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비장의 카드
“흐으음.”
나는 방에 가만히 앉아서 눈앞에 떠오른 칠흑의 패널을 가만히 주시했다. 회귀점… 즉 시공회귀의 세이브 포인트(?) 갱신 시간이 돼서 나타난 것이다.
[불사의 회귀점이 갱신되었다.]
[일시 - 미텔란트 왕국력/547년, 12월 19일, 저녁 7시]
[장소 - 할센베르크 성, 기사 세자르의 방]
[알림 - 불사의 마왕이 부화에 임박했다.]
[알림 ― 불사의 마왕이 완전히 부활할 때까지 12시간에 한 번씩 회귀점이 갱신된다.]
한 손에는 연신 불길한 빛을 뿜어내는 마왕의 알을 들고 있었다.
크기는 이제 타조알보다 커졌는데, 무게는 타조알 그 이상이었다. 역시 마왕을 품어서 그런지 무게부터가 남다르다. 뿜어내는 기운도 뭔가 꺼림칙하고 말이야.
“저… 정용님.”
가만히 알을 주시하고 있자니. 옆에 잠자코 누워있던 설백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나는 그녀를 돌아봤다.
“어 왜.”
“그… 그 알은 뭔가요?”
“먹고 싶냐?”
“제, 제가 무슨 돼지인가요!”
설백은 가볍게 항변하며 볼을 부풀렸다. 내가 놀린다고 생각했나 보다.
하지만 요 며칠 간 설백이 보여준 식욕을 생각하면, 그냥 웃어넘길 농담은 아니다. 하루에 밥그릇이 아니라 냄비를 세 개씩 비우니 말이다.
‘물론 돼지는 아니지만….’
오히려 설백은 지금도 좀 야윈 편이라 더 먹긴 먹어야 된다.
다만 이제 혈색은 눈에 띄게 건강해졌고, 볼에는 살도 어느 정도 올라서 전처럼 못볼 꼴은 아니었다.
좀 정확히 말하자면. 제 모습을 찾아가는 그녀는 내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미인이었다.
“그, 그냥 너무 불길한 기운이 새어나오길래 물어본 거예요… 등골이 오싹하단 말이에요.”
“흐음. 그래?”
“네에! 저, 정용님은 그런 걸 손에 들고도 아무렇지도 않으세요?”
정말 신기하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며 말하는 설백.
뭐, 물론 시커먼 뭔가가 구리구리하게 나오는데 기분이 좋을 리는 없지. 하지만 저렇게 질색할 정도냐 하면 그 정도는 아니다.
어쩌면 이것도 내가 알 수호자라서 이 기운이 친숙하게 느껴지는 걸 수도 있겠다. 고개를 끄덕인 나는 설백에게 물었다.
“있잖아. 설백.”
“네. 왜 그러세요?”
“너는 힐러지?”
“힐러… 가 뭔가요?”
“회복술사. 회복이 특기라면서.”
“아 네. 맞아요. 저는 회복과 보조의 기공사예요.”
설백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장 가슴께에 손을 가져갔다.
―그루루루!
그러자 투명한 기운이 설백의 손바닥으로 뭉쳐 자그마한 용의 형상을 이루어냈다.
투명하고 신비로운 빛을 뿜는 무정형의 용. 그것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설백의 어깨 언저리에 똬리를 틀었다.
―그우우우….
설백을 가만히 쳐다보는 것이 명령을 기다리는 듯했다.
나는 그 모습에 눈을 크게 떴다. 설백은 그런 나를 보며 피식 웃더니 설명했다.
“제가 사용하는 기룡(氣龍)이에요. 이름은 아란(牙蘭). 이 아이에게 부탁해서 상처를 치유하거나 신체를 활성화시킨답니다.”
“흐음.”
신기하긴 하군.
하지만 신기한 건 둘째 치고 일단 나는 성능충이라서 말이다. 서류면접만으로 끝낼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나는 곧장 기룡을 가리키며 설백에게 물었다.
“그 용가리. 회복력은 어느 정도야?”
“어느… 정도냐 하시면?”
“긁힌 상처를 치유하는 정도? 절단된 사지도 붙여주는 정도? 아니면 죽기 직전의 사람도 살려내는 정도?”
“음… 어느 정도냐면….”
설백은 잠시 고민했다.
그녀는 내 얼굴을 흘깃 보며 ‘말해도 되나?’ 같은 말을 혼자 중얼거리나 싶더니, 이내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제가 그 감옥에서 3년이나 갇혀 있으면서도 살아있을 수 있었던 이유가, 이 아이 덕분이라고 하면 설명이 될까요?”
“충분하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새삼스런 눈으로 기룡을 쳐다봤다.
‘아니 미친. 그 정도면 힐러가 아니라 화타잖아.’
요리사로만 써도 밥값하는 여자가 회복까지 최상급이라니. 얘는 농담이 아니라 진짜 복덩어리인데?
