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변경백님! 변경백님 계십니까!”
콰앙! 나는 알현실 문을 부술 듯이 열고 들어갔다.
변경백이 앉아있던 의자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놀란 듯이 눈을 끔뻑거리는 변경백이 있었다. 아직도 저주를 중화하던 중이었나 보다.
다행이었다. 나는 여자를 고쳐업은 뒤 곧장 변경백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두 시간 만에 또 보는군. 갑자기 무슨 일인가 정용 공.”
“변경백님, 마법사라 했지요!”
“음… 그렇네만?”
“혹시 치료마법 할 줄 아십니까?!”
내 뜬금없는 질문에 변경백의 눈이 더 커졌다.
그러나 이내 정신을 차렸는지 고개를 슬며시 끄덕였다.
“뭐, 할 줄은 아네. 물 마법의 기초이니.”
“이 친구 좀 치료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나는 그 대답을 듣자마자 등에 업고 있던 여인을 내려놓았다.
변경백은 그제야 내게 업혀있던 여인에게 시선을 돌렸고. 여인의 상태를 본 변경백의 표정이 순식간에 심각하게 물들어갔다.
“숨이 끊어지기 직전이군. 아니. 본래 끊어졌어야 정상인 상태야.”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나는 알지 못하는 모종의 술법이 이 여인의 숨을 붙들어 놓고 있네. 사령술이나 저주와는 좀 다르군. 오히려 축복에 가까운데… 이런 상태로 연명한다면 축복이라고 보기도 어렵겠군.”
변경백은 혀를 낮게 차며 가엾다는 듯이 여인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이내 그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책망과 추궁이 어린 눈빛이었다.
“어쩌다 이런 상태가 됐지? 아니. 애초에 이 여인은 누구인가.”
“그게… 저도 누군지는 잘 모릅니다. 사실….”
나는 지하에서 있었던 일, 그리고 레이라가 하수도에서 벌이던 일을 모두 변경백에게 꼰질렀다.
아주 세세하게 낱낱이 보고했다. 내가 당한 고통과 두려움도 빠짐없이 보고했다. 졸렬하지만 뭐 어떠냐. 다 살자고 하는 일인데.
“흐음. 역시 그랬군. 대충 예상은 하고 있었다만….”
변경백은 그윈에서 레이라로 이어지는 용사 학살 대목에서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마 본인도 알고 있었던 것이리라.
그러나 이 여인을 3년간 감금했다고 중얼거렸다고 말하자 변경백의 표정은 무시무시하게 굳어갔다.
“레이라. 네년이 올챙이 적을 생각지 못하고 이런 잔악무도한 짓을…!”
빠드득. 옥좌를 움켜쥔 변경백의 손가락이 그대로 철제 의자를 파고들었다.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투기 때문에 나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 이런. 너무 흥분해버렸군.”
그는 괴로워하는 나와 옆의 백작 부인을 뒤늦게 목격하고는 살기를 거뒀다.
아마 나보단 백작 부인이 괴로워한 게 크게 작용했을 거다. 세상 서럽네 X벌.
이내 변경백은 한숨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천천히 내쪽으로 다가와 여인에게 손을 뻗었다.
“뭐, 일단 중요한 건 이 여인을 살리는 게지. 나머진 나중으로 미룸세.”
“아 예. 그럼 부탁드립니다.”
“이 경우엔 상처 치료보단 활력을 주입하는 게 우선이니… 에테르 힐(ether heal).”
변경백이 중얼거리기 무섭게 그의 손에는 새파란 기운이 응축되었고. 그것이 서서히 여인에게로 스며들었다. 여인의 얼굴에서 조금씩 핏기가 돌아오는 듯했다.
변경백은 힐링이 끝난 뒤에도 몇 번이고 그 주문을 반복했다. 연신 그의 손이 빛나고 그 빛무리를 여인이 탐욕스럽게 빨아들였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했을까.
“… 아, 아아?”
어느새 혈색이 말갛게 돌아온 여인이 눈을 떴다.
그리고 심하게 갈라지는 목소리로 탄성을 흘렸다. 나는 그 시점에서 일단 안도의 한숨을 돌렸다.
그녀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주변을 살폈다. 상황을 파악하려는 듯했다. 결국 그녀는 입을 열었다.
“여, 여기는… 어디… 아.”
그리고 푹. 다시 여인이 혼절했다.
나는 깜짝 놀라서 변경백을 쳐다봤으나, 변경백은 이마의 땀을 닦으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걱정 말게. 육체가 안정을 되찾아서 수마가 몰려온 걸 테지.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은 다 했네.”
“아… 그, 그렇군요.”
“체내 마력은 정상궤도로 돌아왔어. 이제 주기적으로 식사를 하고 편하게 쉬어주면 곧 기운을 차릴 수 있을 걸세.”
그렇게 말하며 사람 좋게 웃는 변경백.
나는 잠시 고민하다, 이내 고개를 조아리고 절을 했다. 순수하게 감사에서 나오는 인사였다.
