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쫄리면 뭐다?
한참이 지나서야 변경백은 겨우 목소리를 냈다.
“… 터, 터무니없는 소리.”
허탈한 얼굴로 헛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나를 쳐다보는 눈빛이, 흡사 대통령 되겠다는 아들 보는 아버지 같다.
그는 연신 고개를 저으며 내 말을 정면으로 부정했다.
“내가 왜 이런 꼴로 홀로살이를 하고 있겠나. 그럴 수만 있었다면야 당장이라도 그 증오스러운 놈의 모가지를 비틀었을 걸세. 하지만….”
“하지만 지금 변경백님은 힘을 숨기고 있지 않으십니까?”
“…….”
“그것도 꽤 많이요. 맞죠? 맞을걸? 맞을 겁니다 아마.”
변경백은 기습적으로 파고든 내 말에 입을 다물었다.
나는 그 반응에 고개를 끄덕였다.
변경백이 힘을 숨김.
그렇다. 변경백은 힘숨찐… 이 아니라 힘숨진(힘을 숨긴 진짜배기)이다. 내가 이걸 깨달은 건 꽤 오래전의 일이다.
변경백은 언제나 저렇게 시치미를 떼지만.
나는 그의 옆에서 한 달이 넘도록 싸웠기에 안다. 그는 내 수준에 맞춰주기 위해서 일부러 적진의 심층부까지 들어가지 않는다.
‘미미르의 눈 레벨이 얼마인데. 아직도 스테이터스가 안 보인다고.’
.
그는 내 상상을 초월하는 경지에 있는 남자다. 이젠 맨손으로 강철도 우그러뜨리는 나조차 쳐다볼 수 없는 경지.
그러니까 혼자서도 이렇게 오랫동안 이 성을 수호할 수 있었던 거겠지.
“변경백님. 제 생각을 한 번 말해볼까요?”
변경백이 설명했던 대로다. 조무래기들은 잡아봐야 언 발에 오줌 누는 꼴이다.
당장 성이 습격받는 건 막을 수 있지만. 놈들은 며칠만 지나도 멀쩡하게 살아나고, 반면 살아있는 우리는 피로가 쌓인다. 식량도 점점 축난다.
치킨 게임으론 패죽여도 언데드를 이길 수 없다.
언데드 군단의 진격 속도를 획기적으로 늦추기 위해서는, 적진의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어가 종심타격을 가할 필요가 있다.
유령기사들보다도 더 고위의 존재들인 리치나 데스비숍 같은 놈들을 잡으면 진군은 확실히 늦어진다.
지금 변경백이 그러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 내 역량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내가 변경백의 발목을 붙들고 있는 것이다.
나는 생각하는 바를 그대로 변경백에게 말했다. 변경백은 침중한 얼굴로 내 말을 잠자코 들었다.
“틀립니까? 제 말이.”
내가 묻자,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틀렸네. 정용 공.”
틀렸다네.
나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피식 헛웃음을 흘렸다.
“변경백님이 저를 너무 과대평가하는 겁니다.”
“자네는 본인을 너무 과소평가하고 말일세. 자네의 성장속도는 경이로울 정도야. 내 일찍이 자네와 같은 무서운 신인은 본적이 없네.”
“… 뭐… 그야.”
“최소 한 달은 자네가 내 짐만 제대로 챙겨줘도 대견하게 여길 생각이었네. 그런데 지금 상태를 보게. 잔당 중 반은 이미 자네가 해치우고 있지 않은가.”
“그냥 뭐, 운이 좋은 거죠 운이.”
“운이 반복되면 필연이고 실력인 걸세.”
변경백은 그렇게 말해줬지만. 나는 아무래도 과대평가 받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내 성장 속도가 터무니없이 빠른 건 알 수호자 특전으로 받은 스킬 ‘신의 총애’ 때문이다. 이 스킬도 10레벨 만렙까지 찍고 나니 경험치 빨아먹는 속도가 장난 아니게 늘어났다.
현재는 획득 경험치의 50퍼센트를 추가로 획득한다. 사냥 효율이 남들의 1.5배라는 소리다.
말하자면 그냥 시작부터 물고 태어난 금수저 스킬빨이다 이거야.
“쓰읍.”
찜찜한 마음에 인상을 찌푸리고 침음을 흘리는 나.
변경백은 그런 내게 서서히 다가왔다. 그리고 어깨를 두들기며 말했다.
“자네야말로 나를 너무 과대평가하는군. 나 혼자선 저 무지막지한 언데드 군단의 중심지에 진입한다 해도 일개 티끌에 불과하네. 기껏해야 리치 몇 마리 정도는 잡을 수 있을지 몰라도… 나 역시 목숨을 잃을 걸세.”
