 생의 나는 어깨 위 허전할까봐 대가리를 달고 다녔나 싶다.
“설백! 도움!”
단도직입. 쇠뿔도 단김에 빼라지.
나는 설백의 방문을 벌컥 열며, 맡긴 물건 찾듯이 구조를 요청했다.
전후사정 앞뒤양옆도 없는 개뜬금포 발언이었다.
“어… 네, 네. 뭔진 모르겠지만 정용님 일이면 무조건 도와야죠.”
하지만 설백은 고기 스튜를 퍼먹다 말고,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 보험광고 마냥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나를 도와주기로 나선 설백. 나는 레이라 몰래 고기 스튜를 한 냄비 더 갖다주는 걸로 감사를 표했다.
설백은 언제나처럼 '제가 무슨 돼지인가요!'라며 내숭을 떨었지만. 결국 받은 냄비는 깨끗하게 비웠다.
역시 몸은 솔직하다니까.
‘설백은 됐고. 그럼 남은 건….’
현재 상대전적 0킬 18데스 3어시스트를 기록하고 있는 여자.
그 이름은 레이라.
띠껍고도 띠껍지만. 결국 나는 레이라에게 다시 찾아가야 했다.
‘X벌창… 목 마른 놈이 우물 파야지 별 수 있나….’
그렇다. 결국 전력이 아쉬운 건 레이라가 아니라 나다.
레이라가 일반 시녀 치곤 지나치게 강한 건 팩트고. 지금은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하는 상황이다. 똥오줌 가릴 처지가 아니다.
‘하지만 나도 쫀심이 있지.’
전형적인 호구 특징 중 하나. 뭣도 없는 주제에 자존심은 있다. 나처럼.
이미 레이라에겐 들이대봤다가 한 번 차였다. 꼴에 자존심은 있어서 이번 생까지 굽히고 싶지도 않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상대의 약점을 파고든다.’
그래서 난, 다른 때도 아니고 레이라가 식사 준비로 바쁜 바로 지금을 노렸다.
‘그녀’가 아니라, ‘그놈’을 노렸다.
“안녕하십니까. 선임.”
“…… 무슨 일로 왔지.”
축축하고 음습한 지하감옥.
나는 거체의 남자가 갇혀있는 창살 속을 가만히 쳐다봤다.
나의 협상 상대. 선임 용사 그윈.
그도 가만히 나를 마주본다. 내 의중을 파악하려는 듯하다. 붉은 안광이 섬짓하게 나를 훑더니.
이내 피식, 낮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부탁할 거리라도 있는 얼굴이군.”
“족집게시네. 원래 세상에선 무당이셨나?”
“무슨 부탁인진 모르겠으나, 포기해라. 나는 광인이다. 언제 정신을 잃을지 나조차도 몰라. 하루에도 수십 번씩 정신을 잃는다.”
“나도 들어서 아니까 괜찮수다. 당신은 그냥 수단이고. 진짜 부탁할 거리는 당신 여자친구한테 있으니까.”
여자친구. 레이라가 언급되자 그윈의 얼굴은 순식간에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그야말로 광인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살기등등한 표정이다.
“나는 이 감옥을 나가지 못해서 갇혀 있는 게 아니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라도 벌어진다면…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그윈이 안광을 흉흉하게 뿌리며 협박한다. 당장이라도 내 뼈를 잘근잘근 씹어먹을 기세였다.
아주 X발 깨가 쏟아지는군. 애인 없는 놈은 서러워서 살겠냐?
나는 피식 웃어넘기고는 철창 너머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나는 지금부터 엘더리치를 사냥할 겁니다.”
“……!!”
“그러니 그 사냥에 당신 애인 좀 끌어들여 주십쇼. 내가 부탁할 건 그겁니다.”
그윈의 눈이 부릅뜨였다. 어둠 속에서 붉은 눈이 한동안 나를 훑는다.
하지만 그의 경악 어린 시선은 이내 조롱으로 바뀌었고. 나중에는 경멸까지 추락했다.
“나는 내가 지금껏 광인인줄 알고 있었거늘. 진짜 광인이란 네놈 같은 것을 말하는 거였군.”
