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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417413번째 소울라이크 용사-37화 (13/280)

37화 리트다, 리트!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할센베르크 성이었다.

나는 알현실 한복판에 다시 나타난 상태였다.

“… 왜죠.”

한동안 멍하니 땅만 쳐다보며 주저앉아 있자니. 문득 머리 위에서 그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

고개를 들어보니 레이라가 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성 안으로 소환된 마력을 감지했거나. 기척을 감지한 것이리라.

그녀의 오른손에는 이미 질리도록 봤던 빗자루 칼날이, 그리고 왼손에는 거대한 철구가 들려있었다.

이번 생에선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습이지만.

배경을 하수도로 바꿔보면 빌어먹게 익숙한 모습이기도 했다.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부터 나왔다.

“이런. 몰래 간다고 몰래 갔는데. 내가 어디갔는지 다 들켰나 보다?”

“왜 당신 혼자 돌아왔나요?”

그녀는 울고 있었다.

키이잉! 눈물을 줄줄 흘리며 내 목에 밧자루 칼날을 들이밀었다.

나는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칼날을 한 번 슬쩍 보고. 칼날보다 더 날카로운 레이라의 시선을 마주했다.

레이라가 내 대신 증오에 찬 목소리로 말문을 텄다.

“어젯밤. 주인님이 당신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더군요.”

“…….”

“당신은 정말 특별한 사람이라고. 어쩌면 그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용사… 우리를 이 지옥에서 구원해줄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런 확신이 든다고. 그렇게 배신당했지만… 이번에도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고 말았다고.”

“…….”

“그러더니 오늘 아침, 두 분이 사라지셨어요. 노심초사 기다리고 있었는데, 방금 전에 언데드 소굴인 북방에서 갑자기 엄청난 고대마법의 파동이 감지되었죠.”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할 수가 없었던 거다.

내가 입을 뻥긋만 해도 그녀가 칼날을 휘둘러 내 모가지를 썰어버릴 분위기였으니까.

“… 그래. 그렇게 된 거였군.”

나는 홀로 중얼거리며, 천천히 셔츠의 앞섶을 찢었다. 그리고 거기에 무언가를 휘적휘적 써넣기 시작했다.

해진 셔츠와 피는 필기구로 적합하진 않지만. 내 앞의 누구 덕택에 혈서가 익숙해져 버렸지.

셔츠자락에 금세 글자들이 완성되어갔다.

“… 말하실 생각은 없나요?”

내가 혈서를 완성해갈 때쯤.

푸욱! 기습적으로 내 왼쪽 어깨에 칼날이 꽂혔다. 나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퍼뜩 몸을 일으켰다.

후두둑. 레이라가 칼날을 뽑자 선혈이 새어나왔다. 그녀는 무감각하게 칼날의 피를 털어냈다.

그리고 씹어뱉듯이 중얼거린다.

“주인님의 마지막 신뢰에 대한 대가가 이건가요?”

“…….”

“용사들은… 이계인들은 어디의 누구든 다 이런 식인가요?”

“…….”

“대체 저한테서 얼마나 뺏어가야 만족하는 건가요?”

내가 계속 침묵으로 일관하자, 레이라는 곧 대화가 영양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다.

순간 그녀의 신형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카아앙!

검과 검이 맞붙었다.

내 배때지를 몇 번이나 꿰뚫었던 검은, 의외로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쉽게 막혔다.

“왜! 당신들은! 대체 왜!! 왜 우리를 가만히 놔두지 않는 거야!! 대체 왜!!!”

레이라가 괴성을 지르며 야수처럼 달려들었다. 그러나.

채앵, 챙, 채챙! 그녀의 무수한 공격은 내가 들어올린 베스타크 너머로 단 하나도 닿지 못했다.

일방적인 전투의 양상에 오히려 내가 놀랄 정도였다.

“이잇!”

레이라의 공격이 훤히 보였다. 공격이 빗나갈수록 점점 격해지는 그녀의 감정까지 확실히 전해져 왔다.

나는 체력을 최대한 아끼며 레이라의 공격을 유려하게 흘려냈다. 한쪽 어깨를 이미 내준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와 나의 격차는 확연했다.

수십에 달하는 레벨 차란 이 정도의 차이구나. 그걸 실감했다.

“죽어버려!!!”

어느 순간. 그녀는 빗자루 공격을 그만뒀다.

철구를 허공에 빙빙 돌리더니, 내 면상을 향해 던졌다. 철구가 파공성을 내며 순식간에 시야에 들어찼다.

나는 베스타크를 천천히 수직으로 들어올렸고.

“세븐 소드 피어스.”

피피피핑!

일곱 방향으로 마력검을 동시에 사출했다. 동시에 나는 곧장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레이라가 내지른 철구는 이미 내 베스타크로 반토막이 난 상태였다.

“이… 비겁하게!”

레이라는 철구의 사슬을 즉각 놔버리고 재빠르게 마력검들을 피해나갔다.