내가 감탄에 겨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설백은 멋쩍은 듯이 볼을 긁으며 말했다.
“저와 함께 이곳에 왔던 사람들은 모두 그 미친 하녀한테 살해당했어요. 하지만, 저만은 그 여자도 치명상을 입힐 수가 없었죠. 다 아란 덕분이었어요.”
“으음.”
“결국 저를 어떻게 할 수 없자, 그 여자는 저를 그 감옥에 가둬버렸지요.”
“… 그렇게 된 거였군.”
설백의 표정은 말할수록 어두워졌다.
“네. 그 뒤로, 그 여자는 단 한 번도 제 쪽으로 관심도 주지 않았어요. 오랜 세월 끝에 혼수상태로 아란에게 몸을 맡기고 있다가… 정용님이 그 앞을 지나가신 거예요.”
설백의 얼굴은 레이라에 대한 공포심으로 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럴 수밖에. 그 공포는 나도 깊이 동감하는지라 무겁게 고개만 끄덕여줬다.
어쨌든 그 정도라면 내 계획의 성공률이 부쩍 올라간다. 두 번 죽을 거 한 번 죽게 만들어주는 엄청난 능력이면 도움이 안 될 리는 없다.
‘하지만 몸이 아직 완치되지 않았으니… 일단은 내버려둘까.’
나는 일단 그녀를 예비 전력 1번 정도로 생각하기로 했다.
내 계획은 기본적으로 목숨을 기본 판돈으로 놓고 벌이는 것이다. 판돈의 리스크를 줄일 수 있다면 그 무서운 레이라의 손이라도 빌릴 계획이다.
그래서 설백 다음엔 레이라한테도 갈 생각이고.
나는 곧장 설백의 어깨를 턱, 하고 쥐었다. 내가 얼굴을 조금 가까이하자 그녀는 흠칫 놀라며 즉각적으로 얼굴을 붉혔다.
“설백. 지금부터 내가 하는 얘기 잘 들어.”
“아, 네… 네!”
아니. 잘 들으라니까 갑자기 눈은 왜 감냐?
뭐 눈 감는다고 귀가 막히는 건 아니니까 아무래도 좋다.
나는 그녀에게 곧장 용건을 꺼냈다.
“내일 아침. 나는 사냥을 나선다.”
“…… 네?”
설백이 김빠진 표정으로 눈을 번쩍 뜨며 물었다.
나는 그녀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사실은. 내가 여기 주인이랑 이런 거래를 했거든….”
나는 방금 전, 알현실에서 변경백과 했던 거래를 상기시키며 그녀에게 계속 설명해 나갔다.
* * *
“… 하하하. 좋네. 계획을 한 번 들어보지. 엘더리치 슬레이어 박정용 공.”
말은 좋다고 하지만 변경백의 표정은 전혀 좋지 못했다.
아무래도 자기를 놀린다고 여긴 듯하다. 표정에 불쾌함이 서려 있었다. 나를 부르는 호칭도 조롱이 섞였다.
뭐 좋다. 내 손을 잡고 말고는 순전히 그의 판단이다. 그가 따르지 않는다면, 나는 또 다른 계획을 짤 뿐이다.
“저는 조만간 이 성을 떠날 겁니다.”
“…!!”
“그래서 더 이상 순차적으로 레벨업이나 하면서 노닥거릴 시간이 없을 것 같습니다. 후딱 엘더리치 때려잡고, 제가 변경백님한테 진 빚도 그걸로 청산하고. 미련없이 떠나려고 하거든요?”
“… 그, 그렇군.”
내 거침없는 말에 변경백은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런 변경백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래서, 지금부터 제가 말씀드릴 계획도 사실 정공법은 아닙니다.”
“그러면? 정도가 아닌 사도란 말인가? 그런 게 있나? 그게 무엇인가 대체?”
내 태도가 워낙 당당해서였을까. 조롱뿐이었던 변경백의 말투에 혹시? 하는 일말의 기대가 서렸다.
나는 그 변화에 히죽 웃으며 계속 말했다.
“변경백님. 변경백님도 느끼고 있지 않습니까.”
“무엇을 말인가?”
“저희가 선봉진을 전멸시켰는데도 엘더리치의 군단이 지나치게 조용하다는 걸요.”
“…!”
변경백은 폐허가 된 언데드 군단의 터전을 보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런데… 이건 좀 이상하군.
똑똑히 기억한다.
그 때는 뭐가 이상하다는 건지 잘 몰랐지만 지금은 안다.
‘엘더리치의 반격이 전혀 들어오지 않는 점.’
언데드 군단의 무서운 점은 전멸시켜도 금세 다시 부활해, 태세를 정비하기도 전에 공격해온다는 점이다.
하지만 한 달에 걸쳐 언데드들을 몰살시킬 동안. 분명히 죽였던 언데드들은 부활했을 시간임에도 반격의 조짐이 전혀 보이고 있지 않다.