“요즘 미친놈 소리 자주 듣네. 커플이 쌍으로 지랄하니 두 배로 빡쳐요. 알아?”
사람들이 어째 꿈과 희망이 없냐.
솔직히 이제 이런 취급도 지겹다. 좀 짜증나려고 해. 엘더리치 잡겠다는 소리만 하면 바로 미친놈 취급을 해버리니.
너희들은 그렇게 발상이 빈약해서 아직도 엘더리치한테 발발 기는 거다.
“자꾸 그렇게 무시하는데 말이야. 내가 진짜 해내면 어쩌시려고?”
“할 수 있으면 해봐라. 기꺼이 네놈의 개새끼가 되어주마.”
“당신 그 말 죽을 때까지 후회할 거야.”
“헛소리.”
“헛소리인지 옳은 소리인지는 나중에 개사료 드시면서 체감하시고.”
“…….”
“어쨌든 설득해준다는 거 맞죠? 나 그럼 당신만 믿고 갑니다?”
근본없이 무럭무럭 용솟음치는 내 자신감에서 이상을 느낀 것일까.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자니, 문득 그윈이 물어왔다.
“… 비장의 수라도 있나?”
“있긴 하지.”
“그게 뭐지.”
“안알랴줌.”
내가 너무 당당하게 거절해서인지, 그윈은 분노보다도 황당함을 면전에 띄웠다.
“지금 나와 장난하자는 건가.”
그가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철그렁! 태산만한 거구가 천천히 내쪽으로 다가오더니 철창을 콱 잡는다.
“…….”
“…….”
가까이서 보니 키가 거의 내 두 배만했다.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구나. 하긴 저 사람도 이세계인이니까. 거인종 같은 건가?
솔직히 좀 쫄았다. 아니 많이 쫄았다. 최대한 태연한 척을 하고 그윈의 시뻘건 눈동자를 마주했다.
“내가 네놈에게 살의를 품는 순간, 나는 나를 제어할 자신이 없다.”
“전처럼 레이지 모드 켜시게?”
“그 때는 레이라가 있어서 가까스로 철창을 부수지 않고 제어했지. 하지만… 지금은 없다.”
당장이라도 내 모가지를 쥐어 비틀 수 있다고 하신다.
그냥 그렇게 말하면 될걸 뭐 저리 돌려 말하냐. 정치인 청문회 하냐.
내가 한심하게 쳐다보자 쾅! 온 감옥이 울리는 소리가 나도록 그윈이 철창을 후려쳤다.
그리고 서슬퍼런 살기와 함께 내게 말했다.
“네놈은 나를 협박하고 있는 건가?”
“뭔 또 협박입니까. 그냥 제안하는 거지. 정용코인 탑승하시라고.”
“… 그게 무슨 소리냐.”
이런. 답답해서 나도 모르게 전문용어가 나와버렸다.
어쨌든 나는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그윈에게 따박따박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당신이 날 못 믿는 것도 이해합니다. 여기 사정은 다 들었어요. 파란만장하시던데.”
“… 레이라가 쓸데없이 입을 놀렸군.”
“그러니까 난 애초에 당신이 날 믿게 만드는 걸 포기한 겁니다.”
“그건 어째서인가.”
“당신. 내가 무슨 개지랄을 하든 끝까지 나 안 믿을 거잖아.”
“…….”
그윈은 입을 다물었다.
그렇겠지. 그게 사실일 테니까.
나는 오히려 때려보라는 듯이 그윈에게 다가가, 머리를 들이밀었다.
“내가 잘못 봤습니까? 막 나에 대한 신뢰가 자라나는 꿈나무의 꿈처럼 샘솟아요?”
물론 여기서 그윈이 줫돼 보라고 한 대 후려치면. 아마 그대로 모가지 오도독 돌아가서 숨질 확률도 있다.
아직도 그윈의 스탯이 안 보이는 걸 봐선 육체 성능 차이가 현저할 테니까.
“…….”
“…….”
하지만 설득은 원래 쇼다.
내가 당당하다는 걸 보여줘야 상대는 나를 물로 보지 않는다. 리스크 감수는 어쩔 수 없다.
이건 호구인생 24년차가 체득한 내 나름의 인간론이고.
―왜 그런 눈으로 보세요?
