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부화(孵化)
나는 우선 검은 머리 여인의 몸을 머리부터 끝까지 한 번 살펴봤다.
이불에 가려 정확히는 모르지만, 얼굴의 상태만 봐도 여전히 앙상했다. 처음 나체로 감옥에 누워있을 땐 그야말로 언데드와 언니 동생 할 정도여서 그때보다야 물론 낫다만.
“몸은 좀 괜찮아?”
“아… 네. 덕분에 많이 괜찮아졌어요. 정말, 뭐라고 감사를 드려야 할지….”
“됐어. 내가 한 게 뭐가 있다고.”
그녀의 진심어린 감사에 나는 피식 웃어넘겼다.
솔직히 난 진짜 한 게 없어서 그랬다.
솔직히 말하면 한 달 간 얘가 있다는 것도 거의 까먹고 지냈다. 나는 나 나름대로 언데드 전쟁통에서 살아남는 데 필사적이다 보니.
하지만 굳이 이렇게 말해서 좋은 이미지를 깎아먹을 필요는 없지. 나는 그녀에게 한껏 얼굴을 들이밀었다.
여자는 숨을 삼키며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저, 왜, 왜 그러세요?”
“내 이름은 박정용. 박이 성이고 정용이 이름이야. 편하게 그냥 정용아, 하면 돼.”
“아… 네, 네. 정용님.”
정용님은 또 뭐냐. 소름 돋네. 네가 세스나야?
나는 한사코 존대와 존칭을 거부했지만, 그녀는 단호하게 거부하며 자기 철학을 밀어붙였다.
“새, 생명의 은인에게 하대라니. 그런 건 제가 살던 세상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 아 그래. 맘대로 해라.”
결국 시간이 아쉬운 내가 굴복했다. 뭐 호칭이야 딱히 중요한 건 아니니까.
난 한숨을 쉬고는 곧장 그녀에게 물었다.
“넌 이름이 뭐야?”
“서, 설백(雪白). 원래 좀 더 길지만… 그냥 그렇게 불러주세요.”
“설백이라.”
판타지스러운 이름은 아니었다.
네이밍 센스는 무협에 가깝군. 그쪽 업계(?)에서 날아온 아가씨인가 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따봉을 치켜들었다.
“음. 좋은 이름이네.”
“… 고, 고맙습니다.”
여인… 설백의 얼굴이 또 다시 사르르 붉어진다.
칭찬도 못하겠군 이거. 나는 슬쩍 한숨을 내쉬고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저… 왜, 왜 그렇게 쳐다보세요?”
설백이 얼굴을 슬쩍 붉히며 그렇게 물었지만. 나는 계속 바라봤다.
이내 그녀가 안절부절하다 시선을 돌리며 얼굴을 감싸려 할 때 쯤.
드디어 패널이 생성되었다.
[명칭: 설백]
[별칭: 145773952번째 용사, 눈(雪)의 기공사]
[LV. 26]
[체력: 17/190 마력: 63/574 신체상태: 극도의 쇄약, 공복]
[힘: 19 민첩: 23 지능: 55 히어로센스: 5]
'이름은… 설백 맞군.'
일단 거짓말을 하고 있진 않은 걸로 확인됐다. 나는 입맛을 다시고는 곧장 다음 용건으로 넘어갔다.
이름도 알아냈겠다. 이제 더 이상 말설일 게 뭐가 있겠는가.
곧장 핵심을 찌르자.
“그럼 설백. 단도직입적으로 들어갈게.”
“아, 예.”
“너 내 동료가 돼라.”
“아… 예?”
모 해적만화에 나올 법한 제안을 들은 설백은 잠깐 얼이 빠진 듯했다.
나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내뱉었던 말을 리바이벌 했다.
“내 동료가 되라고. 생명의 은인이라 막 은혜를 갚고 싶은 마음이 샘솟지?”
“아… 예.”
설백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런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히잇, 하고 새된 소리를 내는 설백. 하지만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일지언정 내 손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설백. 나를 봐.”
“저, 정용님… 이, 이러시면 저는….”
설백은 얼굴을 붉히면서도 나를 똑바로 주시했다.
말로는 저러면서도 딱히 거부하진 않는군. 좋아. 이건 반쯤 넘어왔다.
나는 그녀에게 얼굴을 한껏 들이밀며 말했다.
“설백. 나는 지금 네가 필요해.”
“아… 으, 아으.”
“네가 아니면 안 돼. 그러니까 나랑 같이 떠나자. 내 옆을 지켜줘. 나도 널 지켜줄 테니까. 내 목숨을 걸고.”
“으아아아. 아으아!”
설백의 얼굴이 거의 터질 것처럼 달아올랐다.