파지지직! 검이 꽂히는 곳마다 스파크가 튀며 존재감을 발산했다.

레이라는 기예에 가까운 몸놀림으로 가까스로 마력검을 피해냈지만, 결국 마지막 하나가 그녀의 오른쪽 허리를 할퀴고 지나갔다.

푸학. 선혈이 허공에 흩날린다. 레이라가 고통 때문인지 순간 균형을 잃고 바닥에 엎어졌다.

“크흣… 이, 이게….”

철구를 일도양단함과 동시에 일곱 방향에서 쏟아지는 공격.

이게 세븐 소드 피어스… 변경백의 스킬이 가진 사기성 중 하나다.

검기에 가까운 기술이지만. 검을 휘두르는 방향과 마력검이 쏟아지는 방향은 아무런 상관이 없거든.

마검사인 변경백만이 사용할 수 있는…. 아니.

그가 없는 지금은 나만이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이지.

“아직… 난, 아직…!”

이를 악문 레이라가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지만.

키이잉! 이번엔 내가 그녀의 목에 베스타크를 들이밀었다.

“…….”

“…….”

상황이 아까와 정반대군.

나는 아이러니함에 피식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저으며 검을 내렸다.

순간 레이라는 눈썹을 튕겼고. 이내 날 바라보는 시선에 굴욕과 증오가 어렸다.

“… 동정이라면 사양하겠어요. 죽이시죠.”

레이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래도 내가 자기를 동정한다고 생각하는 듯싶다.

오해하지 마라. 자길 21번 죽인 년을 동정할 정도로 호구는 아니다.

그건 이미 호구가 아니라 저능아지.

나는 미친사람처럼 실실대며 그녀를 가만히 쳐다봤다.

그리고 말했다.

“내가 미쳤냐. 난 그냥 귀찮은 일이 싫을 뿐이야.”

“…… 귀찮다고요?”

“널 죽이는 건 아무 의미가 없어. 어차피 없었던 일이 될 텐데.”

“없었던, 일?”

순간 레이라의 눈동자에서 걷잡을 수 없는 살기가 터져나왔다.

분노 때문인지 레이라의 손은 미친 듯이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그 손으로 시커먼 검신을 힘껏 쥐었다.

레이라의 손바닥이 찢어지며 피가 줄줄 새나왔다. 그러나 아랑곳 않고 그녀는 내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없었던 일이 될 리 없잖아. 네놈들의 행패도. 이 성의 몰락도. 그윈이 미친 것도! 마님이 죽어버린 것도!! 그리고! 주인님이 돌아가신 것도!!!”

쇄애액! 레이라의 일갈과 함께 빗자루 칼날이 날아왔다.

나는 그것을 무심하게 쳐다봤다,

여기서 내가 베스타크를 쥔 손에 힘을 살짝만 주면. 그녀의 손가락과 함께 저 여리한 목이 뎅겅 날아갈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녀가 내지른 최후의 일격을 막아내겠지.

‘탈출하기엔… 지금만한 타이밍이 없다.’

레이라도 죽이고. 변경백도 없다. 이 성을 나가고자 하면, 나를 막을 이는 아무도 없다.

전설급 난이도의 퀘스트를 거의 거저먹을 비장의 찬스다.

‘레이라. 빌어먹을 하수도 살인마.’

넌 X발, 나 같은 호구새끼 봉 잡은 걸 천만다행인줄 알아라.

―미안해하지 말게.

―한 때나마 할센베르크의 미래를 꿈꿨으니.

… 내가 미안해하지 말라고 하면 더 미안해지는 정신병자만 아니었어도. 너희는 지금 나한테 칼손절 당했을 거고.

이런 선택을 하지도 않았을 거다.

“…… 어?”

한동안의 침묵 후. 레이라가 오히려 눈을 부릅떴다.

그녀가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당신… 왜….”

본인이 생각해도 너무 무방비한 일격이었을 것이다. 반격당해서 죽는 자신의 최후를 상상하고 있었겠지.

하지만, 짜잔? 세상에 절대란 없는 법이다.

“… 씨… 바… 알….”

아프긴 더럽게 아프군. 근데 또 쑤셔진 게 익숙한 느낌이라 기분이 두 배로 나쁘다.

나는 가슴을 관통한 빗자루 칼날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왠지 그리운 느낌까지 들었다.

한 달 만이구나. 이렇게 칼빵 맞고 돌아가는 건.

돌아보니 시간 참 빨랐다. X발.

“왜… 대, 대체… 어, 어째서…?”

레이라는 자기 손에 흥건하게 묻은 피를 보며 중얼거렸다. 아마 자기 피도 있을 거고, 내 피도 있을 거다.

나는 그녀의 혼란스러운 눈을 보며 무슨 말을 할지 고민하다가.

“이렇게 되기 싫었으면. 데이트신청을 받아줬어야지 씨불련아.”