―이건 제가 배신한 게 아니에요.
―애초에 전 당신을 믿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거든요.
… 당신 애인이 여기 하수도에서.
21번에 걸쳐서 알려준 할센베르크식 대처법이기도 하다. 그윈.
“…… 크, 으음.”
그윈은 순간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하지만 이내 서서히 주먹을 내리고 나를 가만히 주시했다.
예상대로라면 예상대로지만. 일단 다행이다.
그대로 뚝배기 박살나면 어쩌나 조마조마 했다.
내가 안도의 한숨을 쉬는 찰나. 그윈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제야 비슷해진 눈높이로 그윈이 입을 열었다.
“… 내가 믿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이런 제안을 한다는 건가.”
“예.”
“정말로… 믿는 구석이 있는 것인가.”
“예.”
말투도 눈빛도 전보다 부드러워져 있었다.
아니. 부드러운 게 아니다. 미친 듯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나는 회심의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가까스로 막아냈다.
“그것이 거짓말일 가능성은?”
“솔직히 진짜일 가능성보단 훨씬 높죠?”
변경백의 설득에도 애먹었던 부분이다.
증거를 보여줄 수 없으니 내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지 못하는 점.
그래서 난 거짓말을 절대 하지 않았다.
그래야 믿을 건덕지도 없는 내 말에 조금이라도 신뢰가 생길 테니까.
‘바로 여기다.’
나는 직감했다.
결정타를 먹여야 한다. 그윈의 주저와 불신을 희망과 기대로 바꿔야 한다.
바로 여기서, 내가 한 마디 얹어서 뒤집어야 한다.
“까놓고. 난 당신한테 믿음을 줄 수 없어. 당신한테 줄 수 있는 건 다른 겁니다.”
“… 그게 뭐지?”
“할센베르크의 미래와 레이라의 미소.”
“…….”
이 X발, 내가 뱉었지만 토악질 나오는군.
이번 건 솔직히 내 대가리 터뜨려도 인정한다. 아니 제발 터뜨려줘 그윈.
오글거려 뒤지겠다. 손발이 시공의 폭풍으로 빨려들어가는 느낌이다.
'참자. 정용아 또 뒤지고 싶어? 슬픈 생각해.'
하지만 꾹 참고 진지한 표정을 유지했다. 식은땀을 숨기고 그윈에게 신뢰의 눈알광선을 미친 듯이 쏘아보냈다.
그런 내 똥꼬쇼에 하늘이 탄복한 것인가.
“…… 크으.”
그윈이 낮은 신음을 흘렸다.
그윈의 눈빛에는 점점 주저가 어리기 시작했다. 흉흉한 붉은 안광이 정처없이 허공을 떠돌길 잠시.
“… 정말로.”
순간적으로 그윈의 두 눈동자에 새파란 총기가 돌아왔다.
나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
“정말로. 레이라에게 웃음을… 되돌려줄 수 있나.”
“예.”
“수 년… 아니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너무나 많은 상처를 줬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나는 할 수 있습니다.”
그만. 여기까지.
더 많이 말해봤자 내 밑천만 드러난다. 박수칠 때 떠나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나는 보란 듯이 등 돌려 걸어갔다. 일부러 감옥에 발소리가 울리도록 똥폼을 있는대로 잡았다.
“날 믿지 않는 건 자유입니다. 다만 선택은 당신 몫입니다.”
마지막 한 마디까지. 존나 멋졌다 정용아.
나는 속으로 건배를 올리며, 천천히 그윈을 뒤로하고 멀어졌다.
그윈은 어두운 감옥 안에서 한참을 혼자 침묵에 잠겨 있었다.
…….
….
… 그래서 결과가 어떻게 됐냐고?
어떻게 되긴.
“당신… 용사!! 대체 그윈한테 무슨 바람을 불어넣은 거야!”
그날 저녁.
체크포인트 갱신이 끝나기 무섭게, 내 멱살을 쥐어채러 온 레이라의 반응을 보면 알 수 있다.
작전은 대성공했다.
평소 무표정은 온데간데 없이 울그락불그락한 레이라의 얼굴을 보니, 10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듯했다.
개비X콘 광고의 할아버지가 이런 느낌이었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