“감사합니다 변경백님. 에… 당장 해드릴 건 없고. 제가 어떻게든 나중에 이 은혜 꼭 갚겠습니다. 장부에 달아 두십쇼.”
“하하. 역시 자네는 재밌는 친구란 말이야.”
… 정말로 저 사람에게 어떤 꿍꿍이가 있어서 내게 이렇게 잘 해주는 건가.
새삼 이렇게 도움을 받고 나니 그런 생각이 울컥 치고 올라왔다. 나는 마음이 복잡해져서 뒷머리를 긁적였다.
변경백은 그런 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물었다.
“자네는 이 여인과 생판 남이라고 하지 않았나.”
“예 뭐… 일단 맞습니다만.”
“그런데 그런 여인을 살리려고 자네에게 살의를 품은 레이라를 적대하고. 이 야밤에 내가 있는 곳까지 찾아와 고개를 조아리는 이유가 뭔가.”
대충 ‘불타는 정의감 때문에 못본 척할 수 없어서요’라고 변명하려 했다.
하지만 변경백의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그는 꿰뚫을 듯이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입맛을 다시고 허심탄회하게 사실을 말했다.
도움받은 게 있는데 최소한 구라는 치지 말아야지.
“레이라한테 들었습니다. 변경백님도 용사들 때문에 피 좀 많이 보셨다면서요.”
“… 허허. 뭐, 표현은 좀 그렇지만 일단 사실이네. 그래서?”
“그래서 쉽게 말하면 아무도 믿을 수가 없어진 거죠. 저한테는 지금 이 성에서 완전한 제 편이 필요할 것 같았습니다.”
내 말에 변경백은 눈가를 빛냈다. 나는 담담히 그 눈빛을 주시했다.
“완전한 자네의 편이라.”
“예. 솔직히 변경백님도 믿을 수 없고 레이라는 당연히 믿을 수 없고. 하지만 생명의 은인이라면 적어도 뒤에서 칼 꼽진 않겠죠. 그래서 구했습니다.”
변경백의 눈가가 일순 날카로워졌다.
다음에 나온 질문을 생각하면 내 착각은 아닐 것이다.
“그 말은. 나라면 칼을 꼽을 수도 있겠다는 소리군.”
“예. 일단 뭐 제가 변경백님 입장이라면 분명 꼽았을 것 같습니다. 전 소인배라서 삐지면 오래가요.”
내 말에 변경백이 침묵했다.
나는 그 침묵이 버티기 어려워진 나머지 끝내 사족을 한 마디 붙였다.
“아 뭐, 솔직히 처음엔 그럴 계산으로 레이라한테 덤비긴 했는데. 막상 그 여자 몰골을 보니 말이 아니어서 말이죠. 당장 죽을 것처럼 껄떡대길래 체면이고 뭐고 달려온 것도 있긴 합니다. 저도 그렇게까지 냉혈한은 못 되는가 보죠.”
“흐하하하!”
내가 허탈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거리자, 곧 웃음이 터져나왔다.
변경백이었다. 그는 유쾌한 얼굴로 웃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악수 신청이다.
“참 솔직해서 좋군. 자네를 보고 있으면 옛날 그윈을 처음 봤을 때가 떠오른다네.”
“… 칭찬입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칭찬일세. 기뻐하게.”
“그렇다면야 기쁘게 받죠.”
나는 마주 웃어주며 변경백이 내민 손을 가볍게 마주잡았다. 그리고 그가 이끄는 힘에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곧장 여인을 안아 들고 알현실을 나가기 시작했다.
문을 열고 나가기 직전, 변경백이 등뒤에 대고 나직이 말했다.
“자네는 이 혼란한 세상을… 할센베르크를 구하기 위해 찾아온 용사인가?”
의미심장한 질문이었다.
하긴 용사랍시고 소환된 사람한테 날리는 질문인데 어떤 면에선 당연한가?
나는 기왕 솔직해지기로 한 거, 끝까지 솔직하기로 했다.
“아뇨. 그냥 어쩌다 보니 끌려온 잡배입니다.”
“그래. 좋군.”
변경백은 그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한층 신뢰가 담긴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내일부터 곧장 마족 사냥을 시작할 걸세. 잘 부탁하네 정용 공.”
“… 예. 저야말로.”
아무튼 이상한 감성의 소유자라니까. 저 양반도.
나는 속으로만 그렇게 생각하며 알현실의 문을 닫았다.
* * *
그래서 뭐, 다음 날부터 시작된 마족 사냥이 어떤 식이였냐면.
단어 하나면 충분하다.
지옥.
응. 그냥 지옥 그 자체였다.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더도 없고 덜도 없고 그냥 지옥이었다.
까가각! 가가가각!
끼에에엑! 끼에엑!
변경백을 따라 성 외곽으로 출정을 나간지 끽해야 10분 정도 되었을까.
사방에서 허연 해골들과 좀비, 구울, 레이스까지 온갖 종류의 언데드들이 우리를 덮쳤다. 그 수는 가볍게 잡아도 수백을 웃돌았다.