… 뭐지 이거. 좀 위험해 보인다. 저러다 다시 쓰러지는 거 아냐? 그냥 파티 좀 결성해서 으쌰으쌰 하자는데 반응이 왜 저러냐?
그런 생각이 들어 조금 몸을 물리는데.
설백은 별안간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연신 끄덕이기 시작했다.
“아, 알겠습니다. 저, 저는 정용님을… 당신 옆을 지키겠어요!”
“어, 어… 그, 그래. 생각 잘했다.”
뭔가 내가 예상하던 그림과 좀 달라서 말을 더듬었지만. 어쨌든 뭐… 동료 영입에 성공한 것 같다.
나는 큰 고비 하나 넘긴 느낌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 그건 그렇고.'
이 여자 시선이 왜 이리 뜨듯미지근 해졌냐.
왠지 동료 제안을 받아들인 뒤로 그윽한 눈빛을 보내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이겠지?
나는 헛기침으로 설백의 주의를 돌린 후에 그녀에게 말했다.
“근데 설백. 싸움은 할 줄 알아?”
“아….”
설백은 애매한 탄성을 냈다.
못 싸우는 건가. 내가 탄식하자 그녀는 퍼뜩 첨언했다.
“그, 완전히 못 싸우는 건 아니에요. 저희 대륙에서 널리 쓰였던 기공술을 다룰 줄 알거든요. 다만….”
“다만?”
“싸움을 잘한다고는… 솔직히 못하겠어요. 제 주력은 보조 기공술 쪽이거든요.”
“보조 기공술이라.”
딜러일줄 알았는데 버퍼인가 보다.
뭐 상관은 없다. 데리고 다니면 어디든 써먹을 데는 생긴다. 하다못해 싸움이 안 되면 잡일이라도 시키면 된다.
그리고 잡일 중에 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이 있다.
이건 좀 물어봐야겠다.
“그럼 요리는 할 줄 알아?”
“아. 요, 요리라면… 그래도 좀 자신 있어요.”
“합격. 내일부터 출근해.”
“어… 네?”
게임 셋. 더 물어볼 것도 없다. 요리 잘하면 됐지 더 뭘 바라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설백의 어깨를 두들겼다.
“넌 이제부터 우리 파티 전속 요리사 해. 싸움 쪽은 바라지도 않으니까. 알겠어?”
“아… 네, 네. 알겠어요.”
“좋아.”
싸움을 못해도 관대한 이유는 간단하다. 애초에 이 빌어먹을 할센베르크 성만 탈출하고 나면 싸울 일 자체도 별로 없을 거라서 그렇다.
난 평화주의자다.
마왕 나부랭이가 활개치는 세상이라도, 맞서 싸우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다. 애초에 거의 사기 당하다시피 떠맡은 용사직인데 내가 열심히 하고 싶겠냐?
그러니까 사실 우리 파티에 가장 필요가 없는 직업군은 전투원이다.
요리사면 우리 파티 핵심 전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처음부터 이런 인재를 발굴하다니 운이 좋군.
“좋아 좋아. 그럼 그러는 걸로 하는 거다?”
“네에….”
나는 싱긍벙글한 기분이 돼서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설백의 어깨를 두들겨 준 뒤 곧장 내 짐을 챙겨 문으로 향했다. 짐이라 해봐야 낡은 가죽 가방과 파우치가 전부지만.
“뭐, 쉬어라. 어디 나갈 일 있으면 나부터 부르고. 난 옆방에 있을 거니까.”
“아….”
설백은 순간 말끝을 흐렸다가, 내가 방을 나가기 직전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저기, 정용님.”
“엉?”
“… 아무것도, 안 물어보시나요?”
설백이 이불을 슬쩍 움켜쥐며 묻는다.
입술을 깨물고 몸을 조금 떨고 있었다. 본인이 말을 꺼냈으면서도 내가 진짜 물어볼까봐 두려워하는 기색이었다.
나는 설백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물었다.
“뭘 물어봐야 하는데.”
“제가 왜… 거기 갇혀 있었는지. 어떻게 죽지 않고 살아있을 수 있었는지….”
“별로 안 궁금한데.”
“… 아.”
설백은 내 시큰둥한 대답에 뒤통수 얻어맞은 표정을 했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피식 웃으며 말했다.
“말하고 싶으면 나중에 말해주든가. 별로 궁금하진 않지만 남의 얘기 듣는 건 싫지 않아.”
“… 네. 그럴게요.”
설백은 얼굴을 슬쩍 붉히더니 그대로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나는 그녀에게 손을 슬쩍 흔들어준 뒤 방문을 닫았다.
“쉬어.”
털컹. 방문이 닫혔고. 나는 가방을 들고 곧장 옆방으로 갔다.
