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물론 이런 생활은 죽고 싶을 만큼 싫었다.
그러나 마냥 안 좋기만 한 것은 또 아니다.
다른 건 몰라도 레벨업 하나는 정말 끝내주게 빨리 했다.
그럴 법도 한 것이, 나와 변경백의 전투는 게임에서 흔히 말하는 ‘파티 사냥’식으로 경험치가 분배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고렙 법사님이랑 몰이사냥 하면서, 속칭 ‘쩔’을 오지게 받았다는 소리다.
그 결과 지금 내 스테이터스는 이렇다.
[명칭: 박정용]
[별칭: 163417413번째 용사. 마왕의 알 수호자. 불사에 종속된 자]
[LV. 83]
[체력: 635/635 마력: 210/210 신체상태: 정상]
[힘: 103 민첩: 149 지능: 23 히어로 센스: 6]
[남은 능력치 포인트: 0]
힘의 차이가 느껴지십니까?
적어도 당사자인 나는 아주 뼈저리게 느껴진다. 지금 나는 솔직히 인간이라고 보기에도 살짝 무리가 있다.
바위도 맨손으로 쪼개고, 100미터는 물론이고 1킬로도 30초면 찜쪄먹는다.
레벨업 때 올린 것 외에도, 힘을 쓰거나 민첩성을 발휘할 때마다 저절로 올라간 스탯도 있다. 아무래도 기동력 위주 전투를 하다 보니 민첩성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지능도 그래서 올라간 거다. 나는 지능에 1도 투자한 적이 없다.
그런가 하면 스킬 쪽은 어떤가.
현재 내가 익히고 있는 스킬들은 이러하다.
[스킬 목록]
[미미르의 눈 (패시브) LV.11]
[신의 총애 (패시브) LV.20 (마스터)]
[사신의 총애 (패시브) LV.20 (마스터)]
[에테르 수집 (패시브) LV.5]
[프로메테우스 (패시브) LV.10 (마스터)]
[후방타격 (패시브) LV.11]
[잠입 (액티브) LV.11]
[지뢰진(地雷震) (액티브) LV.7]
[연화(蓮花) (액티브) LV.5]
[강맹한 기습 (패시브) LV.6]
[일섬 (액티브) LV.5]
[세븐 소드 피어스 (액티브) LV.4]
이 중 대부분, 아니. 사실상 잠입과 후방타격을 제외한 전부는 변경백의 스킬을 쌔벼(?) 온 거다.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게, 알 수호자 특전으로 받았던 프로메테우스 스킬의 효과가 강자 옆에 있으면 시너지가 엄청나다는 사실이다.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사용법을 터득하고, 몇 번 실제로 흉내를 내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의 필살기가 습득가능한 상태가 된다.
물론 카피해올 때는 레벨 차이가 있어서인지, 뭔가 좀 부족한 마이너 카피가 되지만. 그렇다 해도 이것은 정말 엄청난, 사기적인 효과였다.
변경백과 싸우면서 그걸 깨달은 나는 부랴부랴 프로메테우스 스킬도 같이 상승시키기 시작했고. 지금은 마스터 레벨인 10까지 올라 스킬 도둑질(?)의 효율도 훨씬 증가한 상태다.
하루는 내가 변경백의 기술을 밥먹듯이 사용하는 걸 변경백이 본 적이 있었다.
변경백은 대경실색하며 내 어깨를 부여잡았다.
“아니 자네! 그 기술은 가문의 비전으로 내려오는 특별한 것이거늘! 보는 것만으로 익혔단 말인가?!”
“아… 하하. 그, 그게 그냥 어쩌다 보니….”
“이거 자네, 내 예상보다 출중한 무예의 재를 가진 친구로군! 어떤가! 내 정식 제자로 들어올 생각은 없나?!”
“아… 그, 그건 좀 거시기한데….”
뭐, 덕분에 이런 해프닝도 있긴 했다만.
어쨌든 나는 변경백의 기술 중에서도 내게 쓸모가 있을 법한 것들만 골라서 익혔다.
주로 도주에 유용하거나.
뒤를 찌르거나.
자세를 무너뜨리거나.