웬만한 학교 운동장이 꽉 찰 수준의 언데드 대군이 순식간에 사방에서 나를 조여오는데. 그 충격적인 경험이 아직도 잊히지가 않는다.
“그럼 전에 언질했던 대로. 내 짐을 잘 부탁하게. 내 뒤로 꼭 붙어있게나.”
“네, 넷! 그럼요! 물론이죠!”
하지만 그런 엄청난 대군에도 눈 하나 깜짝않은 변경백은 자연스럽게 내게 짐을 넘겨주고는, 앞으로 한 걸음 전진했다.
그의 한 손에는 장검이, 그리고 한 손에는 새빨간 수정이 박힌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변경백은 곧 눈을 감고 잠시 정신을 집중하더니, 전방으로 지팡이를 힘껏 휘둘렀다.
“아발란치(avalanche).”
짤막한 영창이 끝나기 무섭게 하늘이 찢어지는 굉음이 울렸다.
동시에 하늘에서는 주먹만한 우박이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미친 듯이 내리기 시작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눈사태를 보는 듯했다.
끼기에에엑!
그에에엑!
대략 100마리 정도의 언데드가 일거에 쓸려나갔다. 나는 혀를 내두르며 멍하니 그 광경을 눈에 담았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는 곧장 오른쪽으로 지팡이를 돌려 영창을 시작했다.
“스톰 롤러.”
그곳에는 칼같이 불어오는 바람이 겹치고 겹쳐 거대한 토네이도를 형성했다.
그것에 지나가는 자리에는 본래 언데드였던 무언가의 잔해만이 마구 흩어져 있었다.
이윽고 그는 뒤쪽을 향해 지팡이를 휘두른다.
“에테르 볼케이노.”
땅가죽이 열리며 용암이 솟아오른다. 용암들은 마치 살아있는 양 언데드들을 추적해 녹여버렸다. 언데드들은 단말마도 지르지 못한 채 한줌의 재가 되어야 했다.
변경백은 마지막으로 왼쪽을 향해 지팡이를 휘둘렀다.
“대격변(Cataclysm).”
땅이 용트림하며 그대로 쩍쩍 갈라진다.
언데드들을 집어삼킨 땅들은 융기하고 수축하길 반복하며 춤을 췄고, 그 와중에 수많은 언데드가 아작났다.
“후우. 이 정도면 충분하다.”
거기까지 하고 난 뒤 변경백은 냅다 지팡이를 바닥에 버렸다. 내가 그걸 주워들면 비로소 왼손에 들고 있던 검을 양손으로 고쳐든다.
“이제 잔당들을 처리할 시간일세. 가세나 정용 공!”
“아, 아 예!”
“하아아아압!!”
가세나, 같은 말은 왜 하는 건지 모르겠다.
어차피 혼자 총알 같이 달려나가서 무쌍 찍을 거면서.
그리고 그렇게 지켜주던 방패가 없어진 나는, 마법에서 살아남은 언데드 잔당들에게 맛있는 먹잇감으로 전락한다.
캬아아아오!
기에에엑!
살아남은 몇 마리의 언데드들이 나를 둘러싼다.
나는 아차 싶은 마음에 변경백을 쳐다봤지만 소용없다. 그는 이미 자기 전투에 심취해 있어서 언데드들을 도륙하는 데 바빴다.
“이, 이런 제길… 어쩔 수 없지! 변경백님 오실 때까지 시간을…!”
나는 베스타크를 뽑아들었다.
내 전의를 읽은 건지 언데드들은 모든 방향에서 나를 향해 일제히 달려왔다. 타임을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들어주지 않겠지.
“으아아 X벌! 물 불 바람 땅! 다 빨아!”
울음이 나올 것 같은 기분을 꾹 눌러 삼키고 미친 듯이 에테르를 흡입했다.
나는 신호등 마냥 빨강 초록 노랑으로 찬란한 빛을 내뿜으며, 놈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으아아아아! 스파르타아아!!”
… 그런 나날이 자그마치 2주일.
아직까지 내가 21번째 전생에서 멈춰있다는 사실이 솔직히 믿기지 않는다.
내가 정말 살아있긴 한 건가? 내가 모르는 새 사실 죽었던 게 아닐까? 기억을 잃어서 눈치 못챈 게 아닐까? 이런 생각도 끊임없이 들었다.
정말이다. 오죽하면 요즘 아침에 눈뜨고 가장 먼저 하는 일과가 망자의 함을 확인하는 거다.
반응이 없으면 오늘도 무사히 눈을 떴구나, 하며 혼자 뿌듯한 생각에 빠진다.
“오늘도… 살아남았군… 후, 후후후….”
그렇게 중얼거리며 성에 돌아가면 그대로 죽은 듯이 곯아떨어지고.
다음날 일어나면 다시 위의 과정을 반복한다.
… 어쩌다 보니 그런 인생이 되어 버린 것이다.