끄기이익. 문을 열자 바닥에 있던 먼지가 풀풀 날려 시야를 어지럽혔다. 곧장 기침이 몰려들었다.
“푸학 X발. 이, 일단 청소부터 해야겠군.”
나는 배낭에 들어있던 아이템들을 책상 위에 놓으며 중얼거렸다.
그러던 어느 순간. 내 행동이 우뚝 정지했다. 파우치에서 딸려 나온 어떤 물건 때문이었다.
“이거… 왜 빛나냐?”
알이다. 한동안 존재조차 잊고 살았던 바로 그 알.
나를 고통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주범.
그것이 지금, 번쩍거리며 특유의 음울한 빛을 뿜어내고 있는 게 아닌가.
나는 그것을 유심히 살펴보다가 이내 어떤 사실을 깨달았다.
“… 좀… 커진 거 같다?”
원래 허리용 파우치 안에 들어가고 공간이 널널했는데, 지금은 파우치에 넣으니 남는 공간이 전혀 없었다.
'가만 있어봐. 언제부터 이렇게 커졌지?'
요즘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살피지 못한 게 컸다. 내가 고심하고 있자니.
문득 띠링. 익숙한 전자음이 패널의 생성을 알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거기에 시선을 옮겼다.
[상세 정보 - 불사의 마왕의 알]
[부화 촉진: 불사의 마왕에게 속박된 권속을 지속적으로 사냥하여 부화 일시가 빨라졌다.]
[부화까지 남은 기간 - 3일]
내가 채 이해를 하기도 전에 스르릉, 하는 서늘한 경고음이 귓전을 때렸다. 그리고 눈앞에 시커먼 패널이 시야 가득 떠올랐다.
지금까지 봐왔던 패널과는 확연히 다른, 꺼림칙한 느낌이 다분한 패널이었다.
[불사의 회귀점이 갱신되었다.]
[일시 - 미텔란트 왕국력/547년, 12월 18일, 저녁 7시]
[장소 - 할센베르크 성, 기사 루드릭의 방]
[알림 - 불사의 마왕이 부활에 임박했다.]
[알림 ― 불사의 마왕이 완전히 부활할 때까지 12시간에 한 번씩 회귀점이 갱신된다.]
“… 뭐야 이거?”
나도 모르게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 * *
“변경백님!”
나는 알현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다.
알현실에는 언제나처럼 할센베르크 변경백이 마누라 손 붙잡고 저주를 중화시키고 있었다.
“오오. 이게 누군가.”
변경백은 성큼성큼 다가오는 날 반갑게 맞았다. 마족 사냥이 시작된 뒤로는 밤에 퍼질러 자느라, 찾아오는 일이 없었으니 그럴 법도 하다.
“이렇게 찾아오는 건 간만이군 정용 공. 그래, 무슨 일인가.”
“좀 묻고 싶은 게 있어서요. 시간 되십니까?”
“얼마든지. 사냥 동료인 자네를 위해서라면야.”
변경백은 믿음직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고맙다는 의미로 꾸벅 목례를 했다.
'사냥 동료라.'
사실 한 2주 전까지만 해도 나쁘게 말하면 짐덩어리고, 좋게 말해도 시다바리였다.
이 양반은 날 참 과대평가한단 말이지. 지금이야 레벨이 오를 만큼 올라서 발목 잡을 정도는 아니긴 하지만.
“뭐든 물어보게. 무엇이 궁금한가. 혹 고대마족에 대한 것인가?”
“비슷합니다.”
나는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흥미로 눈을 반짝이는 변경백에게 조심스럽게 말문을 꺼냈다.
한 손으로는, 방에서 들고 온 마왕의 알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지금 변경백님이 싸우고 계신 엘더리치는 몬스터의 일종이죠?”
우선은 첫번째 질문.
변경백은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일세. 고대마족이니 뭐니 해도 결국은 몬스터. 고대부터 존재하여 마력이 막강해진 마왕의 하수인들을 그렇게 칭하는 것뿐이지.”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입을 열었다.
진짜로 알고 싶은, 두 번재 질문이었다.
“그럼 엘더리치의 위에도 담당하는 마왕이 있겠군요?”
“물론일세.”
“그게 누굽니까?”
“불사의 마왕 루스티카일세.”
나는 순간 내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아니, 차라리 잘못 들었길 바랐다.
혹시나 싶어 다시 물었다.
“누구라고요?”
“불사의 마왕 루스티카 아스모데우스. 마녀 디아나의 혈육이라고 불리는 마왕. 역대 최강의 4마왕 중 하나지. 북부의 모든 언데드 군단은 불사의 마왕 휘하 몬스터들일세.”
변경백은 담담한 목소리로 꽤나 충격적인 사실을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