“… 그렇습니까.”
“내 죽음은 곧 이 성의 죽음이지. 그러니 엘더리치를 죽이는 건 불가능하네. 나는 미텔란트의 귀족이자 군인으로서 이 성을 조금이라도 오래 존속시켜야 해.”
그건 일말의 가능성도 내포하지 않은 단호한 확신이었다.
나는 한 편으로 이 양반이 존경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아니. 저걸 다 알고 있으면서 안 튀었다고?’
변경백은 객관적으로 자신의 승기가 전혀 없음을 숙지하고 있다.
서서히 다가오는 확실한 죽음과 맞서면서 그는 지금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뼛속까지 군인이라는 게 누굴 말하나 했더니, 바로 이런 사람을 말하는 거였군.
“그 정도로 강합니까? 쟤네들이?”
“말해 무엇하나. 숫자가 절대 줄지 않는다는 게 문제지. 끊임없이 부활하니까 말이야.”
과연.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기에 언데드 군단이지.
즉 놈들에게 있어서 유의미한 타격이라고 할 법한 건. 언데드를 조종하는 리치나, 고위 언데드 마법사인 데스비숍을 죽이거나. 놈들의 수장인 엘더리치까지 한 번에 격파하는 수밖에 없는 건가.
내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자, 변경백은 껄껄대며 웃었다.
“나는 자네에게 투자를 하는 걸세. 나 혼자 언데드 대군을 쳐부술 수 있었을 것 같으면. 왜 끊임없이 수도에 지원을 요청하고 결사대 같은 걸 만들었겠나.”
“…… 그건 그렇네요.”
“나 하나의 힘은 한계가 있네. 유의미한 타격을 주기 위해선 자네가 필요해. 물론, 지금보다 더 강해진 자네가 말이야. 지금은 그걸 위한 준비 단계일세.”
아니.
그건 아니다. 내가 더 이상 강해질 필요는 없다.
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속으로 그의 말을 부정했다.
‘필요한 건 시간. 그리고… 나의 죽음 뿐.’
하지만 방금의 대화는 아주 유익했다.
나는 마지막으로 변경백의 진의를 캐묻기로 했다.
“하나만 더 묻고 싶습니다 변경백님.”
“… 그래. 이번엔 또 뭔가. 아까 같은 터무니없는 소리라면 이젠 사양인데 말이야. 하하하.”
“영지가 이 지경이 됐는데도 나라에서 지원을 안 해주는 건 변경백님 때문입니까?”
“…….”
이번에도 변경백은 입을 닫았다.
국룰에 따르면 침묵은 곧 긍정이다. 나는 그렇다는 전제하에 말을 이어나갔다.
“중앙에 밉보이셨습니까?”
변경백은 떨리는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입을 굳게 닫고 고심하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천천히 주억거렸다. 으르렁대는 그의 목소리에서 갈곳없는 분노가 흩어졌다.
“… 그래. 칠마존을 추종하는 내무대신들에게 모함을 당했지. 칠마존의 후예로 촉망받던 내가 이런 오지로 유배당한 이유도 그것일세.”
“모함이라니. 왜요?”
“내 입으로 이런 말하기도 부끄럽네만. 마법의 재능을 시기한 걸세. 힘도 배경도 없던 내가 정말 칠마존의 뒤를 이을 신흥세력으로 부상할까 두려웠던 게지.”
“하긴. 변경백님 정도면 질투 받을 만도 하죠.”
내가 통감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변경백은 김빠진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 미소도 얼마 안 가 사라졌다.
그의 얼굴이 점점 무서울 정도로 일그러져갔다.
“왕도의 돼지 놈들은 내 죽음을 바라고 있네. 놈들이 엘더리치를 토벌을 계획해도, 내가 죽은 다음이겠지.”
“… 예. 제가 봐도 그럴 것 같습니다.”
“내 목숨 따위 얼마든지 넘겨주지. 유배도 받아줄 수 있네. 나는 어디서든 최선을 다할 뿐일세. 이곳에서도 내 목숨을 다해 영지민들을 지켰고. 마족과 언데드에 맞서 사력을 다해 싸웠네. 그 결과가 죽음이라면 나는 기꺼이 받아들일 걸세. 허나.”
분노가 가득 담긴 표정으로 변경백은 흉흉한 기세를 흘렸다. 우드드득, 철제의자의 팔걸이를 변경백의 손가락이 파고든다.
공기가 떨리는 듯했다. 숨쉬기가 어려워졌다.