이것은 변경백에게 있어 납득하지 못할 이상한 현상이었을 것이다.
그럴 수밖에. 그 현상의 진상은 나 말고는 아무도 모를 테니까.
“그럼 변경백님. 똑같이 사냥을 했는데도 거셌던 적들의 반격이 한 달 전부터는 거짓말 같이 끊겼습니다. 한 달 전과 지금. 달라진 건 뭐가 있을까요?”
“으음….”
변경백은 멍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눈을 부릅떴다.
치켜뜬 두 눈은 물론 내 얼굴로 곧장 향했다.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자네. 자네가 사냥에 참가했지.”
“네. 맞습니다.”
“자네가, 원인이라는 겐가? 상대가 반격해오지 않는 이유가?”
“네. 그것도 맞습니다. 확신할 수 있습니다. 제 왼쪽 불알 걸고 진실입니다.”
자고로 남자가 자기 그거 걸면 진짜 진실인 거다.
변경백, 당신도 진짜 남자라면 내 말을 믿어주시지.
“… 도저히 믿을 수가 없군. 증거를 보여줄 수 있나?”
하지만 변경백은 끝내 고개를 저으며 내게 되물었다. 실망스럽군. 변경백. 떼십쇼.
나는 속으로 혀를 차고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아뇨. 이 부분은 저도 어쩔 수가 없네요. 증거가 있긴 한데 보여줄 수는 없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내가 믿어주길 바라는 게 아니었는가?”
“그건 아니지만. 증거를 보여주면 변경백님이 엘더리치 이전에 내 목을 썰어버릴 거라서요.”
“뭐라고? 그게 무슨….”
증거를 보여주지 못하는 이유? 간단하다.
그 증거가 바로 불사의 마왕이기 때문이다.
마왕의 알이 언데드 군단과 상호작용을 한다는 건.
언데드가 마왕 쪽에도 영향을 주는가 하면, 마왕 쪽에서도 언데드와 그 수장인 엘더리치에게 영향을 준다는 소리다.
쉽게 말해, 적측인 엘더리치도 감지한 것이다.
지금 언데드 군단을 사냥하는 우리에게서 느껴지는 심상치 않은 기운.
군주의 재림을 말이다.
‘놈들이… 엘더리치가 불사의 마왕을 감지했다.’
내가 추측컨대 반격이 중단된 건 그것이 이유다.
그거 외에는 상상할 수도 없고, 이거야 말로 아귀가 딱 들어맞는다.
‘하지만 그걸 저 양반한테 어떻게 설명하냐고.’
내가 용사를 증오하는지 떠본 이유도 그거다.
경험상 무대포식 비즈니스는 반신반의하는 상대에게 오히려 더 잘 먹힌다.
변경백에게 지금의 나는 아리송하기 짝이 없는 존재이겠지.
선한 놈인지 악한 놈인지, 개소리 나불대는 사기꾼인지 신뢰할 수 있는 사냥동료인지도 갈피가 잡히지 않을 거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증거를 보여줄 수 없는 내 설득이 먹힐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저는 어쨌든 증거를 보여드릴 순 없습니다. 하지만 제게 놈들을 억제할만한 힘이 있는 건 확실합니다.”
“… 그건… 너무나 믿기 어려운 이야기가 아닌가….”
“저도 그래서 믿어 달라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저는 이 일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제 계획을 들어보시면 알겠지만. 이 계획은 온전히 저만이 모든 리스크를 짊어지고 가는 계획입니다.”
“……”
“변경백님. 목숨 걸라고도 하지 않겠습니다. 그냥 제가 시키는 것만 해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기회 봐서 도망치시면 됩니다. 다시 이 성으로. 늘 하시던 것처럼.”
변경백은 한 동안 말이 없었다. 나는 진득하니 기다렸다.
아무렴 믿기 힘들 것이다. 놀아나는 기분도 들 것이다.
‘하지만 내 예상이 맞다면.’
내가 판단한 변경백의 성격이 틀리지 않다면. 아마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을 것이다.
세상 누구보다 이 땅을 지키고 싶어하니까. 누구보다 엘더리치를 중오할 테니까.
아무리 개소리 같아도, 당신은 내 제안을 거절할 수 없어.
“… 자네가 목숨을 건다니. 얼토당토않은 소리.”
아니나 다를까. 변경백이 곧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는 곧 내쪽으로 성큼 다가와 언제나처럼 주먹을 내밀었다.
믿음직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나 역시 목숨을 걸겠네. 지금껏 그 순간만을 위해 살아온 몸이니 말일세.”
“… 잘 생각하셨습니다.”
나는 회심의 미소를 띄우머 그의 주먹을 힘껏 맞부딪쳤다.
헛기침을 몇 번 하고, 나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럼. 계획을 말씀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