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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417413번째 소울라이크 용사-32화 (8/280)

32화 자책의 끝에서

“헌드레드 소드 피어스!”

내가 열화 카피한 스킬의 원조.

백 개의 마력검을 쏟아내는 가공할 스킬의 영창이었다.

변경백은 그대로 검을 찔러넣었다.

“흙으로 돌아가거라!!”

피피피핑! 마력 검들이 일제히 유령기사들을 향해 날아갔다.유성우를 보는 듯했다. 시퍼런 마력의 칼날이 그들을 꿰뚫고, 바닥에 박히고, 허공에서 폭발하며 스파크를 남겼다.

―키아아악!

―그아아악!

두 마리의 유령기사가 그 자리에서 벌집이 되어 절명했다. 나머지 세 마리는 만신창이가 되었으나 어떻게든 투기를 씌운 마검으로 마력 칼날을 쳐내며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나를 잊으면 안 되지.

나는 곧장 베스타크를 역수로 쥐고는 바닥에 힘껏 꽂았다.

“지뢰진!”

쿠구구구!

땅이 검을 기점으로 갈라지며 미친 듯이 춤을 췄다. 파동이 퍼져나가듯 출렁거리는 지축에 유령기사들도 제대로 서있지 못하고 결국 균형이 무너졌다.

그 틈을 놓칠 변경백이 아니다.

변경백은 산발적으로 날아가던 마력의 검들을 그 사이로 일거에 쏟아내 버렸다.

파바바박! 놈들은 혼란에 혼란이 겹쳐 결국 막아내지 못했다. 마력검이 갑주를 사정없이 꿰뚫었다.

―크, 우우우…!

―… 할센베르크를… 지켜야….

놈들이 차례차례 바닥에 쓰러진다.

어떤 놈은 쓰러지기 직전 정신이 돌아왔는지, 이상한 단말마를 되뇌었다.

순간 변경백이 눈을 부릅떴지만, 이미 기사의 혼은 시커먼 기운이 되어 허공에 흩날린지 오래였다.

“… 방금 건….”

변경백은 한참 동안이나 혼이 빠져나간 기사의 갑주를 멍하니 쳐다봤다.

지금 끼어들 정도로 눈치가 없진 않다. 나는 뒤에 서서 잠자코 베스타크로 갈라진 땅이나 긁고 있었다.

“…….”

“…….”

얼마나 궁상을 떨었을까. 곧 기운을 차린 변경백이 먼저 내게 다가왔다.

그는 주먹을 내게 내밀며 진득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 지축을 흔든 건 훌륭한 판단이었네. 이제 자네에게 내 뒤를 맡겨도 불안이 전혀 없을 정도로군. 실로 놀라운 일취월장이야.”

“… 하하. 그냥 뭐 가르쳐주신 대로 했을 뿐입니다.”

겸손 떠는 것 같겠지만 사실이 그렇다.

이 지진 연계법은 변경백이 알려준 거고, 내가 죽을 위기일 때 변경백이 날 살려줄 용도로 많이 사용하던 기술이다. 그 상황이 지금은 반대가 됐을 뿐이지.

내가 멋쩍게 웃으며 주먹을 맞부딪치자, 변경백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시선을 돌려 주위를 살펴봤다.

나도 덩달아 시선을 돌렸다.

“그나저나… 이건 좀 이상하군.”

문득 변경백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변경백을 쳐다봤다.

“예? 뭐가요?”

“음?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닐세.”

퍼뜩 정신을 차린 변경백이 이내 말을 얼버무렸다. 그러더니 고개를 끄덕이고 서둘러 발길을 돌렸다.

“잔당은 더 이상 없어 보이는군. 이 구역도 이걸로 일단 안심할 수 있겠어.”

“… 뭐, 그렇군요. 고생하셨습니다 변경백님.”

“자네도 고생이 많았네 정용 공. 이제 돌아가지.”

“네.”

나는 폐허가 된 평야를 뒤로하고 변경백과 함께 성으로 돌아갔다.

우리는 요 2주 동안, 진격에 진격을 거듭해 어느새 언데드 군단의 선봉진을 전멸시켰다.

선봉진의 우두머리가 방금 정리했던 유령기사들이었으니 이걸로 선봉진이 부활할 때까지는 잠시나마 시간을 벌었다는 것이 변경백의 설명이었다.

“그러나 오래가진 못할 걸세. 선봉진의 주력은 약한 언데드들인 만큼 금방 부활하니 말이야.”

“그렇습니까?”

“잔챙이들은 길어야 사흘. 유령기사들도 일주일이면 다른 타락한 영혼을 씌워 아무렇지도 않게 부활할 걸세.”

“일주일이면… 빠르네요. 거진 수 천 마리는 잡아댄 것 같은데….”

“… 그래. 그래서 우리는 결국 놈들의 공세에 버티지 못했지.”

그럴 법도 했다. 생각보다 부활 속도가 너무 빨랐다.

할센베르크 변경백이야 워낙 괴물처럼 강하니 상관없겠지만. 다른 병사들은 당연히 전투 후에는 부상도 입고 지치기도 한다.

그 피로와 상처가 회복되기도 전에 저쪽은 만전 상태가 되고. 설상가상으로 아군마저 죽고 나면 적으로 돌변하니, 상황이 날로 악화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름 매 전투마다 만전을 기한다고 했지만… 나는 결국 놈들을 얕보고 있었을지도 모르네.”

변경백은 자책했다.

더 빨리 피난명령을 내렸더라면.