혹은 상대를 현혹해 기습을 가능케 만든다거나.
졸렬함이 덕지덕지 그득한 기술들로다가.
검을 바닥에 꼽아 지진을 일으키는 지뢰진은 도망갈 때 좋고.
연화는 순간적으로 상대의 마력을 감지하여 후방으로 순간이동하는 스킬이다. 패시브 스킬인 후방타격과 연계가 뛰어나다.
강맹한 기습은 상대에게 첫 타격을 입힐 때를 한정해서 폭발적인 스피드를 부여하고.
세븐 소드 피어스는 검에 마력을 가해 일곱 개의 마력 검이 동시에 찌르도록 만드는 스킬이다.
“후… 오늘도 힘들었다.”
그런 생활이 정확히 한 달 정도 더 이어진 순간. 이변이 발생했다.
내가(정확히는 변경백이) 살려낸 여자가 드디어 병상에서 일어난 것이다.
변경백과의 사냥을 끝내고 기진맥진한 채로 돌아왔는데. 언제나 죽은 듯이 내 침대에 누워만 있던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 웅?”
“… 얼씨구?”
여자의 양 뺨이 잔뜩 부풀어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내가 점심 때 먹였던 미음 그릇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었다. 일어난 직후라서 배가 고팠던 모양이다.
“…….”
“…….”
나는 방에 들어오다 말고 그대로 굳었다.
허겁지겁 숟갈을 우겨넣던 여인도 탱그랑, 수저를 떨어뜨렸다. 꿀꺽, 힘겹게 입안의 미음을 삼킨 그녀는 조심스럽게 그릇을 옆에 탁자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 그… 배, 배가 고파서 그만… 죄, 죄송합니다.”
“아니… 죄송할 건 없는데.”
아무래도 내가 빤히 쳐다보던 게 허겁지겁 밥 먹는 모습 때문이라고 생각한 듯했다.
부끄러울 것도 없다. 거의 한 달 동안 잠든 채로 미음만 먹었는데 배고픈 게 당연한 거지.
나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다시 방문을 열고 나갈 준비를 했다.
“어쨌든 잘 일어났어. 너한테 묻고 싶은 게 많다.”
“아, 네.”
“뭐 금강산도 식후경이라지. 배가 고픈 거 같으니 음식 좀 가져올게. 먹고 싶은 거 있냐?”
“아, 아뇨! 괜찮아요! 방금 미음을 좀 먹어서 배부른….”
그녀가 퍼뜩 손사래를 쳤지만 타이밍 좋게 우르릉, 하는 소리가 우렁차게 울렸다.
검은 머리 여자는 그게 자기 배에서 난 소리란 걸 깨닫고 다시금 이불을 뒤집어썼다. 얼핏 드러난 귀가 새빨갛게 익어 있었다.
이런 젠장. 솔직하고 허심탄회하게 나 뭐가 먹고 싶다, 딱 말해주면 좀 좋냐. 시간낭비는 질색이다.
나는 손가락을 튕겨대며 좀 강압적으로 말했다.
“먹고 싶은 거 말해. 3초 준다. 3, 2, 1….”
“고, 고기.”
이불에 덮여있던 그녀가 눈을 빼꼼 내밀며 그렇게 말했다.
또박또박. 열렬한 눈빛으로 날 보면서.
… 새끼 튕긴 거 치곤 몸은 솔직하군. 그래. 고기가 뜯고 싶을 법도 하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곧장 방을 나갔다.
“접수. 닭인지 돼지인지 소인지는 나도 모르니까 그것까진 바라지 마.”
“네, 네에.”
나는 곧장 주방으로 달려갔다.
주방에는 레이라가 있을 것이다. 레이라는 하수도 처리 업무가 없을 때는 대부분 주방이나 다용도실에 있다.
사실 당연한 일이다. 메이드니까. 기본적으로 메이드의 일은 전투가 아니라 각종 가정 잡무다. 주방장이 따로 없다보니 요리도 예외는 아니다.
“야 레이라. 고기 좀 남는 거 있으면 주라.”