“… 뭐, 뭐?”

욕이나 시원하게 한 번 박고 가기로 했다.

나는 사력을 다해 히죽 웃었다.

“다음엔 비싼 척하지 마라… 씨… 불….”

힘차게 뻗은 내 가운데 손가락을 마지막으로, 시야가 아득해졌다.

차갑다.

21번째 죽음의 감각은 그것이었다.

* * *

[불사의 회귀점이 갱신되었다.]

[일시 - 미텔란트 왕국력/547년, 12월 20일, 아침 7시]

[장소 - 할센베르크 영지 북쪽 변경, 눈의 평원]

[알림 - 불사의 마왕이 부화에 임박했다.]

[알림 ― 불사의 마왕이 완전히 부활할 때까지 12시간에 한 번씩 회귀점이 갱신된다.]

시간이 되었다. 나는 곧장 마지막 준비를 시작했다.

“웬만하면 이걸 볼 일이 없길 바라지만….”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배낭을 뒤져 망자의 함을 꺼냈다.

그리고 눈을 크게 떴다.

[아이템 정보]

[명칭: 망자의 함]

[알림: 아이템 갱신 - 전생에서 망자의 함 저장 아이템이 갱신되었다.]

“…… 어랍쇼.”

나도 모르게 들고 있던 쪽지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한참을 멍하니 있던 나는 불길한 빛을 뿜는 망자의 함을 열어봤다.

거기엔 내가 방금 넣으려 했던 쪽지가 이미 들어있었고. 그 위로 휘갈긴 또 다른 쪽지가 들어있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두 쪽지를 펼쳤다. 거기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하던 거 접고 일단 알현실이나 다시 가봐라.

그것은, 아마도 실패한 내가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었던 유언일 것이다.

“…….”

실패했구나.

그것을 읽고 직감했다.

나는 도전했지만 실패했다. 그래서 망자의 함 아이템이 바뀌어 있는 것이다.

애초에 그럴 용도로 쓰기로 했으니, 전생의 나도 똑같을 것이다.

‘… 그런데 알현실에는 왜 가라는 거지?’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토는 달지 않았다.

아무렴 전생의 내가 목숨을 걸고 써놓은 힌트다. 거기에 장난이나 농담이 있을 거라곤 생각하기 힘들다. 난 그정도까지 일류 마인드가 아니다.

결국 나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는 변경백에게 돌아섰고.

“저… 변경백님.”

“음. 언제든 저 원수놈들을 도륙할 준비가 되어있네!”

“그… 일단은 한 번 철수하죠.”

“…… 응?”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으며 빤스런 제의를 해야만 했다.

다행히 변경백은 준비가 부족한 것 같다는 허술한 변명을 묵인해줬다. 결국 우리의 습격 계획은 내일, 같은 시각에 벌이는 것으로 미루어졌다.

그는 아쉬움이 잔뜩 남는 얼굴로 성으로 돌아왔고. 나 역시 미안한 마음과 함께, 불안한 마음으로 알현실에 도착했다.

그리고 거기에서 목격했다.

잔류사념과 함께 떡하니 남아있는 내 싸늘한 주검을.

웬걸. 몸이 기억하는 빗자루 칼날의 관통상이 명백한 사인이었다.

“으오호로롤로롤!!”

오랜만에 봐서 눈깔 뒤집어지도록 놀랐다. 변경백은 물론이고 알현실 밖에 있던 레이라까지 깜짝 놀라서 찾아왔을 정도였다.

알현실 한복판에 널려있는 내 시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엄청나게 고민했지만.

“대, 대체 왜 그리 소리를 지른 겐가? 귀신이라도 봤나?”

“어… 예? 아니, 여기 이거… 안 보이세요?”

“대체 뭘 보고 말하는 겐가?”

그렇다.

그들에게는 내 시체가 보이지 않는다. 오직 나에게만 보이는 것이다.

어리둥절한 그들의 얼굴을 보고 가까스로 정신을 추슬렀다. 나는 여러 이유를 대서 잠시 알현실에 혼자 있고 싶다는 뜻을 전했고. 변경백은 흔쾌히 허락했다. 지금이 낮이라 그나마 다행이었다.

“… 후우.”

잠깐 심호흡을 하고. 나는 이자나미의 심장을 천천히 잔류사념에 가져다댔다.

“크윽…! 끄아아악….!!”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고통과 기억의 격류.

나는 여느 때처럼 바닥을 구르며 고통에 몸부림쳤다. 신음은 최대한 틀어막았지만, 격한 숨소리와 최소한의 소음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정용 공! 괜찮은가?! 앓는 소리가 계속 들리네만…!”

그리고 내가 기억을 수복함과 동시에 걱정스러운 얼굴의 변경백이 다시 알현실에 입장했다.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지친 눈으로 변경백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던 나는….

“…… 인생 미련하게 좀 살지 마십쇼.”

벼르고 벼른 꼰대 멘트와 함께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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