병사들을 더 혹독하게 훈련시켰다면.

언데드가 된 주민들을 더 냉정하게 처리했더라면.

끊임없이 자신의 잘못을 되짚어나갔다.

듣다듣다 내가 말했다.

“좀 냉정하게 말하자면. 저런 언데드 대군 앞에선 피똥 싸게 노력해도 이렇게 되는 게 기정사실이었던 거 같습니다만.”

“… 그래. 그랬겠지. 자네 말대로일세. 내가 추한 꼴을 보이고 말았군. 미안하네.”

“아뇨. 미안하실 건 없는데 기운 내시라고요.”

“고맙네. 정용 공.”

변경백은 힘없이 미소 지으며 앞장서 걸었고. 나는 얌전히 그의 짐을 챙겨서 뒤를 따랐다.

우리는 침묵 속에서 성으로 돌아왔다. 해는 뉘엿뉘엿 기울었고, 한파에 얼어붙은 할센베르크 성도 붉게 물들어 있었다. 성의 분위기가 분위기다 보니, 무엇보다도 새빨간 피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

떨어져 나간 대문을 지나 성의 중앙으로 향하자 시체가 가득 쌓인 알현실이 등장했다.

변경백은 자기 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알현실 가장 높은 곳의 자기 의자에 걸터앉았다.

“변경백님?”

내가 불렀지만 변경백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옆에 있는 백작부인을 가만히 쳐다볼 뿐이다.

백작부인은 시체처럼 조용했다. 아니, 시체 맞지 참. 아직 일몰 전이라서 저주가 약해 살아나지 않는 듯했다.

변경백은 아내의 모습을 슬픈 얼굴로 잠시 주시하다가 나를 흘깃 보며 말했다.

“잠시 마음을 추스르고 가겠네. 먼저 들어가게.”

“…….”

아무래도 유령기사가 죽기 전에 되뇌었던 말이 변경백의 무언가를 건드린 듯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뒤돌아 가려다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생각해보니 지금 외엔 없지 않을까.

이런 터무니없는 얘기를 변경백이 진지하게 들어줄 순간은?

‘… 그래. 얘기하려면 지금이다.’

나는 잠시 고심한 끝에 마음을 정했다.

다시 발을 돌렸다. 변경백은 가만히 눈을 감은 채 앉아 있다가, 내 인기척을 느끼고 눈을 떴다.

“무슨 일인가. 급한 일이 아니라면 나중에 하지. 지금은….”

“급한 일입니다. 아마 저보다 변경백님이 더 급할 걸요.”

내 당돌한 발언에 변경백의 이마 주름이 꿈틀거렸다. 그는 조금 이채를 담아 나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나는 잠시 심호흡을 하고, 변경백을 똑바로 마주봤다.

이 대화로 시작하는 거다.

해피엔딩을 향한 개고생의 서막을.

* * *

“그렇다면야 어디 한 번 말해보게. 무슨 일인가.”

변경백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마주보기 시작했다.

대화를 길게 하고 싶은 눈치는 아니다. 오케이 접수. 나는 곧장 본론을 꺼냈다.

“변경백님. 엘더리치도 죽지 않습니까?”

“… 그게 무슨 말이지?”

“말 그대로입니다. 저번에 말했던 불사의 마왕처럼 죽일 방법이 아예 없냐는 소리입니다.”

내 말에 변경백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가, 고개를 저었다.

가로로 저었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있단다. 적의 수장인 엘더리치는 불사가 아니란다.

“그렇지는 않네. 사령술의 중추인 리치들은 모두 마찬가지지. 그들에겐 라이프포스 베슬(lifeforce vessel)이라는 것이 있다네.”

“라이프 뭐요? 그게 뭡니까?”

“라이프포스 베슬. 언데드로서 살아가기 위한 생명력을 이전해 담아놓는 그릇일세. 리치의 생명력 근원이라고 할 수 있겠지. 대부분은 보석이나 룬의 형태를 띈다고 들었네만. 어쨌든 그걸 파괴하면 엘더리치도 완전히 소멸할 걸세.”

나는 거기서 한 번 더 눈썹을 튕겼다.

“룬? 룬은 또 뭡니까.”

“고대의 의지가 담긴 돌일세. 고대의 문양이 새겨져 있고 문자마다 특수한 힘을 지니고 있지. 밝혀진 게 많이 없지만 마법 재료로 많이 사용된다네.”

“별게 다 있구만요.”

“하하. 내 입장에선 그걸 모르는 자네가 더 신기하게 느껴진다네.”

아무래도 그 룬이라는 건 이 세상에서 상식선에 있는 물건인 듯하다.

나중에 미미르의 눈으로 이것저것 본격적으로 알아보는 시간이라도 갖든가 해야지 원. 이렇게 몰상식해서야 누구랑 대화도 못할 지경이다.

어쨌든 지금은 친절한 변경백의 설명 덕에 알아들었으니 나는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어쨌든 그 베슬만 파괴하면 엘더리치도 죽창 한 방에 간다 이 말 아닙니까?”

“… 죽창? 뭐 죽는 건 사실이네만… 그런 건 왜 물어보나 자네.”

죽이는 방법을 왜 물어보겠는가. 뻔하지.

나는 미심쩍게 바라보는 변경백을 똑바로 주시하며 히죽, 웃었다.

“그야 엘더리치를 죽일 계획을 짜고 있으니까 그렇지요.”

변경백은 그 순간, 내가 본 이래로 눈을 가장 크게 부릅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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