마침 변경백의 저녁을 준비하던 레이라는 난입한 나를 황당하다는 얼굴로 쳐다봤다. 그리고 곧 그 눈빛엔 혐오와 경멸이 어렸다.
“… 후배… 아니 당신. 밥이라면 아까 먹었잖아요. 누가 천박한 개돼지 족속들 아니랄까봐. 아주 처먹는 거라면 사족을 못 쓰죠?.”
“아 그래. 개돼지 할 테니까 있어 없어.”
“…….”
난 요 일주일 동안 레이라에게 좀 막대하고 있었다.
뭐 변경백 빽을 믿고 그러는 거냐 하면… 반쯤 그렇다. 하지만 내가 이러는 데는 더 큰 이유가 있다.
나는. 이제 레이라보다 강하다.
[명칭: 레이라]
[별칭: 덤벙이 시녀, 할센베르크의 하수도 관리인, 그윈의 연인]
[LV. 63]
[체력: 420/420 마력: 337/337 신체상태: 정상]
[힘: 79 민첩: 88 지능: 32]
내가 순식간에 레벨이 높아지면서 미미르의 눈도 강화되었고, 드디어 그녀의 스테이터스가 보이게 된 것이다.
그리고 보이는 시점에선 이미 내 레벨이 레이라의 레벨을 상회하고 있었다.
아. 그 때의 승리감이란. 우월감이란. 도취감이란!
나는 잠시 감상에 빠졌던 것에서 벗어나 다시금 레이라를 채근했다.
“있냐고 없냐고.”
“있긴 한데, 당신 줄 건 없네요. 흥.”
이런. 너무 속을 긁었나 보다. 레이라가 삐졌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곧장 그녀에게 딜을 걸었다. 원래 친하지도 않은 사이니 어느 정도 양보는 각오하고 찾아왔다.
“알겠어. 오늘 내일 빨래랑 하수도 정리 내가 다 한다. 됐냐?”
“딜.”
레이라는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냄비를 통째로 내게 던졌다.
나는 가까스로 그걸 받아들고 그녀를 쳐다봤다. 하지만 그녀는 혀를 쏙 내미는 걸로 조롱할 뿐이다.
아무튼 귀여운 맛이 없어요. 나는 혼자 씨근거리며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기다렸지. 밥 가져왔다.”
“와, 와아….”
설마 냄비를 통째로 가져올 거라곤 예상을 못 했는지, 검은 머리 여자는 입을 쩍 벌렸다. 나는 냄비를 탁자 위에 놓고 뚜껑을 열었다.
평범한 돼지고기 스튜였다. 열자마자 특유의 향긋한 냄새가 온 방안을 메웠다.
“… 츄릅.”
여자는 침이 고이다 못해 줄줄 새고 있었다.
내가 멍하니 그걸 쳐다보자 핫, 하고 정신을 차린 그녀가 황급히 침을 닦았다. 그리고 다시금 얼굴을 사과처럼 발갛게 붉혔다.
나는 미음 그릇에 있던 수저를 그녀에게 건넸다.
“자. 먹어. 난 아까 먹었으니 다 먹어도 돼.”
“저, 정말요?”
“그래.”
“가, 감사합… 아, 아니. 제가 돼지도 아니고 이걸 어떻게 다 먹어요.”
뒤늦게 내숭을 떨어보려 한 거 같은데. 그게 내숭이 맞았다는 건 불과 30분만에 밝혀졌다.
그녀가 30분 만에 냄비 하나를 다 비워버렸기 때문이다.
“…… 자, 잘 먹네.”
“…… 꺼윽.”
그 엄청난 식욕에는 나도 좀 놀랐다. 내 말에 여자는 몸을 배배 꼬다가 살짝 트림이 나왔다. 그게 또 부끄러운지 얼굴이 다시 빨갛게 익었다.
참 세상 부끄러울 일도 많다.
“뭐 어쨌든. 급하던 허기도 채웠겠다.”
나는 탁자 옆에 있던 의자를 끌어와 여인의 앞에 걸터앉았다. 그녀는 내 분위기가 바뀐 걸 감지했는지 조금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히죽, 한 번 웃고는 그녀에게 말했다.
“이제 비즈니스 얘기 좀 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