“영지민들을 죽게 내버려두는 건 용서할 수가 없네. 놈들은 그러면 안 됐어. 그러면 안 됐단 말일세. 인간의 탈을 쓰고, 어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
“영지민들의 피난도 옛 전우 에센타르 남작의 주도로 간신히 성사된 걸세. 왕도에서는… 아무도 손을 빌려주지 않았어. 아무도. 그 누구도 말일세.”
변경백의 부릅뜬 눈가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핏발 선 눈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은 석양빛을 받아 피처럼 새빨갛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의 증오가 현현한 듯한 색상에 나는 숨을 삼켰다.
“변경백님… 당신은 정말….”
나는 변경백을 보면서 뼈아픈 동질감을 느꼈다.
이 양반. 생각하는 꼬라지가 호구 교과서잖아. 그렇게 등쳐 먹히고도 ‘어디서든 최선을 다한다’라니. 지랄 났다. 청춘드라마 찍냐?
‘하 씨… 존내 안쓰럽네….’
생각하는 수준이 나랑 비슷해서 나까지 눈물이 날 것 같다. 나도 남들이 보면 이렇게 안타까운 인생이었던 걸까?
내가 호구인생 선배로서, 따끔하게 조언 한 마디 하겠습니다 변경백.
“그러면 더더욱 무의미하게 목숨을 버리면 안 되잖습니까.”
내 말에 변경백의 눈물이 멈췄다.
나는 그런 변경백을 향해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 새끼들이 변경백님의 죽음을 바라고 있지 않습니까. 근데 왜 순순히 죽어줍니까. 오기를 부려서라도 아득바득 살아야지요. 그래야 배알이 꼴리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허나… 그러면 나의 무지와 부덕으로 죽어간 영지민과 병사들을 볼 낯이 없네. 여기서 끝까지 항전하다가 전사하는 것 외에는 내겐… 선택권이 남지 않은 게야.”
변경백이 중얼거린다. 그 패배주의적인 모습에 눈썹을 꿈틀거렸다.
나는 조금 차가운 말투로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용사인 걸 알면서 친절하게 대한 것도 그래서입니까? 변경백님은 용사 새끼들 소요 사태가 일어난 것도 자기 탓으로 생각하십니까?”
“… 아니. 그것은 조금 다르다네.”
변경백은 의외로 고개를 저었다. 그의 진심이 천천히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말했잖나. 나는 이미 왕도에서 한 번 배신을 당하고 여기에 유배된 몸일세.”
“…….”
“특별히 용사들만 잘못된 게 아닐세. 그저 인간이란 족속이 원래 그런 것이지. 이기적이고. 독선적이고. 결국은 모두 자신만을 가장 먼저 생각하니 누구도 멀리 보지 못해. 그 사태가 일어난 건 필연이었네.”
“…….”
“그래서 그들을 원망하지 않는 걸세. 원망해야 하는 건, 그 사실을 급박한 시국 때문에 잊어버리고 만 나 자신이지. 지도자로서 호의 속에 숨은 욕망을 파악했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으니.”
변경백의 말에는 커다란 공허가 담겨 있었다. 그것이 가감없는 그의 진심이었다.
차가운 웃음이 입가에 달려 있었다. 자조였다.
“그리고 우습게도 말이네. 내전으로 절망적인 상황에서 내게 누구보다 힘이 돼줬던 건. 그 용사들 중 하나였던 그윈일세.”
“… 그렇습니까.”
“그가 모든 것을 버려가며 나를 따라줬기에, 나도 지금까지 모든 것을 버려가며 버틸 수 있었네.”
그렇다고 한다.
이쯤에서 내 솔직한 심정을 밝혀보겠다.
가슴이 미어지는 심정일 변경백한테는 미안하지만. 나는 솔직히 지금 기쁘다.
‘최고다.’
저 정도가 딱 좋다.
지금 변경백은 용사인 나를 너무 믿어서도 안 되고, 너무 불신해서도 안 된다.
적당한 자포자기 상태야말로 내 제안을 받아들이기 가장 좋은 상태다.
그럼 시작해 보자. 모을 정보는 모두 모았고. 상태는 올 그린이다.
나는 곧장 변경백에게 제안을 던졌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내가 어조를 바꾸며 목소리를 높이자 변경백이 눈을 끔벅였다.
나는 그런 변경백에게 믿음직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했다.
“변경백님 목숨을 지금부터 제가 사겠습니다. 제 작전에 제 지시대로 참가해 주십쇼.”
“… 작전?”
“그 보상으로 제가 드리는 대가는, 엘더리치의 목숨입니다.”
‘아직도 그런 뚱딴지 같은 소리를 하나?’ 변경백의 차가운 시선은 딱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의문을 띄우는 변경백에게 히죽, 짙은 미소를 띄우며 끝까지 말했다.
“쫄리면 뒈지시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